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백숙 500페소'의 정체는?
 '백숙 500페소'의 정체는?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백숙 500페소'

2천미터를 넘나드는 산중 어디즈음에 위치한 필리핀 바타드의 사이먼씨 산장. 비행기로 네 시간에 버스로 열 두 시간, 거기에 지프니 두 시간에 걸어서 두 시간은 더 와야 겨우 도착하는 이 곳에 익숙한 한글로 써져있는 백숙이란....

"한국 사람들이 많이 오길래, 한국 음식 하나는 배워야겠단 생각을 했어. 그래서 자주 오는 한국 사람한테 가르쳐 달라고 말했지."

백숙은 그렇게 필리핀 세계문화유산이자 세계 8대 불가사의에 절경이라 불리는 바타드 한 복판에서 태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백숙은 사람들이 잘 시켜 먹어요?"
"한국 사람들 오면, 그럭저럭."
"그런데, 아저씨가 아무리 맛있게 한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단 맛있을리가 없을 텐데…"
"그거야 당연하지."
"그러면 여기까지 와서 굳이 왜 그걸 먹어야 되는거지?"
"그거야 오는 사람이 찾으니까."

바타드 마을로 가는 길.
 바타드 마을로 가는 길.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생각해보니, 사이먼씨 산장에 메뉴엔 이푸가오 전통 음식은 하나도 없었다. 붉은 빛깔에 찰진 이푸가오 쌀이나 고구마와 비슷한 까모떼, 구이 형태의 돼지나 닭 고기, 전통차와 술까지.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이 찾지 않아서였고, 당연히 찾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이런 엉뚱한 풍경 뒤로는 아프리카 저 멀리에서부터 건너오는 인스턴트 커피와 코코아, 필리핀 수도 근방에서 생산되는 병맥주, 배타고 필리핀에 와서 버스 타고 바나우에까지 온뒤 어깨에 들러 매진 채 들어오는 요리용 치즈까지. 신선할리 없고 환경 파괴는 물론 맛도 우리 동네보다 떨어지는 아류 음식들은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백숙 500페소'는 까칠한 사람을 만난 탓에 그 자리에 붙어 있는 걸 무안해 했다. 이푸가오 지역의 닭 요리였다면 여기만의 재료와 솜씨로 사랑받았을 텐데... 외부에서 재료를 들여오고 낑낑대며 만들어도 그닥 맛있지 않다는 게 죄라면 죄였다.

관광객은 무슨 근거로 현지에 도움을 준다고 생각할까

한 손엔 펜, 다른 한 손엔 수첩. 기필고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무장한 공정여행 참가자들은 바타드의 중심 마을로 발걸음을 향했다. 이푸가오 지역에 대한 역사문화에 대해 공부도 하고, 공익단체 사람들에게 이 지역 현실에 대해 강연도 들었던 그들. 이제는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보겠노라며 발을 동동구르고 있었다.

바타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의 모습.
 바타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참가자들의 모습.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관광객이 지역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잠시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지역에 도움이 되면 얼마나 되겠어요. 그럴 거라고 관광객들이 생각하는 거지."
- 지방정부 관리를 인터뷰한 공정여행 2조 보고서 중 일부

"1년 내내 농사 짓느라 바쁜데(2모작), 논둑 밟아서 논은 다 망가뜨리고 애들한테 돈 조금 지어주면 우리가 고마워해야 되나?"
- 바타드 주민을 인터뷰한 공정여행 1조 보고서 중 일부

<관광이 아태지역 문화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 IMPACT / 유네스코 방콕 아태지역 사무소> 중 일부 발췌 - ①
 <관광이 아태지역 문화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 IMPACT / 유네스코 방콕 아태지역 사무소> 중 일부 발췌 - ①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관광이 아태지역 문화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 IMPACT / 유네스코 방콕 아태지역 사무소> 중 일부 발췌 - ②
 <관광이 아태지역 문화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 IMPACT / 유네스코 방콕 아태지역 사무소> 중 일부 발췌 - ②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그러나 관광으로 인해 실제로 수익을 얻는 부문은 숙박, 수송, 여행 서비스 분야와 기념품 관련 분야뿐이다. 계단식 농경지를 경작하고 있는 농민들은 관광을 통해 어떠한 경제적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관광산업에 개입할 여지는 매우 적은데, 그것을 위한 투자 자본이 없고 정부와 토호, 그리고 다국적기업들이 달려들기 시작하면 그 틈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 부정적인 반응을 참가자들은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산장에서 마을을 오가는 길에 마주친 아이들은 친구들과 잘 놀다가도 돈을 달라며 끈덕지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한 할머니는 "관광객들 때문에 애들이 다 거지가 돼 간다"고 혀를 찰 정도였다. 가끔 와서 농사일을 도와준다거나 우리 가게 살림에 보탬이 된다는 말은 이 문제와 함께 늘어놓을 수조차 없는 풍경들이었다.

호텔을 표방하는 콘크리트 건물이 늘어나고, 서양식 음식을 판다는 문구가 드문드문 보이며, 멀쩡한 아이들과 사람들이 구걸하는 모습. 모든 시선이 관광객들에게 쏠리면서 생긴 기현상들이었다. 산장 바로 옆에 있는 바타드 마을 협회에선 오늘도 싸움이 났다. 관광객들에게 현금으로 받는 기부금의 사용내역을 가지고 몇몇 주민들이 문제제기를 한 탓이었다. "이런 모습은 이푸가오 족이 우상을 숭배하며 자신들의 잘못된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바타드 마을의 떠돌이 목사의 말이 그날따라 더 희극적으로 들렸던 것은 왜일까?

"여기도 이제 끝났구만."
"순수한 사람들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더러운 모습에 물들어 버리다니."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서슴치 않고 던지는 말들. 그들이 입고 다니는 좋은 옷과 신발이 조성하는 위화감 따위가 그런 말을 쉽게 내뱉는 우리들 안중에 있을리 만무했다.

다국적 기업 커피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푸가오 차를 마시자는 삽화를 그린 뒤 사이먼 씨 산장에 게시한 모습.
 다국적 기업 커피의 부당함을 알리고, 이푸가오 차를 마시자는 삽화를 그린 뒤 사이먼 씨 산장에 게시한 모습.
ⓒ 고두환

관련사진보기


이푸가오 차를 한 잔 마신다는 의미

세계에서 1년에 4천억 잔의 커피가 소비되는데, 커피 한 잔의 가격 구성을 분석해보면 유통 마지막 단계인 소매점이 25%를 가져가고, 수출업자가 10%를 가져간다. 세계 커피 무역의 75%를 지배하는 네슬레, 크래프트, 제너럴 푸즈 등 거대 다국적기업이 55%를 가져간다. 정작 땡볕에서 땀 흘리며 가장 고생한 가난한 농민들의 몫은 1%도 안 된다. 50킬로그램짜리 커피콩 한 자루의 가격은 뉴욕이나 런던에서 팔리는 커피 가격으로 계산하면 1만3000달러인데, 생산지에서는 그 180분의 1에 불과한 70달러에 팔린다. 바나나도 치키타, 돌, 델몬트 3대 다국적기업이 세계무역의 3분의 2를 지배한다.
- 공정무역이란 무엇인가? / 한겨레신문 2009년 5월 18일자 중 일부 발췌

우리가 이 곳을 방문해서 하루 세 번 차를 마실거라고 이야기했을 때, 사이먼씨는 "커피와 코코아를 많이 사둬야겠다"고 말했다. 공정무역의 취지와 공정여행이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여행이라고 이야기하며 이푸가오 지역에서 생산되는 차를 마신다고 이야기하자 사이먼씨는 이렇게 답했다.

"생각해보니 우리도 이푸가오 차 마신 지 오래됐네…."

다국적기업 차의 반 값, 거기에 손수 수작업과 무농약으로 길러진 이푸가오 차는 운송을 위한 환경파괴 또한 없으니 공정여행의 취지와 딱 맞았다. 우리는 사이먼씨 산장에 메뉴에 없었던 이푸가오 차와 이 곳의 전통음식들을 추가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달콤하면서도 독한 전통술(라이스와인, 쌀로 만든 술)까지.

참가자들은 거기에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접지 않았다. 우리가 이제까지 파악한 공정여행과 공정무역의 문제의식과 조그마한 실천 의식들을 간단한 삽화로 그린 뒤 사이먼씨 산장에 게시하기로 했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우리의 글을 보고, 더 맛좋고 이 곳을 이해할 수 있는 이푸가오 차와 전통음식들을 이용하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다음 날, 옆 집 사는 라몬씨가 사이먼씨에게 와 이렇게 물었다.

"차랑 까모떼도 팔리냐?"
"그러게. 이제부터 팔아볼라고."

우리가 이푸가오 차를 마시기 위해 지불한 돈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우리의 의도는 충분히 전달됐을거라 생각한다. 더 맛좋고 공익적인 이곳의 차를 마시며 지역경제 활성화와 그들 문화의 자부심을 갖게 만들어준 이푸가오 차를 한 잔 마시는 시간. 우리의 여행도 기존의 관광과 무엇이 다르냐고 말하면 그저 고개 숙이고 있겠지만, 조그마한 실천이 공정에 한발짝 더 다가간단 생각엔 아직까지 변함이 없다.

이번 여름, 햅쌀을 대접하겠노라 호언장담하던 사이먼씨와 바타드 사람들, 서로가 설레는 여행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일까?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
NGO 아시안브릿지 필리핀은 2010년 1월 12일~18일까지 필리핀 루손섬 북부 이푸가오 지역에서 '젊음, 열정으로 복원하는 세계문화유산 대학생 공정여행 캠프'를 진행했습니다. 위의 기사는 당시 있었던 여행으로 쓰인 것임을 밝혀드립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BS 유포터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공정여행, #필리핀, #아시안브릿지 필리핀, #대학생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