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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점심시간, 삼성전자 사내 온라인 게시판(삼성전자 Live2.0 오픈 커뮤니티)에 글 하나가 올라왔다. 하지만 "법에 보장된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건설하는 것이 삼성전자 사원들의 권리를 지키고 보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는 내용의 이 글은 약 15분 만에 관리자에 의해 삭제됐다.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 가운데 찾아보기 어려운 '무노조 경영' 방침을 고수하는 삼성에서 용기 있게 반기를 든 사람은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제조그룹의 박종태(42) 대리. 삼성노조를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는 여럿 있었지만 내부 직원이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본격적으로  나선 건 그가 처음이다.

 

7일 오후 삼성 기흥공단 인근 음식점에서 박 대리를 만났다. 가장 먼저, 이름까지 공개하면서 거대한 기업에 맞서는 것이 "두렵지 않냐"고 물었다.

 

"끝까지 가봤습니다. 이제 두려운 게 없죠."

 

매년 직무평가에서 최하점을 받았고, 컴퓨터도 없는 빈 책상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왕따' 근무에, 면직이라는 징계와 전문분야와 상관없는 단순 포장 업무로 인사발령까지, 회사에서 받을 수 있는 불이익의 "끝까지 가본" 박 대리는 앞으로도 노조 설립을 위한 활동을 계속해 나갈 것임을 분명히 했다.

 

협상할 수 없는 '한가족협의회'... "서명기계일 뿐"

 

박 대리의 글이 공개된 것은 잠깐이었지만 반응은 뜨거웠다. "힘내세요", "소통을 위한 게시판이라더니 삭제해 버렸네요"라며 그를 응원하는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박 대리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들로부터 격려의 문자메시지가 날아왔고 사측에서 뻔히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내메일로 응원의 글을 보내는 직원들도 있었다.

 

그가 같은 글을 사내 다른 전자게시판에도 올리려 했지만 관리자의 승인이 있어야 등록이 가능했다. 박 대리는 글을 올리고 나서 얼마 후에 '게시판의 내용으로 적합하지 않다. 해당 사업부 인사 담당자와 사전 협의하라'는 내용의 게시물 반려 메시지를 받았다.

 

1987년 입사한 박 대리는 2007년 말부터 지난해까지 '한가족협의회'라는 노사협의회의 위원을 맡고 있었다. 한가족협의회는 삼성에서 노동조합을 대신해 각 사업부별로 선출된 위원들과 사원 복지 등을 논의하는 협의체다.

 

'한가족협의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특히 임신한 여성 노동자가 겪는 불이익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상사들의 폭언과, 임산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근무시간과 노동강도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리는 "임신한 여성노동자들이 과로로 유산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며 "임산부에게 퇴사를 권유하는 압박 같은 것을 어느 정도 해결했지만 회사는 그런 행동을 노조를 만들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고 말했다. 그때부터 박 대리의 고난이 계속됐다.

 

그는 지난해 2월 '한가족협의회' 위원 자격을 상실했다. '삼성의 글로벌 경영 정책과 신흥시장 환경 이해'라는 취지로 시행하는 '한가족 스쿨(school)' 행사에 불참한 것이 빌미가 됐다. 그 후로 인사고과에서 불이익을 계속 받았다는 박 대리는 지난 5월 회사와 한가족협의회를 상대로 감봉 처분과 근로자위원 면직 결정에 대한 무효확인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 박 대리에게 회사는 소송이 진행되던 지난 7월 러시아 장기출장을 지시했다. 그러나 그가 건강상의 이유로 출장을 거부하자 회사는 7월 28일 그의 직무를 정지시켰다. 박 대리는 출장 지시 전부터 목디스크 치료 및 스트레스로 인한 신경질환에 대한 약물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박 대리는 "러시아 출장은 다른 직원이 가기로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느닷없이 동행을 시킨 것"이라며 "병원 진료와 치료 중이었고 건강이 호전되면 출장을 가겠다고 했으나 회사는 전문의의 소견과 진단서를 무시하고 출장 거부라며 직무대기 처분을 내렸다"고 호소했다.

 

그 후 박 대리는 직무대기 상태로 컴퓨터도 없는 빈 책상에서 사내 메일도 사용할 수 없게 차단된 '왕따 직원' 생활을 하게 됐다. 그는 "이 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됐다"고 말했다.

 

"삼성 제조 부문은 사실상 상시 구조조정 체제"

 

그는 "한가족협의회와 그 후에 벌어진 부당한 처사를 겪으면서 노동조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그는 "한가족협의회가 노사 간의 대화창구지만 명확한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직원들이 선출된 대표자들이 사측과 할 수 있는 것은 협상이 아닙니다. 그들이 할 일은 회사가 하려는 일에 협의를 할 뿐이지 협상은 안 됩니다. 노조가 있으면 회사와 협상을 할 수 있는데 한가족협의회는 협의가 안 되면 그대로 끝이란 말이죠. 회사가 해주고 싶으면 하는 거고 아니면 못한다고 봐야 합니다."

 

박 대리는 "협의회 의원들이 사측이 원하는 대로 서명만 하는 '서명기계'처럼 하고 있다"며 "대부분의 의원들은 좋은 인사고과를 받고 출세를 하기 위해 한다. 협의회의 사측 사람이 '20년 동안 박 대리 같은 사람은 처음'이라고 할 정도"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협의가 안 됐을 경우 사원들이 할 수 있는 게 전혀 없다. 구조조정을 할 때도 협의회 의원들과 상의를 해야 하지만 막을 수는 없다"고 덧붙였다.

 

박 대리는 "구조조정, 희망퇴직 같은 일이 얼마나 자주 있냐"는 질문에 "지난 2년 동안 구조조정은 없었지만 알게 모르게 퇴직한 사람이 많았다"며 "나이가 들고 근무 기간이 오래되면 다른 하청업체 같은 곳으로 나가게 되는데, 회사에서는 퇴직자들이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노력한다고 하지만 지금 내 직장, 삼성보다 더 좋은 곳이 어디 있냐"고 꼬집었다.

 

그는 이어 "삼성 전체는 알 수 없지만 제조그룹에서는 구조조정이 상시적으로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노조 원하는 내부 목소리 높다"

 

사실 '무노조 삼성'에 대항하려는 시도는 여러 차례 있었다. 지난 7월에도 삼성SDS 대전지사에 근무하는 최아무개 차장이 350여 명의 직원들에게 '선진노조를 만들겠다'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고 동참을 호소했지만 회사의 방해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당시 삼성은 최 차장에게 "사내 메일을 비업무 용도로 사용하지 말라"는 경고를 보내고 그의 메일을 삭제했다. 최 차장은 그 후 서울로 근무지를 옮기게 됐다. 최 차장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삼성 비자금' 파문이 일었을 때도 노조 설립을 추진했지만 이 역시 회사에 의해 가로막혔다고 밝혔다.

 

그만큼 삼성의 '무노조' 경영 의지는 확고하다. 그러나 박 대리는 "삼성노조의 설립이 정말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삼성노조는 언젠가 생길 것이고 멀지 않았다"고 확고하게 답했다. 그는 복수노조제도가 시행되는 2011년을 삼성노조의 원년으로 내다보고 있었다.

 

"삼성노조를 원하는 내부 목소리가 높습니다. 민주노조를 세우자는 글을 공개한 후 다른 사업부에서도 뜻에 공감한다며 만나자는 사람이 있어요. SDI, LCD, 전기 그룹에서도 문자와 메일이 오고 있습니다. 복수노조가 시행되면 분명 어용노조가 생길 것입니다. 사원들이 어느 노조에 많이 가입하느냐가 문제인데, 회사의 부당함을 계속 어필해야 합니다. 사원들은 실질적으로 자신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보고 있을 겁니다."

 

박 대리는 끝으로 삼성노조를 세우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에 대해 "보이지 않는 인권유린의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관리자들의 폭력적인 언행, 사원들이 부당한 문제에 대해 제기할 수 없게 만든 인사고과제도, 일방적인 인사발령, 상시 구조조정 같은 일들은 노조가 없기 때문"이라며 "초일류 기업에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민주노조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라고 기자에게 되물었다.

 

한편, 그의 글이 공개되고 언론에서 다뤄지자 회사는 또다시 박 대리와 접촉했다. 박 대리는 지난 9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오늘 인사위원회에서 나를 불러 '박 대리가 회사 밖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은 회사에도, 박 대리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라고 말했다"며 "인사에 불만이 있으면 인사위원회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라는 것은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라는 협박"이라고 토로했다.


태그:#삼성, #삼성노조, #삼성SDS, #박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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