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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4인용 식탁>에서 기면병에 빠진 주인공 전지현.
ⓒ 싸이더스(Sidus)
"교차로에서 신호가 파란 불로 바뀌었는데 몸에 힘이 탁 풀리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겁니다. 정신은 멀쩡했죠. 이젠 약을 먹어도 장시간 운전할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합니다. 운전 중 힘이 풀리면 큰일이 나니까요."

이 내용은 기면병 환우회 모임(http://cafe.naver.com/narco) 운영진 중 한 사람인 이한(28)씨가 '기면병'을 진단받기 전에 겪은 사건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도무지 밤에 잠을 청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불면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전국에 적게는 6%에서 최고 17%까지 보고됩니다. 하지만 오히려 참을 수 없는 졸음 때문에 참기 힘든 어려움을 호소하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아무리 졸음을 참으려 애써도 결국 쓰러지고야 마는 이러한 질환은 '기면병(Narcolepsy)'이라는 희귀 질환입니다.

비록 희귀질환이긴 하지만 대중적으로는 비교적 잘 알려진 희귀질환이기도 합니다. 영화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가 기면병 환자였고, 전지현과 박신양 주연의 공포물 <4인용 식탁>에서 전지현 또한 기면병 환자였습니다. 또 네티즌들에게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만화 강풀의 <타이밍>에서 한 주인공이 기면증에 걸린 역할로 나와 인구에 회자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지난 3일 그룹 '태사자'의 멤버였던 탤런트 박준석(28)씨가 서울지방병무청으로부터 기면병으로 '공익' 최종 판정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며 이 질환에 대한 관심도 함께 커지고 있습니다.

▲ 영화 <아이다호>에서 주인공 리버 피닉스가 기면병에 빠져 잠들어 있다.
ⓒ New Line Cinema
2005년 한국수면학회 보고서에 따르면, 기면병 환자는 국가별로 적게는 0.02%(이스라엘)에서 많게는 0.18%(일본)까지 보고되고 있고, 국내에서는 전체 인구의 0.05% 정도인 약 2~3만 명 정도가 기면병을 겪고 있다고 추산됩니다.

더욱 정확한 보고로는 지난 2006년 분당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의 윤인영 교수팀이 경기지역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정밀검사를 거쳐 조사한 결과, 0.04%의 청소년이 기면병으로 진단되었다고 보고한 바 있습니다.

기면병은 주로 청소년기에서 초기 성인기에 많이 발생하며 나이가 들면서 점차 감소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기면병의 경우 각성 작용에 관계되는 '히포크레틴(Hypocretin)'이란 물질의 분비가 저하되거나 이 물질을 분비하는 시상하부 자체의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즉 습관 탓이 아니라 일종의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또 유전성이 강하게 나타나 기면병 직계가족은 일반인보다 40배에 가까운 유병률을 보이고 있습니다.

과도한 주간 졸림·탈력발작·수면마비가 특징적 증상

기면병의 증상은 비교적 특징적으로 나타납니다. 다음에서 소개한 사례는 '기면병 환우회 모임(http://cafe.naver.com/narco)' 회원들이 밝힌 증상입니다.

"훈련중 기타 장비를 내리면서 잤습니다. 제가 그 잠깐 잠든 사이에 BL탄(연습용포탄·30㎏ 정도)을 제 고참 머리 위로 떨어뜨렸습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고참이 피해서 제 고참 다리만 부러졌습니다. 정말로 죄스럽더군요." (ID masic00)

"사병식당에서는 유명인이었습니다. '자면서 밥 먹기', 밥 먹다 졸았던 적이 수백 번은 된 듯하네요. 대장님의 개인면담과 훈시 때에도 졸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군악대였는데 행사 중에도 졸기 일쑤였죠. 고참이 예기하는 도중에도, 작업 중에 삽질하다가 졸아도 봤고요." (ID bondkiller82)


기면병에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증상이 '과도한 주간 졸림' 현상입니다. 잠이 올 경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아무 장소, 아무 상황에서나 잠을 자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사춘기에 이런 증상이 많이 발생하여 수업시간에 잠을 자게 되고, 이로 인해 성적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친구들 사이에서도 놀림을 받으며 자신감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몸이 나른해지고 눈이 감기면서 온 몸에 힘이 다 빠져 쓰러지며 얼굴이 베개를 눌렀다. 그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안 나오고 아무리 힘쓰려 해도 안 되었다. 숨도 못 쉬고 이대로 정말 어이없게 죽나 하고 생각할 때 다시 풀려 살아났다." (ID chldud80)

"목욕탕에서 탈력발작 일어나서 정말 접싯물에 코 박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ID kiss7596)


위와 같이 흥분을 하거나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하는 갑작스런 감정 변화가 동반될 경우 나타나는 증상이 '탈력발작'입니다. 즉 강한 감정적 자극이 있을 때 갑자기 몸에서 힘이 빠지며 연체동물과 같이 몸이 풀어지면서 쓰러지는 등의 증상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특히 탈력발작 시 사고가 많이 나타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기계를 다루거나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몸에 힘이 풀리면 대형 사고로까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 경우 간질과는 달리 환자는 의식이 있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목소리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가위눌리는 건 예사예요. 제 몸이 둥둥 뜨는 걸 느낄 때도 있어요." (ID chj333333333)

이렇게 가위가 눌리는 수면마비 증상도 나타납니다. 환자들은 밤잠을 깊이 못 자고 설치는 현상을 많이 겪게 되며 이로 인해 낮에 과도한 주간 졸림 현상이 반복되는 악순환을 겪게 됩니다.

한편 잠이 들 때 환각 증상(입면시 환각)을 경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런 증상을 자주 겪어야 하는 환자들은 일상에서 삶의 질이 상당히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 기면병 환자는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오해를 받아 직장을 그만두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 네이버 카페
신속한 진단과 치료가 중요해

대한수면연구회 부회장이자 삼성서울병원 신경과에서 수면장애클리닉을 운영 중인 홍승봉 교수는 "저녁에 7시간 이상 충분한 수면을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낮 시간에 비정상적으로 졸린다면 의심해볼 수 있는데 가장 큰 원인 중 하나가 기면증"이라며 "졸린 증상 이외에도 탈력 발작이 동반된다면 반드시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기면병은 병력청취 및 수면다원검사 등을 통하여서 진단할 수가 있습니다. 이중 특히 수면다원검사가 가장 객관성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수면다원검사에는 야간수면다원검사 및 주간수면다원검사(다중입면기검사)를 시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검사를 통할 경우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면증의 증상은 자주 우울증이나 간질 또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오인되기도 하므로 신중한 관찰이 필요합니다.

치료법으로는 암페타민(amphetamine)이나 메틸페니데이트(methylphenidate) 등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약물들은 중독성이 있고, 작용시간도 3~4시간 정도만 지속하므로 하루에 수차례 복용을 해야 합니다.

최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고 두뇌의 시상하부에 선택적으로 작용하여 12~13시간 이상 효과를 발휘하는 약물인 모다피닐(modafinil, 약품명 프로비질)이 가장 많이 처방되고 있는데, 환자에 따라서 더 많은 약의 복용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하루 단 1알만 보험이 적용되고 그 이상 처방될 때에는 보험료가 삭감되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많은 부담이 되고 있습니다.

제도적·사회적 인식의 변화 절실해

▲ 강풀의 <타이밍>에서 기면병을 앓고 있는 주인공 장세윤.
ⓒ 문학세계사, 다음
홍승봉 교수는 "직장이나 학교에서 괴로움을 호소하는 환자들뿐만 아니라 군에서 기면증 때문에 의가사제대를 하는 환자들도 많이 볼 수 있다"면서 "군대에서 임무 수행 중 발생하는 탈력 발작이나 과도한 주간 수면은 자칫 잘못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홍 교수는 "군 관계자나 일부 의사들의 무지로 아직 정식적으로 군 면제 대상에 올라가 있지 않고 있다"며 학회차원에서 강력하게 건의하겠다는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한씨는 "친부모님께서조차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낮에 잠을 많이 잔다'는 꾸지람을 하셨다"며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도 잠을 잘 수밖에 없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또 이씨는 "복용하고 있는 약도 치료제가 아니고 증상 완화제일 뿐"이라며 평생 복용해야 할 약에 대해 상당한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씨는 이어 "기면병은 수면장애의 총체적 집합체"라며 "일반인들이 기면병 환자들의 고통을 이해해줬으면 좋겠다"고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기면병 환우회 모임에서 기면병으로 고생하는 한 회원의 글을 옮겨보려고 합니다.

"기면증으로 세상과 승부하기엔 너무 많은 좌절을 맛봅니다. 내가 지금 꿈꾸는 것이 꿈일까? 아니면 내가 살고 있는 이 이야기들이 꿈일까? 아! 인생 정말 피곤하구나." (ID ch11jo)

덧붙이는 글 | * 홍승봉 삼성서울병원 신경과 교수께서 도움말을 해주셨습니다. 

엄두영 기자는 현재 경북 의성군의 작은 보건지소에서 동네 어르신들을 진료하고 있는 공중보건의사입니다. 많은 독자들과 '뉴스 속의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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