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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다. 당신이 지난 1년 동안 언제 어떤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했었는지 훤하게 꿰뚫어 본다. 어제 몰래 접속했던 음탕한 사이트도 물론이다. 당신의 전자우편 내용을 훔쳐 읽고, 메신저로 여자친구와 나눈 이야기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당신이 운영하는 블로그나 미니홈피도 예외는 아니다. 오후에 휴대전화로 어머니께 용돈 졸랐던 부끄러운 통화를 그는 다 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어디로 도망치든 그의 눈을 피할 수가 없다. 그는 독수리 눈을 가지고 당신의 일상을 실시간으로 통제하며 감시한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감시당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이는 SF영화나 첩보소설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2008년 10월 30일 한나라당 이한성 의원이 대표발의한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벌어지리라 예상하는 대한민국 상황이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의 주된 내용은 민간 통신사업자가 휴대전화, 전자우편, 메신저 감청 장치를 의무적으로 설치하며 모든 이용자의 통신기록을 1년 이상 보관하도록 한다는 이야기다. 수사기관이 요구하면 통신기록을 제출해야 하며 만약 기록하지 않거나 수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는다.

 

이에 따르면 국정원 등 수사기관이 인터넷 사용내역은 물론 휴대전화 도청을 합법적으로 행하게 되며 '위성위치확인 시스템(GPS)'을 통하여 개인의 위치 정보가 반경 5미터 범위 안까지 추적된다. 그리고 이 모든 사생활 정보들은 수사기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가져갈 수 있다. 수사기관이 당신의 개인정보를 열람했다는 통지는 30일 후에나 온다.

 

지난 21일, 유선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이 4월 임시국회에선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을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마치 영화 속에서나 벌어질 법한 '초현실'이 바로 현실로 '바짝' 다가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국가의 적'

 

박진감 있는 화면으로 유명한 토니 스콧 감독이 연출하고, 블록버스터 전문가 제리 브룩하이머가 제작을 맡은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1998)라는 영화가 있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이 지났는데 아직도 주말이면 텔레비전에서 종종 틀어댈 만큼 대단한 명화다. 그런데 영화와 현실의 상황이 판박이처럼 비슷하다.

 

대한민국에 국가정보원이 있다면 미국에는 국가안보국(NSA)이 있다. 영화에서 국가안보국은 공화당의 필 의원을 호숫가에서 암살하고야 만다. 국가안보국의 감청과 도청을 합법화하는 법안을 의원이 극렬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름지기 음모란 원래 완벽하지 못한 법. 암살 장면을 사진작가 웬에게 몰래 찍히고, 이 녹화 테이프가 로버트 딘이라는 변호사에게 흘러 들어간다. 그때부터 국가안보국은 온갖 정보통신기술을 구사하며 추격하고 딘의 일상은 난장판으로 변한다.

 

평범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국가의 적'으로 찍히고 말았다. 국가안보국은 휴대전화 감청, 위성위치확인 시스템, CCTV를 써서 딘의 일상을 들여다보기 때문에 어디로 도망가든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영문을 모르는 딘은 국가기관 앞에서 발가벗겨진 어린아이와 다름 없다.

 

모르는 사이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러나 영화에 나오는 모든 감시기술이 실제 현존한다는 사실은 더욱 끔찍하다. 영화에서 안보책임자 레이놀즈는 "개인의 사생활은 없어진 지가 오래"라고,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다면 망상일 뿐"이라고 열변을 토한다. 부분적으로 옳은 말이다.

 

정말이지 정보통신기술은 무섭게 발달을 거듭했다. 하지만 기술은 올바르게 쓰일 때 비로소 좋은 것이다. 국가권력을 제멋대로 내버려 둔다면 쉽게 히틀러나 스탈린의 전체주의 국가로 변신할 위험이 있다. 결국에는 국가가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을 완벽하게 감시하는 지옥을 걱정해야 할 테다. 이번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에 대하여 국가인권위원회는 "법률안의 통신제한조치 및 통신사실 확인자료 관련 조항에 대한 수정과 삭제가 필요하다"고 반대의견을 밝혔다.

 

통비법 개정안으로 '정권안보' 꿈꾸나

 

영화에서 레이놀즈는 거물 의원을 살해했다. 영화적 과장이 있지만 현실과 무관하지는 않다. 냉전이 막을 내리면서 국가안보국과 레이놀즈는 자리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거렸다. 영화나 현실이나 감청의 합법화를 지지하는 이들은 국가안보와 민주주의 수호를 이야기한다. 한나라당과 보수단체, 보수언론은 심지어 촛불시위 때도 '좌파세력의 선동'이라 선동하며 안보를 운운한 바 있다.

 

영화 속에서 스스로를 '민주주의의 마지막 희망'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레이놀즈의 모습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광적인 국가안보 타령은 급변하는 시대에서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적'을 만들어야 하는 자폐적 증상으로도 읽힌다. 레이놀즈나 한나라당이나 굳건한 안보신념 속에 인권의 밀도는 극히 낮다.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국가정보원법 개정안'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국정원법 개정안 내용을 살펴보면 국가정보원의 직무범위를 "국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국가정책 수립에 필요한 정보에 관한 업무"라고 모호하게 규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정보원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발판이 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늘어만 간다.

 

지난 7일 발표된 방송통신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작년에 정부가 통신을 감청한 횟수는 9004건인데 이 중에서 약 98.5%에 이르는 8867건이 국가정보원의 몫이었다. 이번 개정안으로 하여금 이명박 정부가 국가정보원에 더욱 힘을 실어줘 정치적 사찰을 행하겠다는 속셈이 아닌지 부쩍 의심이 든다. 세간에는 벌써 옛날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처럼 '국가안보'가 아니라 '정권안보'를 위한 개정안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국민을 '예비 범죄자' 취급하려는 악법

 

물론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는 할리우드 영화답게 정의가 승리하면서 끝이 난다. 하지만 현실은 그다지 호락호락하지 않다. 영화 속에서 로버트 딘은 도청이 무서워 아무하고도 이야기할 수 없다. 공중전화를 써도 위성을 이용하여 금방 행적을 잡아내고야 만다. 현실도 마찬가지다. 어디 누가 무서워서 컴퓨터 쓰겠냐 싶다. 언제 어디서든 감시받고 있을지 모르는데 정부 비판을 하기가 꺼려질 수밖에 없다. 비로소 꽃을 피운 자유로운 토론 문화 또한 칼침을 맞는 격이다.

 

결국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전 국민을 '예비 범죄자' 취급하며 일종의 '자기검열'을 강제하고자 하는 악법이다. 혹여 술김에라도 대통령 욕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잡아가 빨갱이로, 불순분자로, 간첩으로, 국가의 적으로 낙인찍던 전체주의 시대의 악취가 코를 찌른다. 덧붙여 책임과 비용을 민간 통신사업자에게 떠넘겨 추궁을 피하려는 속셈이 빤하게 보이니 여간 뻔뻔하지 않다. '안보'를 위한다는 이 법이 과연 누구를 '안전보장' 하려는지 의심하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 헌법 17조를 보면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하며, 이어서 18조에는 '모든 국민은 통신의 비밀을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헌법은 나라의 근본법이자 최고법이다. 헌법이 보기 좋으라고 걸어놓은 장식이 아니라면 통비법 개정안은 정말이지 불쾌하고 천박한 농담이다. 자고로 농담을 농담으로 끝내지 않으면 뺨 맞는 법이다.


태그:#통신비밀보호법, #국가정보원법, #에너미 오브 스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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