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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탕수수, 옥수수 그리고 콩. 바이오에탄올이 세계적 화두다. 국제유가 배럴당 86달러 시대, 석유고갈과 지구온난화 방지를 위한 대체에너지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 최대 에탄올 생산국가인 브라질과 미국은 물론 일본, 중국 등 이미 세계의 많은 국가들이 에탄올정책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 석유품질관리원도 내년 8월 바이오에탄올 도입을 위한 연구를 마감한다. 상용화를 염두에 둔 조치다. 그러나 곡물에탄올은 빈곤심화, 노예노동 등 또 다른 차원의 환경·인권문제를 낳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세계적 논쟁이 된 바이오에탄올의 명암을 살펴보기 위해 브라질·미국·멕시코 3개국을 현지 취재했다. '곡물에탄올 전쟁, 바이오연료의 명암' 10부작 시리즈 아홉번째로, 멕시코 농부들의 입장을 알아본다. <편집자주>

지난 9월 15일 오후 멕시코 북부 로스 모치스 인근 구아사베 마을 농부들이 농민회(우노르카) 총무 집으로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노을을 안주 삼아 '석양주' 한 잔 걸칠 생각에, 막걸리 한 주전자와 김치 한 보시기를 싸들고 마을 어귀 미루나무 아래로 모여드는 한국의 시골 노인들과 똑같았다.

 

멀리 아시아에서 멕시코 시골마을까지 찾아온 이국의 기자들을 위해 마땅히 내놓을 게 없다던 그들은 종이컵에 콜라를 따라 한 잔씩 돌렸다. 후텁지근한 날씨에 미지근한 콜라 한잔. 선풍기마저 정전으로 꺼지고…. 등에선 땀줄기가 쉼 없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로사리오 로하스 케베도(58)였다. 그는 "올해 9헥타르의 옥수수 농사를 지어 6만 페소(501만원)를 벌었다"며 "옥수수 값이 1톤당 2300페소로 올라서 돈을 많이 번 셈"이라고 자랑했다. 정부에게 제대로 된 옥수수 값을 보장하라고 투쟁한 결과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옥수수 값만 높게 쳐준다면야"

 

로사리오는 옥수수 값이 별안간 좋아진 이유가 미국의 바이오에탄올정책 탓이라는 데 자못 놀라는 눈치였다. 먹는 옥수수로 자동차 연료를 만든다는 건 농부로서 용납하기 어려운 대목이기도 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솔직히 옥수수 값이 특별히 호가를 누릴 이유가 없었는데 아마도 그 영향으로 덕을 보게 된 것 같다"며 조용히 웃었다.

 

로사리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통을 이어받은 알란 케베도 카스트로(56). 그는 "대부분의 멕시코 농부들은 옥수수를 생산하기 때문에 무조건 옥수수 값을 높게 쳐준다면 바이오에탄올정책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돈이 우선이라는 논리였다.

 

환경단체는 로스 모치스에 멕시코 유일의 바이오에탄올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반대할지 모르겠으나, 농민들로서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옥수수 수확량을 더 늘려서 돈을 더 많이 벌고 싶다는 욕구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호세 루이스(56)는 전혀 다른 반대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멕시코 최대의 농민조직 우노르카의 회원이자 구아사베 지부 총무를 맡고 있다. 호세는 절대로 옥수수를 연료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멕시코 국민들의 식량을 책임지는 농부가 바이오에탄올정책에 찬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호세의 말이다.

 

"멕시코에서 1년에 생산되는 옥수수 양이 2400만 톤이다. 생산량에 비해 늘 소비량이 부족해 매년 수입한다. 멕시코는 식량 자급자족이 안 되는 나라다. 그런데 여기에다 또 연료용 옥수수까지 만든다면 불균형이 심각해질 것이다. 올해 1월 우리는 또르띠야 시위를 벌였다. 갑자기 옥수수 값이 올라서 모든 식료품 값이 폭등했다.

 

미국의 바이오에탄올정책 때문에 우리가 곡물 가격 파동을 겪어야 하는 게 옳은 일인가. 우리는 먹을 옥수수가 비싸져서 시위를 벌이는데, 미국에서는 그걸로 좀 더 싼 자동차 연료를 생산한다는데 이걸 그냥 받아들어야 하나. 우리가 먹는 옥수수로 자동차 휘발유를 한다는 건 어쨌든 찜찜하다.

 

특히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이후 모든 영역에서 남미의 주도권을 잃는 상황에서 바이오에탄올정책까지 쓴다면 그것은 멕시코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생존권마저 박탈하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해마다 옥수수 값이 좋을 것이라는 '환상'

 

1934년 멕시코 까르데나스 정부가 대지주들의 토지를 수용해 농민조합인 에히도에 무상으로 토지를 분배한 뒤 공동 경작하게 하면서 땅의 매매와 임대는 금지됐다.

 

그러나 1988년 살리나스 정권이 들어서면서 신자유주의경제체제가 본격화 됐고 토지매매도 자유로워졌다. 호세는 자유로운 토지매매 이후 농민들이 '농사짓는 일 이외의 것에 관심을 두게 됐다'고 우려했다. 농부들이 좋은 곡식을 많이 수확할 생각 대신 땅을 임대해서 돈만 벌 궁리를 하고 있으니 분명 본말이 전도된 상황이라고 걱정하기도 했다.

 

호세는 "바이오에탄올정책이야말로 멕시코의 1000만 농부를 없애려는 정책"이라며 "바이오에탄올정책은 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결코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려는 정책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바이오에탄올정책으로 1년 안에 농부들이 2배 이상의 이익을 거두게 된다면 콩을 짓던 사람도, 토마토를 짓던 사람도 모두 옥수수로 작목변경을 하게 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다른 작물도 덩달아 값이 뛰고 돈이 없는 사람들은 기초 식량마저 먹지 못하게 되는 심각한 식량위기를 낳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장기적으로 바이오에탄올정책이 멕시코 인들에게 이익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전망도 내놓았다.

 

엑토르 아르멘타 보호르케스(55)도 호세와 입장이 같았다. 그는 지난 8월 멕시코시티에서 열린 '바이오에탄올정책 국제회의'에 다녀온 경험을 전달하면서 "멕시코의 식탁인 시날로아주 농민들에게 옥수수 농사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게 바로 바이오에탄올정책"이라며 "미국처럼 정부 보조금이 없는 상태에서 기업 측 말만 듣고 옥수수농사를 짓다가는 낭패를 겪게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그는 "비료와 투자비, 농기구 등 전체를 고려한다면 결코 산업용 옥수수 값을 잘 쳐서 받는 게 아니"라며 "멕시코뿐만 아니라 세계의 농민들이 잘 알고 대응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알란이 한마디 더 거들었다. 그는 "올해 옥수수 가격이 좋았다고 해마다 옥수수 가격이 좋을 리는 없다"며 "매년 옥수수 가격이 올해처럼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농부가 화장한다고 배우 되나"

 

그러나 이날 만난 9명의 멕시코 농부들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면 옥수수로 작목 변경을 하겠냐'는 질문에 7명이 '바꿀 의향이 있다'고 말했다.

 

라몬 께베도 카스트로는 "올해 옥수수 값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비료나 종자 값이 같이 올라 다 따지고 나면 작년 상황과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라며 "10헥타르의 땅 가운데 80%는 임대를 주고, 나머지 20% 정도만 농사를 짓고 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지금으로서 장담하기 어렵다"고 전했다.

 

라몬의 말끝에 호세는 "정부는 항상 좋은 말만 한다"며 "그릇된 정책결정으로 피해를 볼 것은 국민이니까 정말 무책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멕시코정부가 바이오에탄올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농부들을 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호세는 "정부는 예쁘게 화장한 얼굴을 보여주면서 농부들도 화장하면 예뻐질 수 있다고 현혹하고 있다"며 "그러나 우리는 농부들이 아무리 진하게 화장을 해도 영화배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호세의 비판적 입장에도 이날 모인 농부들은 '바이오에탄올공장 건립'에 환영한다는 뜻을 피력했다. 안정된 판매처가 확보되고 가격보장이 될 수 있다면 현실적으로 반대하기 어려운 게 아니냐는 것이다.

 

네스토르 오르테가 발렌수엘라(66)는 "멕시코 농부들이 거대한 정부정책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있느냐"며 "현실적 이익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농부가 농사 대신 임대업?

 

힘겹게 농사지어 버는 돈보다 마피아에게 돈세탁 용으로 땅을 렌트해주고 임대료를 받는 것이 훨씬 더 생산적이라고 판단하고 있는 멕시코 북부 농부들. 이날 모인 9명은 자신이 가진 땅을 모두 농토로 쓰지 않았다. 모두 임대업을 하고 있었다.

 

마피아에 땅을 임대해주고 트렉터를 운전해 하루 200페소를 버는 라몬 께베도 카스트로, 농수로를 청소하고 하루 100페소를 버는 네스토르 오르테가 발렌수엘라, 야채와 열대과일, 빵 등 노점상으로 하루 200페소를 벌고 있는 보디오 멜렌드레 쿠스르.

 

기계 관리로 1주일에 1000페소를 벌고 있는 페리스 루케 아라우호(60), 집수리로 1주일에 1200~1300페소를 버는 플로렌시오 로페스 로페스(62), 자신이 임대해준 땅에서 일당을 받으며 일해야 생활할 수 있다고 한 로사리오 로하스 케베도(58).

 

까르데나스 정권 시절 척박하지만 비교적 넓은 땅을 불하받은 멕시코 북부의 농부들은 기업농 형식으로 농사짓기 어려워 대부분 농업을 포기했다. 기업에 땅을 빌려주고 임대료를 받거나 자급자족용으로 땅을 일구는 정도였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날씨가 많이 무더워지고 비가 적어진 것도 농사를 포기하게 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엑토르는 "화학비료를 많이 써서 당뇨나 암이 증가해 젊은이들의 사망률이 높아졌지만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는 도저히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경"이라며 "지구온난화를 가속화시키고 땅의 황폐화를 부르는 것은 다국적기업의 유전자조작(GMO) 씨앗 판매와 화학비료, 농약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농업이 포기된 농촌의 농부들. 호세는 NAFTA 이후 땅을 포기하는 농민이 더 많아졌다고 말했다. 규모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농업이 포기되는 현실은 한국과 같았다. 어쩌면 그들은 바이오에탄올 붐을 타고 옥수수 농업이 다시 설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있는지 모른다. 이 상황을 역설이 아니고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태그:#멕시코 바이오에탄올, #멕시코 최대 농민조직 우노르카, #NAFTA, #몬산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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