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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시민연합 등 83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친일·독재 찬양 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 9일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독재자 이승만·친일파 백선엽 찬양방송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민주언론시민연합 등 83개 시민단체가 참여한 '친일·독재 찬양 방송 저지 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 9일 KBS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독재자 이승만·친일파 백선엽 찬양방송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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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는 6월 23일과 24일, '6·25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전쟁과 군인 - 백선엽 편'을 2부작으로 내보낸다고 밝혔다. 또한 8월 15일부터는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 이승만 편'을 5부작으로 방영하기로 했다.

백선엽은 6·25 전쟁의 영웅이었으며 이승만은 8·15 건국의 주역이었다. 동시에 백선엽은 친일파였고 이승만은 독재자였다는 사실을 KBS가 모를 리 없다. 따라서 이런 프로그램이 만만치 않은 반대에 직면하게 되리라는 점 또한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프로그램을 그것도 2부작 5부작씩의 특집으로 방영하려는 모습에는 무모함과 성급함이 엿보인다.

지난달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등은 5·16 50주년 특집기사를 대대적으로 내보냈다. 두 신문은 똑같이 5·16 핵심인물인 김종필 전 공화당 의장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조선일보>는 주로 박정희의 소탈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부각시킨 데 비해, <중앙일보>는 한층 노골적으로 박정희와 5·16을 부각시켰다.

<중앙일보>는 논설위원 칼럼을 통해 '박 전 대통령과 5·16 세력은 산업화와 자주국방을 내걸고 한국 사회의 변혁을 주도했다'고 하면서, 4·19와 5·16 정신은 결국 하나이고 특히 5·16은 우국충정의 순수한 거사였던 것처럼 기술했다. 이런 <중앙일보>의 주장은 '5·16은 구국의 영단'이었다고 평가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의 발언과 맥락을 같이 한다.

1979년에 죽은 박정희가 한국 사회에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997년 말 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부터였다. 바꿔 말해 1998년 이전에는 '박정희 향수'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따라서 1979년부터 1997년 사이 박 전 대통령 가족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박근혜 의원에게 이 기간은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되곤 한다.

보수언론의 박정희 부활 공정

박정희가 되살아난 것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집요한 '박정희 부활 공정(工程)' 덕분이었고 여기에 보수 기득권층이 적극 호응했기 때문이었다. 먼저 두 신문은 방대한 분량의 박정희 기사를 장기간에 걸쳐 연재하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했다. 특히 조갑제 전 <월간조선> 편집장과 김진 <중앙일보> 논설위원은 이 공정에 대표적인 첨병 역할을 다해왔다. 친일문인 이광수를 존경하는 소설가 류철균(필명 이인화, 이대 교수)도 소설 <인간의 길>을 통해 박정희를 신성적(神聖的) 수준으로 미화하기도 했다.

그들은 박정희를 '국가 수호와 경제 발전의 화신'으로 거듭나도록 했다. 이러는 동안 박정희의 약점인 '친일'과 '독재'는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한국의 보수 기득권층은 친일을 '반공'으로 치환하고 독재를 '국가주의'로 세탁하는 데 기민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1997년부터 보수언론의 노력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박정희 향수는 2000년대 들어 '박정희 신드롬', '박정희 신화'라고 일컬을 정도로 위세를 발휘해 왔다. 게다가 보수신문들은 틈나는 대로 박정희에 대한 여론조사를 벌여 그것을 대대적으로 보도함으로써 박정희 붐을 재생산하곤 했다. 이에 따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난공불락의 1위를 유지해 왔다.

아래는 역대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거칠게 요약해 본 것이다.

2001년 <동아일보> 보도 : 박정희 58.4%, 김대중 22.9%
2002년 <월간중앙> 보도 : 박정희 46.4%, 김대중 16.7%
2003년 <연합뉴스> 보도 : 박정희 68%, 김대중 18%
2004년 (주) 아이클릭 조사 : 박정희 41.7%, 노무현 12.3%, 김대중 11.2%
2005년 <조선일보> 보도 : 박정희 47.9%, 김대중 14.3%, 노무현 6.7%

심지어 박정희는 현대사 인물 전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도 백범 김구보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5000년 역사를 통틀어서도 세종대왕을 이기고 1위에 오를 정도의 기현상을 보였다. 물론 이런 조사 결과는 박정희에 반대하는 일부 국민을 극도로 상심케 하고 절망시킨 것이 사실이다.

2008년 들어 난공불락의 박정희 신화에도...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명박 후보는 검은색이 도는 선글라스를 즐겨썼다. 당시 열린우리당에서는 "10년을 주기로 '박정희 신드롬'에 기대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 전 시장이 '박 전 대통령 따라하기'를 선거전략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2006년 10월 26일 유럽을 방문중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유람선에 승선한 모습.
 2007년 대통령 선거에 나선 이명박 후보는 검은색이 도는 선글라스를 즐겨썼다. 당시 열린우리당에서는 "10년을 주기로 '박정희 신드롬'에 기대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 전 시장이 '박 전 대통령 따라하기'를 선거전략에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사진은 2006년 10월 26일 유럽을 방문중인 이명박 전 서울시장이 독일 뒤스부르크에서 유람선에 승선한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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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향수가 절정에 달했던 것은 2007년까지였다. 그리고 이것은 2007년 말 대선에서 이명박이 승리한 요인과 직결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면서 박정희 흉내를 내곤 했다. 무엇보다도 다수의 유권자들은 이명박 후보에게 박정희식 경제 성장을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박정희의 방식이 과연 새 시대에 적용 가능하고 적합한 것인지에 대한 통찰은 거의 없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알았겠지만 2008년을 기점으로 박정희에 대한 평가에는 변화가 나타난다. 말 그대로 난공불락이던 '박정희 신화'에 하향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이명박에 대한 실망이 결정적으로 작용했겠지만 박정희의 인기가 사그라지는 것은 한국 보수 기득권층을 심란하게 만드는 사태임에 틀림없었다.

이 시점에서 시사주간지 <시사IN>이 보도한 설문조사 결과에는 놀라운 현상이 잠복해 있다. 난공불락이었던 박정희에 대한 신뢰도 평가가 2007년 52.7%였던 것이 2년 후인 2009년에는 41.8%로 급감하더니 2010년에는 34.2%로 곤두박질한 것이다.

한편, 2009년 6월 17일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KSOI)가 실시한 역대 대통령 호감도 조사에서는 박정희 38.1% 노무현 36.0% 김대중 10.7%로 나타난다. 물론 이것은 노무현 대통령 서거 직후 조사라는 특수성을 갖는다. 하지만 이 조사는 노무현과 김대중을 합친 비율이 박정희를 처음으로 이겼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띠기도 한다.

가장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지난 5월 9~10일 '더 좋은 민주주의 연구소'(소장 국회의원 백원우)가 여론조사전문기관 '리서치뷰'에 의뢰해 조사한 전·현직 대통령 평가에는 이런 박정희 향수 하락 추세와 민주개혁진영의 약진 추세가 다시 한 번 반영되어 나타났다.

재출마 시 지지 의향을 묻는 조사에서는 박정희 57.5%, 노무현 47.7% , 김대중 39.9%로 나왔고, 호감도 조사에서는 박정희 31.9%, 노무현 30.3%, 김대중 19.8%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급격히 변화된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동향 또는 추세임을 방증하는 수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호감도 조사에서 민주개혁 진영의 수치가 박정희를 눌렀음은 물론 최초로 과반수를 돌파했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겠다.

백선엽의 '친일' + 이승만의 '독재' = 박정희의 '친일·독재'
 
이처럼 박정희 향수는 분명히 사그라지고 있다. 그동안 많은 국민은 박정희 부활 공정이 본질적으로 일제강점기로부터 대한민국으로 이어진 보수기득권층의 헤게모니 공세라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해 왔다.

한국에는 진정한 보수가 설 땅이 없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기득권을 쥐고 있는 보수는 '사이비 보수'라는 말도 있다. 그들은 친일세력과 독재세력일 터이기 때문이다. 한국 주류 언론의 설립자 <동아일보>의 김성수, <조선일보>의 방응모, 한국의 대표사학이라고 하는 고려대학교의 유진오, 연세대학교의 백낙준, 이화여자대학교의 김활란 총장 등은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들이다. 이런 사례는 지면이 부족할 정도로 허다하다.

이번에 KBS 6·25 특집다큐 방영 예정으로 있는 백선엽은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을 두 번 역임했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부대 장교로서 독립군 토벌에 가담한 친일파였다. 간도특설부대의 악명은 유달리 높아서 이 부대의 경우 비록 사병이었을지라도 <친일인명사전>에 기재한다는 기준이 있을 정도이다.

이승만은 4·19 학생혁명으로 해외 망명한 독재자이다. 동시에 그는 50~100만에 이르는 양민 학살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KBS는 난데없이 친일파와 독재자를 부각시키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고 한다. 무모하게도 왜 하필이면 이 시점에서 '친일'과 '독재'란 말인가?

이것은 박정희가 '친일'과 '독재'의 이력 두 가지를 함께 보유한 인물이란 점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박정희를 포함한 세 사람은 범상치 않은 인연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승만은 백선엽을 두 번씩이나 육군참모총장에 기용했다. 또한 백선엽은 박정희를 두 차례 결정적으로 도와주었다. 백선엽은 여순항쟁 직후 박정희가 남로당 조직책으로 밀약하다가 체포되어 사형 처분을 받았을 때 구명해 주었고 6·25가 터지자 박정희를 군에 복귀시켰다. 백과 박 두 사람 모두 일제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를 하다가 만주군 장교가 되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비극과 소극과 광란극

2010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2010년 11월 14일 경북 구미시 상모동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 주차장에서 열린 숭모제에 참석한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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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선거에서 경험했듯이 박정희 향수는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중차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박정희의 딸이 유력한 후보로 출마하게 되는 차기 대선은 더 말할 나위조차 없다. 한국의 보수기득권층은 박정희 향수가 사그라지고 있다는 것을 이미 감지했다고 보아야 한다. 2009년 이후 보수 언론들의 역대 대통령 여론조사 보도를 보기 힘들어졌다.

박정희가 쓴 친일혈서가 확인된 것은 작년의 일이다. 박정희 시절에 유죄판결을 받은 인사들이 최근 들어 법원에 의해 속속 무죄판결 및 피해보상 판결을 얻어내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보수기득권층은 박정희 향수가 사그라지고 있다는 데 심각한 위기를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박정희를 살려야 한다. 박정희를 살리자면 친일과 독재에 면죄부를 주어야만 한다. 친일을 반공으로 치환하려면 백선엽 장군이 요긴하다. 독재를 국가주의로 세탁하려면 이승만 대통령 외에는 없다.

정동익 4월혁명회 상임의장은 "요즘 KBS가 망가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다... KBS 사장이 과거 MB 특보하다 사장 자리 꿰차더니 이제 수구보수세력의 유신공주가 집권할 때를 대비해, 사욕을 위해 공영방송 전파를 악용하려는 것 아니냐고 얘기하는 이들이 있는데 지금 행태를 보면 그렇게 얘기해도 싸다"고 말한다.

"헤겔은 세계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모두 두 번 일어나거나 등장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첫 번째는 비극(悲劇)으로, 두 번째는 소극(笑劇)으로 나타난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었다."(칼 마르크스)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는 논문 '박정희 체제 18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첫 번째 박정희가 비극이었다면 두 번째 전두환은 소극이었다고 평가한다. 덧붙이기를 그는, 헤겔이나 마르크스와는 달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세 번 일어나거나 등장하는데, 그것이 첫 번째는 비극, 두 번째는 소극, 마지막으로는 광란극(狂亂劇)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한 바 있다.


태그:#KBS다큐, #박정희 향수, #백선엽, #이승만, #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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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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