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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일부 수정: 9월 19일 오후 4시]

이맘때쯤이었을 것이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여름을 겨우 보낼 무렵, 만원 지하철에서였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이 곁에 있던 베트남 처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자신이 월남전에 참전했었다며 목소리를 높인 그 노인은, 마주 웃어주는 베트남 처녀에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베트남 사람들은 윤리의식이 투철하더라고. 저 노인도 베트남 현지인들에게 총칼을 겨누었을 텐데, 그가 덧붙인 베트남인들의 투철한 윤리의식도 파괴하려 했을 텐데. 진심으로 반가운 표정의 노인과 그의 인사말 사이의 괴리에 잠시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지난 8일, 추석을 맞아 청와대 안뜰에서 열린 80분짜리 이명박 대통령의 '추석맞이 특별 대담'을 보면서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 대통령이 서민들의 처지에 대해서는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대기업 중심의 현 정책 방향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지부장
 유명자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지부장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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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이 대통령은 명절을 맞아 덕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았다. 책임을 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국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희망'을 언급했던 것이다. 마치 베트남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책임은 까맣게 잊은 채로 그들의 윤리의식을 칭찬했던 그 노인처럼.

"위기가 왔지만 희망을 갖고 삽시다."

이 대통령의 '희망' 발언은 위안이 되기는커녕 상처가 되었다.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 대통령의 이와 같은 발언에 대해 "이 대통령이 대기업 중심 정책에 대해서 반성을 하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면서 "이 대통령은 웃었지만 국민들은 상처 입었다"고 말했다.

이런 이율배반적이고 현실과는 까마득히 먼 이 대통령의 '서민 걱정'을 들으며, 이 나라 서민의 한 사람으로서 뭔가 갑갑한 기분이었다. 완전히 소통되진 않지만 군데군데 박히는 몇 단어로 전체 내용을 추측할 수밖에 없는 이국의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충 감은 잡을 수 있는, 결코 유쾌하지 못한 내용의 영화. 이 대통령의 '희망'은 한꺼풀 흐려진 영화의 내용처럼 답답한 소리에 불과했다.

대통령의 '희망'과 노동자의 '희망' 사이  

노상에서 다섯 번째 추석을 맞는 재능교육 조합원들에게도 이명박 대통령의 대담은 상처로 돌아왔다. 서울 시청광장 건너 환구단 앞, 하루에도 수천 대의 차들이 지나다니는 도로가에 천막도 없이 이불 한 장 깔고 밤낮을 버티는 사람들. 1400여 일을 버텨온 그들의 시간은 이 대통령이 말한 '희망'의 현실이 어떠한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재능교육 조합원들의 싸움은 작년인 2010년 5월, 재능교육의 대표이사가 바뀌면서 급격히 악화일변도로 치닫기 시작했다.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은 이명박 대통령과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동문이다. 박 회장은 같은 고려대 출신인 양병무 숙명여대 겸임교수를 대표이사로 내정했다.

유득규 학습지노조 사무처장(왼쪽)
 유득규 학습지노조 사무처장(왼쪽)
ⓒ 이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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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무 대표이사는 2008년부터 대통령실 위민포럼 자문위원을 맡아왔으며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 일색인 '양병무의 행복경영'이라는 글을 시리즈로 발표하고 있다. 숙명여대 겸임교수이기도 한 그는 "오뤤지"로 유명한 숙명여대 이경숙 전 총장과는 막역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이경숙의 섬김 리더십>이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발간사에서 그는 이경숙 총장과의 특별한 인연을 소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경숙 총장은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제 17대 인수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된 바 있다.

재능교육이 말하는 '행복경영'이란? 

그러나 실상, 양 대표이사의 경영방침은 그가 내세운 '행복경영'과는 거리가 멀다. 노사가 함께 행복한 '행복경영'이라는 그의 신념과는 다르게 그가 대표이사로 취임하자마자 노동조합에 대한 직접적이고 강제적인 폭력의 서막을 열었기 때문이다.

먼저 노동조합 사상 유례 없는 조합원들에 대한 재산 압류와 경매가 시작되었다. 동산, 부동산 할 것 없이 압류되어 경매에 넘어갔고, 가정들은 그렇게 산산이 깨어져갔다. 작년 말, 재계약 시기부터는 현장에 있는 조합원들에게 노동조합을 탈퇴하지 않으면 재계약하지 않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은 조합원들이 할 수 없이 탈퇴서를 쓰고 노동조합을 떠나갔다.

조합원 재산 압류에 대해 학습지노조 유득규 사무처장은 "너무 많아서 기억도 다 안 난다"고 했다. 학습지노조 강종숙 위원장의 급여와 차가 압류되었고, 어머니가 물려준 유득규 사무처장의 집,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오수영 사무국장의 동산이 압류되었다(오수영 사무국장의 동산에 대한 압류는 뒤에 취소되었다. 또한 재능교육측은 "유득규 사무처장의 집 압류에 대해 해당 부동산의 임차인이 배당신청을 함으로써 법원에서 압류가 취소되었다"고 밝혀왔다). 그 외에도 노동조합 방송차를 비롯해, 노동조합 사무실의 집기들이 모두 압류되어 경매에 넘어갔다.

그리고 현재는 회사에서 손해배상에 대한 민사소송 진행 과정으로, 노동조합 간부들을 신용불량자로 등재해 신용카드 사용은 물론이고 모든 대출이 정지되어 있는 상태다.

협박과 약탈의 경영. 또 다시 노상에서 한가위를 맞는 재능교육 조합원들이 이 싸움을 이대로 끝낼 수 없는 이유다. '섬김 리더십'을 운운하면서 뒤로는 노동자들의 생존 자체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것이 양병무 대표이사와 박성훈 재능교육 회장의 '행복 경영'의 실체이며 이명박 대통령이 말하는 '희망'의 현실이다. 나아가 이는 한나라당의 '친서민 복지'가 '텅 빈 복지'임을 확신하게 한다.

9월 13일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갈비연대' 행사를 하던 날. 재능교육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윷놀이 하는 모습.
 9월 13일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갈비연대' 행사를 하던 날. 재능교육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윷놀이 하는 모습.
ⓒ 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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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엄마, 나의 노동조합

"제가 잘 울지 않습니다."

지난해 말, 돌아가신 어머니가 물려주신 집이 압류되었을 때, 유득규 사무처장이 집회 현장에서 그렇게 말을 꺼냈다.

"눈물이 흐를 때가 딱 두 번 있는데, 우리 엄마 이야기 할 때랑 우리의 희망, 재능교육 교사 노동조합 이야기 할 때는 눈물이 납니다. 재능교육 노동조합은 저의 생을 걸고 활동했던 곳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고, 그런 저의 삶을 지켜봐줬던 엄마이기 때문에 눈물이 납니다."

누구에게나 남다른 엄마의 이름, 엄마가 남겨놓은 기억까지 모조리 빼앗아가는 기업이 이 나라의 대표적인 교육 기업, 재능교육이다. 마흔이 넘은 딸 자식이, 시집도 못 가고 노동조합 한다고 돌아다니는 딸내미가 당신 가시는 길에도 얼마나 눈에 밟혔을까. 그 엄마가 남겨준 집에까지 회사는 경고장을 붙이고야 말았다.

"장남인 저희 오빠에게도 안 해준 집을 저에게 남겨주고 돌아가셨습니다. 기죽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 열심히 하면서 살라고."

유득규 사무처장은 이젠 볼 수 없는 '엄마'의 기억을 붙들기 위해 울음 섞인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그래도 그녀는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엄마의 기억이 깃든 장소를 이 나라의 '교육' 기업, 재능교육이 앗아갔기 때문이다. 이것이 양병무 대표이사가 그리고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이 추구하는 '행복경영'이라면 할 말이 없다. 결국 노사가 행복한 경영이 아니라, 자본가만 행복한 경영. 그것이 재능교육의 경영 윤리였던 것이다.

9월 13일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갈비연대' 행사를 하던 날. 재능교육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윷놀이 하는 모습.
 9월 13일 재능교육 농성장에서 '갈비연대' 행사를 하던 날. 재능교육 노동자들과 시민들이 함께 윷놀이 하는 모습.
ⓒ 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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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추석, 함께하는 사람들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은 2007년 5월, 2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임금이 삭감되는, 회사에 유리한 임금체계로 계약이 되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노조의 요구는 '단체협약 원상회복'이었고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오랜 투쟁을 하는 동안 회사가 차례차례 해고한 해고자들을 복직시키라는 요구가 그사이 더해졌다.

"추석인데, 좀 우울하죠."

재능교육 노동자들의 투쟁이 딱 1363일째를 맞던 9월 13일. 시청광장 앞 재능교육 농성장에는 작은 먹거리 축제가 벌어졌다. 조합원들과 함께 농성장에서 명절을 보내기 위해 온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와 함께 나눈 것이다.

"명절 되면 서러운 사람들이 더 모여야 한다"는 강종숙 위원장의 말처럼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길거리에 자리를 깔고 마음을 나눴다. '길거리'에서 다섯 번째 추석을 맞는 소감을 물었더니 유득규 사무처장은 추석이라고 농성장이 별다르겠느냐며 웃는다. 11월 7일이면 재능교육 노동자들이 서울 혜화동 재능교육 본사에서 시청으로 나온 지 꼭 1년이 되는 날이다.

"벌써 날씨가 추워졌네요."

유득규 사무처장은 힘들고 길었던 하루들이 모여 어느덧 1년이 되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고 했다. 그저 승리할 때까지 함께하자고, 그러면 행복해질 거라고 웃는다. 그리고 오는 20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가 고용노동부를 대상으로 실시하는 국정감사에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과 유득규 사무처장이 증인으로 채택된 소식을 전하며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말했다. 재능교육 박성훈 회장이 국정감사 증인으로 채택된 배경에는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의 역할이 컸단다.

청와대 안뜰에서 열린 이명박 대통령의 '추석맞이 특별 대담'처럼 거창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 속에는 진정한 의미의 '행복'과 '희망'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재능교육의 텅 빈 '희망'과 '행복'에 맞서 진짜 '희망'과 '행복'을 되찾기 위해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재능교육측 반론
재능교육은 위 기사에 대해 회사는 2010년 5월 대표이사가 취임을 하면 그간 끌어왔던 노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급단체인 서비스연맹과 민주노총서울본부 등과 대화를 했으며 해결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혀왔습니다.

또한 회사는 노조활동을 이유로 조합원들에게 재계약을 않겠다는 협박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노조는 재능교육 불매운동으로 회사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외에 조합원 재산 압류는 불법행위에 대한 정당한 법 집행이지 부당한 압류조치가 아니며, 유득규 사무처장의 집 압류는 해당 부동산의 임차인이 배당신청을 함으로써 법원의 압류가 취소돼 이미 종결된 사안이며, 오수영 사무국장 동산 압류도 회사가 경매를 취하했다고 알려왔습니다.

특히 재능교육은 2007년 재능교육의 노동자들의 투쟁이 회사에 유리한 임금체계로 계약되면서 시작되었다는 기사 내용과 관련 "'과거 제도에 비해 성과의 비중을 높이는 구조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임금이 삭감된 것이 아니라 임금이 증가한 교사들도 많다"고 설명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혜정 기자는 한국비정규노동센터 편집부장입니다.



태그:#이명박, #재능교육, #한나라당 친서민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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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운수노조 서울지부에서 조직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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