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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의료공급체계에서 민간의료기관이 차지하는 비중은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전체 의료기관 수 대비 민간의료기관의 비중은 90%가 넘고 전체 병상 수 대비 민간병상의 비중은 80%를 웃도는데 대부분의 OECD 회원국의 민간의료기관과 병상의 비중이 30%가 채 되지 않는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가히 기형적인 수준이다.

이에 지난 참여정부에서는 공공의료 확충을 위한 종합대책을 발표하였는데 그 대책 중의 하나가 전국의 34개 지방의료원과 6개 적십자병원을 지역거점공공병원으로 육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 40개 지역거점공공병원에 보건복지가족부의 재정지원이 있었고 이와 같은 정책적 노력은 해당 병원의 인프라 개선에 도움을 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적십자병원은 소유주체의 측면에서 보면 민간의료기관이지만 이를 정부 공공의료정책의 틀 안에 편입시켜 우리나라 공공의료를 강화하기 위한 시도를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적십자병원은 1905년 처음 설립된 이후 다양한 보건의료사업과 소외계층들을 위한 인도주의적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진행하였으며 대한적십자사는 한때 16개 병원과 2개 의원, 2개의 병원선을 운영하면서 병원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보건의료환경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병원사업이 축소되어 왔고 현재는 서울, 인천, 대구, 상주, 거창, 통영의 6개 적십자병원만 운영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어려운 환경에서도 적십자병원은 우리나라 공공보건의료체계에서 급성기 2차 병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사회적 취약계층들을 위한 진료 및 다양한 공익적 보건의료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일부 병원들은 지역의 거점병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2년 전 새로 취임한 대한적십자사 총재와 집행부는 '미래전략특위'와 '경영합리화추진위원회'라는 조직을 구성하여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다각적인 혁신방안을 모색하였고 이 과정에서 서울적십자병원 축소, 대구적십자병원 폐원이라는 조치들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에 시민단체, 노조, 보건의료전문가 단체들은 '적십자병원 공공성 확대를 위한 시민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우리나라 보건의료체계의 공공성 약화 및 취약계층의 의료안전망 약화로 이어질 것이 뻔한 이러한 조치에 적극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이 문제를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 나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직면한 대한적십자사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적십자 병원의 폐원과 축소는 없으며 2010년 상반기 안에 발전방안을 마련하겠다고 여러 차례 공언한 바 있다. 

하지만 최근 대구적십자병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들은 대한적십자사의 이러한 약속들이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하는 근본적인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갈 곳이 없어서 10년 이상 장기 입원해 있던 마지막 2명의 환자가 나가면서 병원은 입원환자가 없는 병원이 되어 버렸다. 마지막 남아 있던 1명의 의사는 2월 24일로 계약이 만료되어 대구적십자병원은 의사도 없고 입원 환자도 없는 그야말로 '개점, 폐업'이라는 말도 안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적십자사는 의사수급계획을 포함한 대구적십자병원 정상화방안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책도 내놓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면서 병원이 정상화되기만을 기대했던 직원들의 임금은 1000% 이상 체불되어 있지만 대한적십자사는 얼마 전 대한적십자사 대구지사 명의로 대구적십자병원 부지 중 국유지 부분인 227평을 66억 원을 들여 매입해 놓은 상태이다. 그야말로 폐원에 따른 부동산 매각의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오고 있는 중인 것이다.

대구적십자병원은 입원 환자의 60% 이상이 절대적 저소득층인 의료급여 수급자이며 전체 본인부담금 수입이 21% 정도로 대구광역시 및 인근 지역의 의료안전망으로서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충실히 해 온 병원이었다. 그러나 단지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이 병원이 폐원되도록 방조하고 폐원 이후 부동산 매각을 통한 경영 정상화 운운하는 것은 대한적십자사가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고 적십자운동의 기본 원칙인 인도, 공평, 자발적 봉사의 원칙을 스스로 위배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아직까지도 스스럼없이 대한적십자사 회비를 내는 것은 대한적십자사가 단지 헌혈만 하는 곳이 아니라 회비를 통하여 다양한 공익적 사업을 진행할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가 심화된 지금 이 시기, 어떠한 이익도 추구하지 않으면서 사회적 취약계층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고 이들의 건강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공익적인 사업이다.

대한적십자사는 지금 대구적십자병원의 폐원을 운운할 것이 아니라 국제적십자운동의 기본원칙에 근거하여 대구적십자병원의 구호병원적 성격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병원 정상화 방안을 마련하여야 한다. 지금 당장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도 대한적십자사 회비와 후원금의 3% 정도만 지원하여도 대구적십자병원은 폐원이 아닌 도시형 구호병원으로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아마도 적십자회비를 납부하는 모든 국민들은 대한적십자사가 당연히 이러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기대할 것이다.

많은 국민들은 아직 대한적십자사가 적십자 병원에 회비의 1%도 투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다. 게다가 대구적십자병원의 폐원을 방관하고 이를 조장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면 이들의 대한적십자사에 대한 실망은 극에 달할 것이다. 공익적 사업을 하라고 회비를 납부하는데, 이러한 사업을 하지 않는 대한적십자사에게 무엇 때문에 회비를 또 다시 납부하겠는가? 대한적십자사가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덧붙이는 글 | 정백근 기자는 경상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태그:#대구적십자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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