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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관리현안 긴급토론회- 전문성 포기가 규제개혁인가' 토론회 현장.
 '기록관리현안 긴급토론회- 전문성 포기가 규제개혁인가' 토론회 현장.
ⓒ 정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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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 선조들의 기록을 보면, 먼저는 방대한 양에 놀라게 된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있다. 한순간도 놓치지 않는 꼼꼼한 기록화와 철저한 기록관리 문화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들 기록이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혹은 남겨져있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렇게 풍성한 역사문화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우리의 후손들에게 제대로 된 역사를 물려주지 못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대한민국의 기록관리 문화가 후퇴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한국기록학회, 한국기록관리학회, 투명사회를위한 정보공개센터, 기록관리학 전공 주임교수 협의회, 한국국가기록연구원, 기록관리 전문가포럼, 기록관리전공 학생연합 등 학계와 시민단체, 현직 기록연구사 등이 긴급토론회를 열었다.

2일 저녁 서울 종로구 통인동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열린 이날 토론회에는 늦은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현재 정부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기록물관리법 개악 움직임에 반대하는 것에 의견이 모아졌다. 특히 토론회에 참석한 이들은 "행정규제 개혁"과 "기록관리 선진화 방안"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고 있는 기록물관리법 개정 움직임이 실제로는 공공기관 기록관리의 기반을 흔들고 있으며, 이는 정부가 다시 "기록이 없는 시대"로 되돌아가려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이후 토론은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으로 이어졌다.

최근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의 주도로 논의되고 있는 기록물관리법 개정 움직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부는 기록물관리의 효율성 제고를 위해 기록물 보존 및 관리절차를 정비하겠다고 한다. 언뜻 보면 업무 효율을 위해 복잡한 관리절차를 개선하자는 이야기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기록물 폐기절차를 간소화해 기록물을 쉽게 폐기할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될 경우 과거와 같이 행정기관 내에서 자의에 따라 임의로 기록을 폐기할 명분을 주게 될 뿐이다. 뿐만 아니다. 현재 기록물관리법에 따르면 비공개로 되어있는 기록은 5년마다 재분류하여 공개여부를 검토하도록 되어있는데, 이 절차마저도 삭제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국민의 알권리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행정편의주의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모두 "기록을 기반으로 한 행정의 투명성 제고"라는 기록관리 정신 자체에 역행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둘째,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이하 전문요원)의 자격조건을 완화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전문요원은 기록물관리법에 의해 기록관리학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자 이거나 역사학, 문헌정보학 석사학위 이상을 취득한 자로서 행정안전부 장관이 정하는 기록물관리학 교육과정을 이수한 자만이 그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되어있다.

기록물의 생산, 분류, 이관, 수집, 평가, 폐기, 공개, 활용 등 기록의 전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주체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문요원의 자격요건을 자격증제도를 따거나, 단기 교육을 이수면 자격을 가질 수 있도록 하향조정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기록관리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업무가 아니라 기술과 기능 업무라고 여기는 정부의 시각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날 토론회 후 기록관리 현안 대책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기록관리 학계와 시민사회단체는 현재 진행중인 정부의 기록물관리법 개악 움직임에 대한 강력한 대응의지를 천명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자격 완화 ▲행정편의주의적인 기록 폐기 및 비공개기록 공개재분류 절차 폐지 계획 철회 ▲'국가기록관리 선진화방안' 이행 ▲정부의 일방적 법 개정이 아닌 기록학계 및 시민사회, 이해당사자와 함께 이 문제에 대해 논의 할 것 등을 정부에 요구했다.

한편 기록관리현안 대책위원회는 정부의 개악 움직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법령개정 저지운동 및 서명운동 등을 전개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기록물관리법 개악 관련 성명서 전문


우리나라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아시아에서 가장 많은 세계기록문화 유산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나 정부수립 이후 우리나라의 기록관리는 '하찮은' 행정 업무로 인식되어 찬란했던 기록문화 전통의 명맥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였다. 정부수립 이후 50년이 지난 1999년에 이르러서야 󰡔공공기관의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이하 기록관리법) 제정을 통해 공적 업무에서 생산한 기록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2000년부터 기록관리법령이 시행되었지만 기록관리를 천대하던 공직 풍토는 쉽게 변화되지 않았다. 기록관리법령에 규정된 기록관의 설치,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배치는 연기되었고, 행정기관의 자의적인 기록 폐기 등 과거의 잘못된 기록관리 관행을 반복하였다. 즉 기록을 생산했으나 관리하지 않았고, 제대로 공개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 나라'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것이 불과 몇 년 전의 일이다. 십여 년 전부터 기록관리 업무를 국가 행정의 기본적인 분야로 인식하고, 국제 표준에 입각한 기록관리 제도 보완과 인프라를 확대하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제 수준과 민주주의의 진척 정도로 보았을 때 매우 뒤늦은 조치였다.

그러나 정부는 다시 '기록이 없는 시대'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최근 국무총리실과 행정안전부 주도아래 행정규제 개혁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자격 완화, 행정기관의 자의적 기록 폐기 부활, 공개재분류 절차의 조정 등은 왜 정부 행정에서 기록관리가 중요한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 또한 기록학계․연구자․대학원생 등 이해 당사자의 광범위한 의견 수렴과국무총리 소속 국가기록관리위원회의 논의조차 거치지 않아 절차상의 문제를 지닌 만큼 이와 같은 논의의 정당성에 의문을 갖게 한다.

행정규제 개혁 차원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은 첫째, 기록관리는 석사 이상의 자격을 요구하는 전문 업무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기록연구직 임용 자격을 석사학위자로 제한한 것은 과도하며,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하다는 논리이다. 둘째, 기록물의 보존기간이 5년 이하인 기록물을 폐기하는 경우 외부 전문가의 심의 없이 기관 차원에서 자체 폐기토록 할 수 있도록 하고, 비공개 기록은 5년마다 재분류하여 공개여부를 검토하는 현재의 절차를 삭제하려 하는 것이 골자이다.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을 석사학위자 이상으로 규정한 것이 '과도한 규제'라는 논리는 기록관리의 전문성을 배제하고, 행정의 일반성만을 주장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부가 기록관리를 방치해왔던 과거 관행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부족한 데에서 기인하는 것이라 단언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기록관리 전문가에게 석사학위 이상의 자격을 요구하고 있고, 각 나라의 기록관리전문가협회도 전문가 양성을 위해서 대학원 수준의 필수 커리큘럼을 규정하고 있다. 심지어 독일은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기록관리 전문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현대 지식정보화사회에서 많은 나라들이 기록관리를 고도의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기록관리 전문가에게 높은 수준의 학력과 더불어 윤리강령으로 표현되는 도덕성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에 대해서도 정부는 논할 자격이 없다. 이미 기록관리법 시행령의 수차례 개정을 통해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배치시한을 연기해왔던 정부는 전문성과 업무연속성이 강조되는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을 '계약직', 심지어 '시간제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지방자치단체의 전횡을 묵인하였고, 기록관리 정상화를 위한 기록관의 설치를 미루어 왔기 때문이다.  

또한 공공기록의 폐기 간소화를 위해 보존기간 5년 이하의 기록물을 외부위원의 심의 없이 폐기가 가능하도록 법령을 개정하는 것은 과거와 같이 행정기관 내에서 임의로 기록물을 폐기하자는 의도에 다름 아니다. 이는 현재까지도 국가기록관리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어 있는 보존기간 책정의 과학화 문제를 방기하는 것이다. 아울러 기록물의 공개재분류를 5년마다 하지 않겠다는 논의는 국민의 알권리를 확대하지 않겠다는 행정기관 또는 공무원 중심의 사고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즉 이는 현대 정부 기록관리 업무의 새로운 흐름은 수요자 즉 국민에게 기록정보를 최대한 이용할 수 있도록 제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정부는 전문적인 기록관리 업무를 행정기관 내부의 규제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정보화시대 현대 국가 행정의 근간을 이루는 부분으로 인식하고 자성하여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정부는 그동안 국무총리실을 중심으로 논의했던 내용을 공개하고, 올바른 '국가기록관리 선진화 정책'을 추진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 우리의 요구사항 >
1. 기록물관리 전문요원의 자격 완화를 철회하라
2. 행정편의주의적인 기록 폐기 및 비공개기록 공개재분류 절차 폐지 계획을 철회하라
3. '국가기록관리 선진화방안'을 철저히 이행하라
4. 기록학계 및 시민사회, 이해당사자와 관련 사항 전반에 대해 발전적 입장에서 논의 하라

2010년 2월 2일

한국기록관리학회, 한국기록학회, 기록관리학 전공 주임교수협의회
한국국가기록연구원, 기록관리 전문가포럼, 정보공개센터, 전국 기록관리전공학생연합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정보공개센터 홈페이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기록물관리, #아키비스트, #기록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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