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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가 지난달 16일 진보신당-경향신문 주최 토론회에서 '촛불집회와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글의 전문이다. 촛불시위에 '직접행동 민주주의'니 하는 상찬이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나온 그의 글은 최장집 교수의 견해와 함께 논쟁적인 화두를 던지고 있다. 하지만 그가 <오마이뉴스>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해 그의 동의를 얻어 토론회 발제문 전문을 싣는다.

다만 박상훈 대표는 <오마이뉴스>에 보낸 이메일을 통해 "촛불집회에 대한 많은 해석들을 보면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이 필요없는 것처럼 치부되기도 한다"며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정치체제를 바꾸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 달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독점의 정치체제를 그대로 둔 채 그 밖에서 운동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적어도 내가 보기엔 낭만적"이라며 "나나 최장집 선생님이나 늘 생각하는 건 어떻게 노동있는 민주주의,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편집자말]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48시간 릴레이 농성이 벌어진 지난 21일 오후 다음 '아고라' 네티즌과 시민들이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세종로네거리와 서울시청을 오가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한미 쇠고기 재협상을 촉구하는 48시간 릴레이 농성이 벌어진 지난 21일 오후 다음 '아고라' 네티즌과 시민들이 대형태극기를 앞세우고 세종로네거리와 서울시청을 오가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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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촛불집회에 대한 여러 해석들을 보다보면, 촛불집회를 누가 더 높게 평가할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듯하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실의 여러 측면이 획일화되고, 과장되고, 나아가서는 신화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되는 경향이 너무 커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한다.

'위대한 시민'과 '대중의 놀라운 창발성' 등을 거론하는 사람 중에는 지난 대선과 총선을 이야기할 때 대중의 보수화와 욕망의 정치에 포획된 대중을 말하고 보수정권 10년 집권론을 이야기한 사람도 있다. 황우석 사태 때에는 과학 이데올로기에 동원된 대중을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했고, 5.18 때가 되면 '위대한 광주시민'을 이야기하다 선거 때만 되면 '지역감정에 노예가 된 유권자'를 질타했던 사람도 있다. 시민 대중, 유권자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따라서 분석의 독립적인 단위로서 단순화되면 상황 논리에 종속되기 쉽다.

과장된 해석과 신화... 사태를 신비화할 수 있어

촛불집회의 새로움을 이야기하고 새로운 시민운동, 새로운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과장도 심하다. 여러 시위 아이디어들은 다양한 형태의 사회운동 속에서 발전해왔고, 이번 시위도 크게 보면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시위의 새로움을 과장하는 해석이 그간 사회운동의 다양한 시도와 발전에 대해 접촉의 기회를 갖지 못한 중산층 엘리트 지식인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새로움의 발견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흥분은 이를 통해 사태를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싶은 비판언론들의 이기적 욕구로부터도 비롯된 바 크다. 그러다보니 실제 현실과 신화화된 해석 사이에 격차는 두드러져 보인다.

이번 촛불집회를 아날로그 정치 대 디지털 정치, 근대적 정치 대 탈근대적 정치, 전통적 정당정치 대 참여적 생활정치 등 과격한 이원론으로 재단하는 것은 그 백미라 할 수 있다. 사태의 구조가 부정적이고 낡은 것으로 묘사된 개념들로 환원되는 것도 문제지만, 현실의 대안을 디지털 정치, 탈근대적 정치, 참여적 생활정치 등 개념으로 치환된 어떤 추상적인 세계로 인도하는 것은 해석에 있어서 과도한 자의성의 결과이자 사태를 신비화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촛불집회의 위대함만 이야기할 경우 우리가 개선해야 할 여러 과제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억압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촛불집회가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열망이 너무 강렬한 나머지, 조중동의 시각에서 공격의 빌미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억압자의 시선과 검열 권력이 전도된 형태로 재생산되기도 했다.

비폭력과 평화가 이데올로기가 되어 보다 적극적인 대응을 주장했던 사람과 단체에 대해 과도한 비난과 공격이 허용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런 의제들이 합리적으로 제기될 수 없었던 것에는 그것이 자칫 촛불집회의 위대함과 순수성을 위협할 수 있다는 또 다른 형태의 획일주의가 억압의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석자들의 과도함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그밖에도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많지만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무책임하게 강요되는 현상이다. 대의민주주의 때문으로 사태의 원인을 환원하는 해석, 제도정치 내지 정당정치에 대한 부정 내지 반정치주의적 경향들, '새로운 민주주의'나 '직접 민주주의' 등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정치관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주의를 벗어나는 주장 혹은 반민주적 논리가 당연한 듯 강요되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국회 본회의장
 국회 본회의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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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민주주의가 대안이라고?

촛불집회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거부로 해석하거나, 대의민주주의를 나쁜 민주주의의 유형으로 이해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직접민주주의를 내세우는 해석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들을 실망시키겠지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다.

과거 그리스 아테네민주주의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의 사례를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최대 3만 명 정도의 시민으로 이루어진 도시국가의 민주주의 모델을 이상으로 보거나 대안으로 실현하려는 것은 그야말로 복고적이다. 그렇기도 하거니와, 이들의 민주주의가 직접민주주의로 상식화되어 있는 것은 권위주의 시기부터 초중고 교과서에서 당연한 듯 강요된 잘못된 유형화 때문이기도 하다.

아테네 민주주의 역시 추첨의 방법으로 대표를 뽑았고, 확률적으로 말한다면 4명 가운데 한 명의 시민만이 살면서 24시간 동안 통치자가 될 수 있었다. 아테네 민주주의의 전성기를 이끈 페리클레스는 당시에는 귀족정의 제도로 정의된 선거의 방법으로 20년 이상 연속으로 선출되었다.

귀족과 명사들의 의회정을 유보없이 비판한 레닌이 구상한 사회주의 정치체제 역시 대의민주주의였고, 실제 실현된 소비에트라는 대의제 역시 홉스봄이 강조하듯 발칸 문제에서 민족과 인종, 언어, 종교적 대표성을 해결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구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한 유형으로서 직접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현실의 민주주의는 모두 대표를 뽑고 그에 책임을 묻는 대의민주주의로 이루어진다.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신화화된 비판에는 "사악한 정치가(내지 파당적 이익에 골몰하는 정당) 대 선량한 시민"의 가정이 숨어 있다. 시민이 직접 스스로의 문제를 다룰 수 있으면 대의민주주의에서 대표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학의 출발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듯)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는 데 있지,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든다는 데 있지 않다. 과거나 지금이나 좋은 통치자를 뽑는 것이 실제 정치의 중심 문제이지 시민이 직접 정치의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시민의 위대성을 수백만 번 말해도 현실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사회의 다양한 요구를 제대로 대표하는 방향으로 변화되지 않는 한 지금과 같이 하층배제적이고 상층편향적인 민주주의는 개선되기 어렵다. 촛불집회에 나타난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에너지로 확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정치는 권력의 문제를 핵심으로 하면서 억압과 통제, 갈등과 음모, 전략과 이해관계, 리더십과 타락 등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사회를 이루면서 불가피하게 불러들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권력이 선용될 수 있는 정치의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가는 노력이 핵심이지 현실 정치의 부정적인 측면을 알리바이로 반정치주의를 부추키고 동원할 일이 아니다.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의 다른 얼굴

촛불집회는 민주화이후 한국정치가 갖게 된 특정의 패턴 내지 악순환의 구조를 해체하는 일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에서 민주화가 운동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그 운동의 에너지가 민주화 이후 체제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민주화 이후 체제의 형성은 구체제에 기원을 둔 보수적 정치세력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보수독점적 정당체제가 등장했고, 이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괴리는 계속되었다. 간혹 정권교체의 과정에서 야당과 운동의 에너지가 접합되기도 했지만 곧바로 실망의 사이클로 이어졌다.

이것이 한국사회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을 만들어낸 원천이다. 1990년과 91년의 5월 정국, 97년의 총파업, 2000년의 총선시민연대, 2002년의 촛불정국, 2004년의 탄핵정국은 대표적인 예이다. 이들 대규모 운동의 개입기를 제외하면 나머지 정치의 세계는 계속해서 보수적 독점체제의 지속으로 나타났다.

이에 대한 불만은 강렬했고, 선거 때마다 정치엘리트 교체율은 세계에서 가장 높았고, 선거 때마다 새로운 정당이 등장하고 소멸하는 것을 반복했지만 구조와 제도로서 정치의 보수성은 변화되지 않았다. 재벌에 대한 비판이 거세고, 재벌 총수가 개인적으로 수난을 겪고 개별 기업이 사라지기도 했지만 재벌중심 경제구조는 더욱 강고해진 과정과 유사했다.

민주화 이후 한국정치가 갖는 이러한 패턴 때문에 한편으로 보수독점의 체제는 그대로 있는 가운데 다른 한편 운동의 분출과 대규모 항의의 표출이 주기적으로 반복해 왔다. 그러다 보니 광범한 대중적 참여와 운동의 시기에는 어떤 변화라도 가능할 것 같은 집합적 열망의 분출이 일순간 국면을 휩쓸다가도, 어느 순간 상황은 종결되고 탈동원화와 일상화의 주기로 돌아가 버리거나, 반대로 어떤 변화도 불가능할 것 같은 교착국면이 지속되다가도 갑작스럽게 상황이 급변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났다.

이러한 순환구조에서 우연히 동원과 열망의 주기를 목격하게 되면 한국정치는 '변화와 역동성'의 상징처럼 인식된다. 하지만 탈동원화와 실망의 주기로 돌아선 상황을 경험하게 되면 한국정치는 '정체와 퇴행'을 특징으로 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말하려는 요점은, 한국정치에서 주기적 운동의 분출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의 다른 얼굴이라는 사실하다.

현재와 같은 정당체제를 그대로 둔 채 반정치적 열정과 도덕적 호소로 운동의 지속만을 강조하고 생활정치와 새로운 민주주의론을 개념적으로 불러들인다 해도 그간의 악순환의 구조가 그대로 건재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숭례문을 지나 명동 앞을 행진하고 있다.
 신부와 수녀, 일반 시민들이 30일 저녁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최로 열린 비상 시국미사를 마친뒤 숭례문을 지나 명동 앞을 행진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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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는 항의의 조직화를 응집시키는 양식

민주주의 하에서 운동을 통해 정치체제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접근은 위험하다는 사실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강조했듯, 민주주의는 혁명의 가장 강력한 안티테제다. 실망스럽겠지만, 민주주의는 큰 변화를 잘 허용하지 않으며, 그 자체로 매우 강고한 제도적 정당화의 원리를 갖는다.

정당성을 갖지 못한 채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권위주의에서 정권퇴진 운동이 갖는 정당성과는 달리, 민주주의 체제에서 운동을 통해 민주적 선거의 결과로 선출된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경우 이에 대한 반작용은 매우 클 수 있다. 운동은 자발적 항의의 표출이고 그 자체 민주주의를 활력 있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정치체제의 운명을 결정지을 수 있는 국민적 위임의 절차적 정당성을 갖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의견의 조직화와 항의의 표출을 통해 정부의 일방적 통치행위를 제어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대안적 정치세력의 성장을 통해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변화시키는 효과로 이어지게 하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촛불집회의 민주적 효과는 거리에서 얼마가 모이고 안 모이고에 따라 그 크기가 결정되고 또 촛불집회가 종결되었다고 해서 그 효과가 끝났다고 보는 이해의 방법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커다란 사회현상이 주는 충격과 결과는 현상이 종결된 이후에도 지속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실현된다.

촛불집회는 한국 정치에서 항의의 조직화를 응집시키는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본다. 달리말해 향후 누가 의식적으로 동원하지 않아도 매우 작은 조직화의 비용으로 재현될 수 있는 집합행동의 한국 모델로 자리 잡았다고 생각한다. 그밖에도 유, 무형의 형태로 다양한 문화적 효과를 갖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를 바꾸고 노동, 인권, 생태, 사회적 소수자 등 다양한 사회 운동의 하부기반을 튼튼히 할 수 있도록 실천하는 과제가 남겨졌다.

운동이 정치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는 왜 나라마다 다른가? 그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고,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으며,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

반대로, 노동운동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하다. 사회의 중요한 집단이익이 배제됨 없이 폭넓게 대표되는 조건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다 넓은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통합하는 결정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신자유주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일 뿐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더 절실한 문제이다. 노동이 생산체제, 시민사회, 정당체계 등의 차원에서 충분한 시민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강력하게 조직화되지 않는 한, 현실의 민주주의는 금융자유화의 진전 과정에 개별적으로 포섭된 중산층 중심의 내용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반면 노동은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거나 아니면 노동귀족으로 공격받기 십상이다.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운동이냐 정당이냐"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문제를 토론하고자 하는데, 이는 잘못된 질문이고 잘못된 기준이다. 정당은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중심적이고 또 필수적 요소이다. 따라서 어떤 정당, 어떤 정당체제를 만들 것이냐의 문제는 민주주의의 핵심 문제이다.

그러나 운동은 민주주의 체제 여부를 정의할 수 있는 요소가 아니며, 운동이 민주주의와 접맥되는 차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운동이 강조된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에서 정당과 정당체제가 나쁘다는 것을 말해주는 지표는 되겠지만, 운동으로 정치체제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운동이라는 개념을 도덕화하고 민주주의의 문제를 이러저러한 운동론으로 대체하는 것만으로는 현실의 보수독점적이고 노동배제적인 정당체제를 변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기 어렵다. 건강을 위해서는 세끼 식사만으로는 부족하고 적절한 운동과 휴식 및 기타 건강보조제의 도움이 필요하겠지만, 그러나 일단 식사를 제대로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지 운동과 휴식, 건강보조제로 식사를 대신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촛불집회가 보수독점 강화로 이어질 수도 있어 

숙의 민주주의 혹은 심의 민주주의니 하는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에도 찬성하기 어렵다. 그것은 ① 이성적 시민이 ② 완전 정보 상황 하에서 ③ 숙의나 심의에 참여하게 되면 해당 정치공동체가 합의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이끌 수 있다는 가정을 갖는다. 따라서 이런 민주주의관이 정치체제의 원리가 되면 (미국의 정치학자 쉐보르스키가 지적했듯) 귀족주의적이고 엘리트주의적인 정치관으로 이어진다.

서민과 노동자들에게 시민으로서 모든 정보를 취득하고 이성적으로 논증하고 심의에 참여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평범한 보통의 민중을 포괄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그렇게 평화롭고 합리적이고 평등하고 갈등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현실의 정치공동체는 갈등도 있고 편견도 있고, 이익에 대한 집착도 있고 과도한 열정도 있다. 이러한 실제의 정치적 삶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만이 현실적일 수 있고 강할 수 있다. 심의민주주의니 숙의민주주의 하는 것은 개별 단체나 개별 정당조직 내에서 확대할 수 있는 보완적 원리일 수는 있어도 정치체제를 그렇게 조직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도 촛불집회에 대해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다. 다만 의견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그간의 해석자들의 해석 역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촛불집회의 위대함을 강조하고 촛불집회를 절대화하는 것 역시 하나의 해석이고 의견으로 접근해야지 이를 도덕화하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러나 정당과 정치인은 다르다. 그들은 우리에게 표를 요구했고, 책임 있는 대표가 되겠다고 했다. 일정한 표는 곧 국회의원의 수와 예산 지원이 뒤따르고 이는 정당법 등에 의해 뒷받침된다. 지금의 사태가 어디로 귀착될지 모르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정치적으로 해결할 방도를 찾기 어렵게 된 것은 제대로 된 야당 하나, 책임감 있는 정치지도자 한 명이 없기 때문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 오마이뉴스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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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석의 많고 적음은 이유가 안 된다. 국회의원이고 아니고도 문제가 아니다. 사태의 핵심을 힘 있게 규정하고 과감한 해결책을 제시하며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가능의 공간'을 열지 못한 채 수동적으로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문제다. 현실의 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대안의 제출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시민의 권리다.

불행하게도 진보정당은 그간 촛불집회 과정에서 정당으로서의 권위나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니 시위 참여자들이 대안이 될 정치적 권위체에 대한 요구를 크게 갖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하다.

현재와 같은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 한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민주적 효과는 역설적이게도 한국 정치의 악순환 구조를 강화시키는 보수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지금과 같은 보수독점적 정당체제, 진보정당 없는 정당체제, 노동배제적 정당체제를 지속하는 일이 될 것이다. 진보정당과 정치지도자들의 분발을 촉구한다.


태그:#박상훈, #최장집 , #촛불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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