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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갑산 일대에서 유해발굴팀에 의해 드러난 희생자 유골
 불갑산 일대에서 유해발굴팀에 의해 드러난 희생자 유골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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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애기울음 저곳에 애기울음… 배고파 울고… 거기 가 쪼까 있는 동안 참 눈물 바다였어요. 그런데 마지막 보름날 새벽에 그 난리가 나갖고. 한 발도 못가요 시체 때문에. 그냥 계곡에 물이 흐르면 순 피 물만 이렇게 흘러내려가고. '오매 세상에 이러고도 살아야 쓰까.'" - 삼서면 여맹위원장 출신 이근신씨 증언

1951년 2월 함평군 해보면 불갑산 일대에서 국군 제11사단 20연대 2대대와 경찰의 공비토벌 과정 중 함평과 영광, 장성지역 주민들이 집단 희생된 사건은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인간 사냥터였다.

11사단은 비무장한 민간인 특히 여성, 어린이에게 조차 무차별 발포를 가했다.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하에 민간인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주민 100여 명 이상이 빨치산 또는 빨치산 협력자라는 이유로 적법한 절차 없이 포탄과 총알에 쓰러졌다.

그렇다면 희생된 민간인들은 왜 불갑산으로 몰려들었을까? 그들은 왜 군·경에 의해 숨진 후 58년이 지난 2009년에서야 삭아 없어진 유골로 모습을 드러냈을까?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2009년 유해발굴 보고서'(구술조사, 진실화해위원회)를 통해 당시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관련기사 : 유해 발굴 최고 권위자, 드러난 유골 다시 묻다).

그들은 왜 불갑산으로 몰려들었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약 한 달만인 7월 23일 새벽 인민군 6사단이 함평에 진주했다. 하지만 인공시절을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같은 해 10월 15일 국군 11사단 20연대가 광주에 진주했고, 10월 23일 함평을 수복했다. 인민군이 패퇴하자 불갑산은 산으로 숨어든 일부 빨치산들의 활동 거점이 됐다.     

국군 11사단은 불갑산 토벌작전을 개시했다. 앞서 이들은 불갑산 일대 주민들에게 소개령을 내렸다. 마을에 남아 있던 삶의 흔적은 모두 잿더미가 됐다. 주민들은 국군의 소개 작전으로 인근 월야, 해보, 나산면 마을로 피난길에 나섰다.

하지만 군인의 명령과 지시로 성대마을로 피난 간 주민 대다수가 다시 국군 5중대(일명 '5중대 사건)에 의해 무참히 희생되는 일이 발생했다. 1960년 국회 양민학살특위의 졸속조사에서도 '5중대 사건'으로 그해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 까지 524명이 인명피해를 입은 것으로 기록됐다.

5중대 사건은 불갑산 인근지역 주민들을 사상과는 무관하게 안전한 불갑산으로 피난길에 오르게 했다. 군경의 무차별 토벌작전과 5중대 사건으로 불안감을 느낀 민간인들이 '안전지대'인 불갑산으로 입산한 경우가 많았다는 얘기다. 군·경이 수복과정에서 살인과 약탈, 강간을 일삼는다는 소문에 불갑산으로 피난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물론 인공시절 각급기관에서 활동하거나 그 가족들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입산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군경합동 토벌작전은 무차별로 진행됐다. 1951년 2월 20일 새벽 군경합동 '대보름작전'이 시작됐다. 11사단 20연대 2대대와 연대 중포중대, 대전차중포중대, 수색소대에다 영광과 함평경찰, 청년방위대와 우익단체를 동원했다.  

"무차별 총격, 기관총에 포탄까지..."

방공호를 따라 드러난 희생자 유해
 방공호를 따라 드러난 희생자 유해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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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은 군경의 총격으로 시작됐다. 군경은 비무장한 민간인 피난민들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기관총과 포탄도 쏟아 부었다.  

"그냥 우리를 보고서 기관총을 쏴버려…….저기서 한번 드르륵, 이쪽에서 드륵륵. 쾅! 이쟈 포가 터지고, 어디로 갈 데가 없어……." - 문만섭 증언, 불갑산 사건 생존자, 유족

"(국군들이) 수색작전을 하면서 총을 쐈고, 그러니까 피난민들이 동요할 것이 아닙니까? 막 도망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쏴 버리고, 그랬다 이거입니다. 그러니까 그 길 양쪽 논이며 어디고 하얘 부렀어요." - 김진현 증언, 당시 빨치산 함호대 사령관, 유족

구술조사를 진행한 박만순씨(민간인학살진상규명 충북대책위원장)는 보고서에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산야 곳곳에는 주검들이 뒹굴었으며, 핏물이 계곡에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민국 군경은 불갑산 빨치산 토벌이라는 미명하에 살기 위해 피난한 민간인들을 무차별 사살한 것이다."

그런데도 진실화해위원회는 2008년 12월 내린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사망시점이 교전 중이었는지, 교전 후였는지가 불분명하다며 일부를 조사대상자에서 제외시켰다. 군·경이 진압과정 초기에 빨치산과 민간인이 구분되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인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견해에 따라 교전 과정중 발생한 사망자를 민간인학살 희생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사단은 증언을 토대로 "11사단이 비무장한 피난민들을 무차별로 사살했다"며 교전 중 숨진 사람들도 조사대상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관련증언도 제시됐다.

"군인들은 죄 있고 없고, 빨치산이고 애들이고 뭐고 가리지 않았어요." - 당시 월야지서 토벌대 1중대장, 경찰 오정인의 증언

"피난민들, 양민들 때문에 우리(빨치산)는 총 한 방을 쏜 일이 없어.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방을 안 쐈습니다. 작전참모가 총 한방 안 쏘고 무혈후퇴를 했다고 나중에 비판을 받기까지 했어요" - 당시 빨치산이었던 함호대 사령관 김진현, 유족

"갓난아기까지 일가족 몰살.."

유해와 함께 발굴된 희생자 유품. 수저와 비녀, 머리빗 등 생활용품은 이들이 피난민이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유해와 함께 발굴된 희생자 유품. 수저와 비녀, 머리빗 등 생활용품은 이들이 피난민이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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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 상황에서 가족과 함께 죽음을 자처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진순비씨의 경우 아들이 군인에게 잡혀가자 '내가 혼자 살면 뭣 하겄냐, 같이 죽을란다'며 군인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아들과 함께 죽음을 맞았다.

불갑산 오두재에서는 지난 해 유해발굴 결과 숟가락 뭉치와 함께 비녀와 아기신발 등 유품이 나왔다. 이와 관련 당시 상황을 직접 목격했던 문만섭(불갑산 사건 생존자, 유족)씨는 같은 마을 박연수(당시 56세) 가족의 이야기를 증언했다.

"군인들이 약 100m되는 방공호에 3줄로 세워 속으로 들어가게 하더라고. 바로 옆줄에도 세 명이 있었는데 맨 아래부터 박연수의 딸 박순덕(당시 23세), (박순덕이) 등허리에 애기 하나 업었응게, 둘에다가 박연수의 처 정중산(당시 55세) 까지 셋."

박연수 일가는 이렇게 오두재에서 (갓난아기까지) 몰살당했다.

대보름작전 다음날인 2월 21일 군유산에서 불갑산 오두재로 돌아온 김진현(빨치산 이었던 함호대 사령관)은 대원들과 함께 시신의 모습을 보고 전율하고 만다.

"여자시신에는 자궁에 죽창이 꽂혀 있었고, 일부 남자 시신의 항문에도 죽창을 …….죽창을 우리 손으로 다 뺐지요."

이같은 증언은 지난 해 진실화해위원회(순천대학교 문화유산연구소)가 벌인 유해발굴 결과와 일치했다.

발굴된 고무신과 구슬, 수저 유품이 말해주는 것은?

희생자 유해
 희생자 유해
ⓒ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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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 해보면 가정마을 뒷산 매장지에 대한 유해발굴 결과 발견된 유해 수는 모두 159구(2003년 일부 발굴분 포함)가 드러났다.

충북대학교 유해발굴센터 감식결과 이중 19세 이하 10대는 모두 35명으로 1∼15세 미만이 21명에 달했다. 1∼3세 1명을 비롯 3∼6세 4명 등이 포함돼 있다. 또 전체 사망자 중 29명이 여성이었고 대부분 24세 미만이었다. 이는 이곳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부녀자를 포함한 민간이고 피난민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유품에서도 확인된다. 출토된 1048점의 유품 중에는 여성들의 사용하는 비녀를 비롯 어린이용 고무신,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구슬과 다량의 수저 등이 들어 있어 이를 확증해 주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8년 함평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결정문을 통해 △국가의 사과와 △위령사업 및 유해발굴지원 △ 제적부 및 공식문서가록 정정 △ 역사기록 수정 △ 평화인권교육 강화 등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후 증언자들이 실제 이행되고 있다고 피부로 느낀 일은 '유해발굴사업' 뿐이다.

드러난 진실, "왜 대통령 사과 한 마디 없나" 

그나마 또 다른 유해매장지인 옴팍골 등에 대한 유해발굴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증언에 나선 유족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사과와 위로 ▲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합동 위령제 ▲ 추모관 건립 ▲ 호적정정배보상특별법 제정을 통한 배상 ▲ 함평군 내 합동묘 조성을 요구하고 있다.

'함평 불갑산지역 민간인 희생사건'에 대한 증언청취는 빨치산 및 군경가족 및 우익단체 구성원, 유족 등 15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한편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08년 12월 해당사건에 대해 진실 결정문을 통해 '희생자는 국군과 빨치산의 교전과는 무관한 민간인으로 분석됐다'고 밝힌 바 있다.


태그:#불갑산 , #함평 가정마을 , #진실화해위원회, #정부사과, #국군 11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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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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