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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도 안녕하시지요?"

"응, 우리 영택이 집 잘 보고 잘 있지."

"영택이가 누구예요?"

"아직 모르나 봐~ 영감탱이."

 

버스 안에서 중년 여성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귀만 열고 있던 나도 '영택이'가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남편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왠지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다 보니, 퇴직한 남편이 밖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고 집 안에서 자기 뒤만 졸졸 따라다녀 불만이라는 친구의 말이 기억났다.

 

며칠 전, 친구들과 만났다. 그런데 여간해선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던 친구 A가 말문을 여는 게 아닌가.

 

"요즘 남편 때문에 미칠 것 같아."

"왜?"

"어디서 전화가 오면, 무슨 말을 하나 내 옆에 바싹 붙어서 엿듣지를 않나, 이웃집 사람이 놀러 오면 같이 앉아서 말참견을 하질 않나. 내가 밖에 볼일이라도 있어서 나가면, 자기도 같이 가면 안 되냐고 그래. 또 '몇 시에 들어오는데?', 뭐 이렇게 물어보는데…. 미치겠어."

 

친구는 정말 많이 속상해하는 것 같았다. 그의 남편은 30여 년 동안 교직생활을 하다 1년6개월 전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아내 뒤만 졸졸졸... 365일 함께하는 건 '고문'

 

언제부터인가 친구들 모임에서 남편들의 퇴직 후 생활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와는 아주 먼일인 줄로만 알았는데, 어느새 우리도 그런 일로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퇴직한 남편들은 사회생활을 할 때와는 반대로 외출도 잘 하지 않고 특별한 취미생활도 즐기지 않는 듯했다. 사실 남편의 퇴직은 아내의 생활 리듬에도 큰 영향을 주는 듯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세 끼 꼬박꼬박 챙겨야 하는 남편의 식사와 작은 일에도 예민하게 구는 것, 외출할 때도 눈치가 보인다는 것 등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았다.

 

친구 B는 남편의 잔소리 때문에 못 살겠단다. 하루는 남편의 옷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 버리려고 분리수거함에 넣어놨더니, 어떻게 알고 그걸 도로 주워왔다고. 그뿐이 아니다. 쓰레기 버리는 것까지 일일이 참견해 몰래 버릴 정도라고 한다. 또 시도 때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반찬거리를 사 와서는 '지금 당장 먹자'고 하기가 일쑤라고.

 

남편이 아직 퇴직 전인 C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벌써부터 걱정이다.

 

"어떻게 해? 나도 얼마 있으면 겪을 일인데… 우리는 2박 3일 휴가 때도 마지막 날에는 꼭 싸움으로 끝나는데, 1년 365일 매일 집에 같이 있다고 생각해봐. 그건 아내와 남편에게 모두 고문이야."

 

퇴직 후 변하는 남편들, 왜 그럴까?

 

사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 남편도 친구들 남편과 비슷하다. 지난 주말, 머리를 손질하기 위해 미용실을 찾았지만 주말이라서 그런지 사람이 제법 많았다. 머리를 손질하고 점심때가 훨씬 지나서 집에 돌아와 보니, 남편이 들어와 있었다.

 

퇴직한 지는 몇 년 됐지만, 일을 잘 찾아서 하는 사람이라 주로밖에 나가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일거리가 정말 없는지 집에 있는 날이 많다.

 

점심때가 지나서 당연히 점심을 먹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물어보니 안 먹었단다. 괜히 짜증이 밀려왔다.

 

"아니 내가 없다고 밥도 안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언제 들어올 줄 알고"라고 했더니 "혼자 먹으려니 밥맛도 안 나고… 당신이 차려줘야 맛있지"라며 얼버무리고 만다.

 

대충 밥을 차렸다. 배가 무지 고팠는지, 두 공기를 뚝딱 비우는 남편. 그러면서 왜 지금까지 안 먹고 있었던 건지.

 

그런데 대부분 남편들은 왜 퇴직 후엔 외출도 안 하고 아내만 졸졸 따라다니는 걸까. 그게 정말 궁금했다. 그래서 남편에게 물어봤다.

 

"남자들은 사회생활을 오랫동안 해서 친구들도 많고 모임도 많고 그럴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봐?"

"친구들은 많지. 그런데 그게 그래. 남자들은 경쟁사회에서 살다 보니깐 속마음을 열어 보일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게 문제지. 생각해 봐. 눈만 뜨면 이젠 내가 잘릴까, 내일은 또 내일은…. 그러니 누구한테 속을 열어 보일 수가 있겠어?"

 

이해가 됐다. 친구 남편 중에는 골프와 기타를 무척 즐기는 사람이 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시간에 쫓기고, 업무에 쫓기느라 마음 놓고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하여 퇴직 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많아서 더 열심히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했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다. 퇴직을 하고 나니, 모든 일에 의욕이 생기지 않더라는 것. 또 당장 수입원이 없어지니 불안하다고 했다.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측은지심이 생겼다. 남자들도 알고 보면 여리고, 즐기고 싶고, 누리고 싶은 마음이 여자들과 다를 바 없을 텐데 말이다.

 

남편과 함께 뭔가를 해보려고 작정했더니...

 

오랜만에 대청소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남편에게 나가 있으라고 하고 나 혼자 했을 것이다. 그때 닭살커플로 소문이 자자한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2~3년 전 퇴직한 그의 남편은 평소에도 그 친구에게 '앞을 봐도 예쁘고, 옆으로 봐도 뒤로 봐도 예쁘다'고 노래를 부를 정도였다.

 

그런데 남편이 퇴직한 후에는 거의 매일 티격태격했단다. 남편은 평소 등산을 좋아했는데, 퇴직 후엔 산에도 가지 않고 집에만 있으려고 했다는 것. 남편의 그런 모습에 친구는 '계속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먼저 산에 가자고 하고 따라나섰단다. 친구의 방법이 효과가 있었는지, 함께 산에 다녀온 친구 남편의 얼굴은 한결 환해졌다고. 그 후 친구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남편과 함께 산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그 두 사람 사이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둘이서 뭔가를 해보려고 했던 친구의 시도가 생각나, 나도 남편과 함께 청소를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남편에게 청소기를 돌리라고 하고 난 걸레질을 했다. 남편은 청소기 사용법도 몰라 카펫을 청소할 때는 거실청소 버튼을 눌러놓고 거실을 청소할 때는 카펫버튼을 눌러 놓았다. 일일이 가르쳐주는 번거로움이 있기는 했지만, 꾹 참고 목소리를 한 옥타브 낮춰서 자세히 가르쳐줬다.

 

그런데 이상했다. 청소기를 돌리는 남편 표정이 사뭇 밝아 보였다. '내가 남편에 대해 몰랐던 점이 아직도 있었나?'란 생각이 들었다. 청소가 끝나고 말끔해진 집안을 보니 나도 기분이 덩달아 좋았다. 그래서 제안했다.

 

"오늘 청소하느라고 수고했는데, 내가 치킨에 맥주 쏠게, 어때?"

"좋지~~."

 

앞만 보고 달려온 가장, 이젠 천천히 가요

 

치킨에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남편에게 "당신, 낚시 좋아하니까 낚시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낚시도 하러 다녀, 그리고 내가 없어도 때가 되면 잘 챙겨 먹어요, 이렇게 하루 이틀 살 것도 아닌데"라고 하니 남편은 알았다고 대답한다.

 

퇴직 후 남편이 알게 모르게 작아졌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남편이 그동안 수고 많이 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 직장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한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월급 타다 주면 고맙다는 말 대신 "요것 가지고  어떻게 한 달을 살아?" 하는 투정만 하기가 일쑤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정말 많이 고마워했다.  

 

부부는 한곳을 보고 함께 걸어가는 인생의 동반자다. 퇴직했다고 인생이 끝난 것도 아니고, 앞으로 함께 걸어가야 할 삶의 날들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흐린 날이나, 맑게 갠 날,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에도 남편은 가장의 자리를 지키느라 애썼다. 행여 우리 자식들이, 내 아내가 다른 집보다 뒤질세라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을 것이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한 박자 여유 있게, 천천히 가자고 하고 싶다.

 

비록 퇴직은 했지만 너무 속상해하지도 말고, 너무 작아지지도 말기를. 그리고 정말 중요한 또 한 가지, 웅크리고 집에만 있지 말고 때로는 혼자 여행도 다니고, 때로는 나와 함께 잘 어울리면서 더 큰 남편으로 자리매김하기를 희망해 본다.


태그:#퇴직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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