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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 전두환 전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해 무려 53명의 군인들이 전원 몰살한 이 사고는 이미 역사속에 묻혀졌다. 이 사고를 기억하는 유족은 대부분 고인이 됐거나 연로하지만, 여전히 25년 전 사고에 은폐된 진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오마이뉴스>는 지난 2월부터 취재해 온, 일명 '봉황새 작전'으로 불리는 이 사고의 원인과 사후처리 과정 등을 모두 4차례로 걸쳐 보도한다. <편집자주>
[기사수정 : 14일 오전 10시 48분]



"지난 6일 오후 3시경 제주도 지역에서 대침투작전 훈련 중 병력이 탑승한 C123 군용기 한 대가 악천후로 인해 추락했다. 이 수송기에는 육군 제7787부대 장병 47명과 공군 제5672부대 6명이 탑승하고 있었으며 당일 오후 4시경 기체잔해가 발견됨으로써 이들은 순직한 것으로 밝혀졌다. 사고 원인은 이 수송기가 착륙하기 위해 제주도 해안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이상기류에 휘말려 한라산 정상 북방 3.7㎞ 지점에 추락했으며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이다. 한편 주영복 국방장관은 이번 C123기 추락 사고에 대해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1982년 2월 8일자 <동아일보>)

1982년 2월 6일 저녁 국방부 대변인이 발표한 'C123기 추락사고'에 대한 공식 입장을 보도한 기사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이 군용기의 자세한 사고원인은 조사 중"이며 "53명의 사망자 명단은 군 사정에 의해 발표하지 않고 유가족에게만 통보하기로 했다"고 썼다.

대통령을 경호하기 위한 이른바 '봉황새 작전'을 수행하다 군용기가 추락해 53명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전두환 정권은 "조사 중"이라는 말로 무마하려고 한 것일까. 사망자 명단을 공개하지 못할 "군의 사정"이란 대체 무엇일까. 정부는 당시 전두환 대통령 경호를 위해 출동했던 특전대원들의 죽음을 왜 '대침투작전 훈련 중 사망'이라고 바꿔치기한 것인가.

하지만 그나마 이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1982년 2월 8일자 석간 <동아일보>의 단신이 끝이었다. 이 사건은 "조사 중"인 채로 25년간 오리무중이 됐다. 세간의 관심에서도 멀어졌다.

제주 봉황새작전 유가족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의문의 연속이었다.

▲ 1982년 2월 5일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공군 수송기 C123기에 탑승했던 특전사 대원들. 이들은 그날 오후 3시 15분경 전원 사망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증언 ①] 이광형 "살데미 한 열 근? 뼈가 송곳처럼 뾰족"

충남 보령시 주교면 신대리에 사는 여든 세 살의 이광형씨. 이씨는 82년 2월 5일 C123 공군 수송기 추락사로 아들을 잃었다. 3년 전엔 부인과도 사별했다.

이른 아침 눈이 떠지면 종일 담배와 화투를 벗 삼아 다시 밤이 되길 기다린다는 이씨는 오랜만에 말벗이 돼줄 기자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지난 5일 만난 이씨는 다락방에 올라가 손수 수확한 꿀 한 종지를 내놓으면서 대접할 게 이뿐이라며 쑥쓰럽게 웃었다.

이제 너무 늙어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졌다는 이씨는 푸른 빛깔의 실크스카프로 꽁꽁 싸서 장롱 깊은 곳에 잘 보관해두었던 25년 전 사고 자료를 꺼냈다.

"그게 82년 2월 6일이었을규, 아마. 시골집으로 군인 하나가 왔어. 통지가 온 게지. 비행기가 실종됐다구만 하구 긴말 안 했시유.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특전사령부가 있었는디, 거길 가시자구 해서 갔지유. 시상에 거여동서 군인들이 서서 화장실 가는 것두 다 통제했시유. 어디 가느냐 이게지. 내 아들이 죽었다는디 시신 줌 보여달라고 통사정을 해두 군인들이 말을 듣남? 점잖은 평민 체면에 댓거리하고 싸울 수두 없구, 걍 그이네들이 하잔대루 했지유."

"동작동 국립묘지는 눈물바다 됐지만, 신문엔 단 한 줄도 안 나와"

이씨는 당시 둘째아들 고 이재훈 준위를 시신 한 번 보지 못하고 보냈다. 군 당국을 믿었기 때문이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사고현장엔 접근조차 불가능하다는 말에 발길을 재촉할 수도 없었다. 군 당국이 워낙 촘촘하게 감시하는 터에 옴짝달싹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우리가 워티게 제줄 가유. 군인들이 어떤 사람들이유. 사방팔방에 감시하게 맹글어놓구 못가게 했능걸 뭘. 우리버텀 워티게 할 줄 몰르니께 우린 뭐 기냥 끝날 때까정만 기달렸시유."

82년 2월 9일 오전 10시,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는 육군 합동으로 영결식이 거행됐다. 엉겁결에 아들을 잃은 부모는 오열했고, 핏덩이 자식을 둔 고인의 부인들은 입에 거품을 물고 목놓아 울었다. 참혹한 비행기사고로 동작동 국립묘지는 눈물바다가 됐지만 신문엔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날이 82년 5월 15일이유. 특전사에서 100일제를 지내준다구 다 제주도로 불러모더만. 억울하니까 충혼비라두 세워준다구, 제막식한다구 비양기표 죄다 끊어줬지. 100일제 지내구, 충혼비 제막식두 하구, 점심 먹구, 빨리 공항에 나가야 비행기 안 늦지 하든 참에 난 딸년이 여기 사니까 두루 둘러보구 사고현장에두 가보구 그러커구 올라갈래니까 먼첨들 가셔, 했드만 몇 사람이 그럼 나두 사고현장 보구 간다구 그러니께 군인덜이 안 된다 그거야. 이번 비행기 못 타면 전부 못 가신다, 그러니께 그럼 가야지 하구 다들 갔슈. 대구 아줌니 한분만 남구 다 갔쥬. 군인이 사고현장엔 못 가시니께 그리 알라구 해서 알았다구 하구 담날 딸년하구 사위하구 앞세우구 현장에 갔슈. 거기버텀 사단이여."

▲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추락한 C123기 잔해. 사건 당시 군인들이 비행기 너머를 수색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이씨가 손을 바르르 떨면서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오래 전 사고 기억을 다시 떠올리려니 회한이 밀려드는지 깊은 한숨을 토해내며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사고 난 한라산 개미등 계곡 원점에 가보니께 나무가 싹 다 잘렸습디다. 가시철망을 요렇게 쳐놨는디 '위험 폭발물 주의' 요렇게 써놓고 못 들어가게 해놨드라구. 100일이 지났는디도 비양기가 참 그대로 있다 이거여. 딸년이 거길 들어가서 제 동생 물건이 있나 찾아보겠다구 해서 뜯어말기구 나믄 대구 아줌니가 또 들어간다구 난리쳐서 말기구, 참 그랬슈. 자기 식구 옷가지 아닌감 찾아보구, 내 새끼 양말조각인감 뒤져보구, 뺑뺑 가시철망 돌아가매 눈물만 흘리구 섰었지.

가시철망 칠 새 있셨심 현장정리나 즘 하지. 여적지 기냥 뒀냐구 난리를 칠 건디 사위랑 딸년이 막아서 말었는디, 애덜이 앞서가면서 뭘 자꾸 비비적거려서 '얘 뭐니?' 하믄 '아부지 암것두 아녀요' 해서 말었는디 냉중에 알고 보니께 흩어진 살점데미, 뼈조각을 발로 묻으면서 지나갔대지 뭐여유. 혹시라도 지 애비 보구 놀랄까 무서 그랜 게지."

정권의 거짓말... 제대로 수습조차 안된 사고 현장

'사후처리 문제에 유감이 없게 하겠다'던 주영복 국방장관의 대국민 약속은 거짓말이었다. 군을 믿었던 이씨는 실로 믿기지 않는 제주 사고현장을 유족들에게 전화로 알렸다. 유가족들이 직접 사고현장을 수습하는 걸 목격하고 완벽하게 정리를 끝냈어야 했는데 무작정 군 당국을 믿은 게 실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스스로 발등을 찍게 됐다는 게 아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이씨는 당시 사고현장에서 시계와 수첩 같은 유품들을 주워왔다고 전하기도 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고인들의 부인 19명이 1982년 5월 19일 제주 사고현장에 가겠다고 나섰다.

"남편 죽은 데서 나두 죽으먼 월매나 행복스러우냐 이거여. 죽거나말거나 우린 상관할 바 아니니께 가겄다구 말이지. 그이네들이 갔다와서는 남자들이 즘 가야겄다구, 같이 즘 가시자구 기별이 또 왔슈. 영령들이 까마귀 밥, 늑대 밥 노릇 허게 생겼으니 빨랑 즘 가시자구 말이쥬."

1982년 5월 25일 남자 유가족 10여명과 고인들의 부인들이 다시 제주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 갔다. 이날은 출발부터 군인들이 따라붙었다. 수류탄을 보여주면서 사고현장에 들어가면 폭발 사고가 나서 다 죽게 된다고 위협도 했다. 부인들은 가시철망을 제치고 들어가 남편의 유품을 찾겠다고 난리였고, 남자 유족들은 이들을 말리느라고 아수라장이 됐다. 군인들과 남자 유족들 간에 멱살잡이가 진행될 즈음 한쪽에서 유가족 중 하나가 '이리 와보라'고 외마디 소리를 외쳤다.

"일순간 주목했쥬. 나 그 사람, 이름이 이렇게 생각이 안 나. 쫓아가봤드니 벌써 땅을 한 50㎝는 팠나봐. 어린애 죽으면 갖다 묻고 짐승들이 못 먹게 하느라구 동막대기(돌멩이) 올려놓듯이 그렇게 줏어다 해놨드라구. 술 한 잔 부은 흔적두 있구, 촛농 떨어진 흔적두 있구.

거길 파니께 푸대가 하나 나와. 고기로 치자면 한 열 근? 살데미, 군화 신은 발, 뼈가 송곳처럼 쫙 잘려서 뾰족해 있드만. 갑자기 한 사람이 군화를 끌러보자구 하드라구. 내가 잡았지. 이거 끌러서 내 새끼라고 밝혀지면 나 여기서 졸도한다, 당신 남편 거라면 워쩌것냐. 그러지 말구 우리 이거 들구 전두환이한테 갖구 가든지, 군부대에 갖구 가든지 결정을 짓자.

그러구 있는디 군인들이 와서 저희들한티 넘기라는겨. 계속 무전기로 뭐라 해싸코. 응, 유족들이 난동부리구 있다, 아 이 지랄하는겨. 따라왔든 군인 한 눔이 허공에 대고 총 쏘믄서 '명령이다, 손 떼라' 그래서 우리가 군인이야 이눔아 그리구 냅다 쥐고 산을 내려왔지. 내 목심이 끊어지든지, 당신네 목심이 끊어지든지 워디 한번 해보자구 그럼서 계속 실갱이를 한겨."

이씨는 개미등 계곡에서 관음사 매표소로, 다시 산천단 아래로 내려와 택시를 탔다. 우선 서울 가는 공항으로 가자고 했다. 제주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항공기를 타려고 하는데 항공사 직원이 '푸대자루'에 담긴 게 뭐냐고 물었다. 이씨는 거짓말하기 싫어 솔직히 말했다. 5일 사고 난 비행기에 탔던 유해들이라고.

항공사측은 기내에 유해를 실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군인의 사체는 부대 사령관의 반출 허가증이 있어야 하고, 일반인이라면 도지사의 반출 허가증이 있어야 기체에 실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선적도 똑같았다. 제주도에서 포대자루에 담긴 시신을 들고 뭍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은 모두 봉쇄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시 공항을 나와 택시를 타고 인적이 뜸한 여관으로 갔지유. 이 보따리를 들고 워딜 다닐 형편도 못 됐구, 우선 유골함이라두 하나 짜서 그 안에 넣고 다녀야지, 푸대자루에 끌고 다니니께 영 볼썽사납더라구.

여관 근처 목공소에 가서 유골함을 짜는디 윤 대령이라는 사람이 만나자구 한다 이거여. 다방에 와 앉았다구. 가서 만났지. 시체를 인계하라는 겨. 전두환한테 가져가든지, 국립묘지에 갖고 가든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께 군은 빠지라구 했드니, 군인은 국가의 시신이라는 겨. 개인의 시신이 아니다 이게지. 군정이나 진배없는 행정당국이니께 쉽게들 말한 게지.

그런데 방법이 없겠드라구. 그래서 꾀를 냈지. 제주도에서 화장해서 갖구 가겄다구 말이여. 어차피 당신네들이 독선 출항증도 안 끊어줄게 뻔하니께 앳새 제주화장터에서 화장을 해서 갖구 가자구 말이여. 그래서 그걸 갖구 서울 와서 국립묘지 27(사병)·29(장교) 묘역에 고루 뿌렸지유."

▲ 1982년 2월 9일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C123기 사고로 숨진 특전대원들의 안장식이 열렸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위로금만 전달... 사과 한마디 없던 전두환

이씨를 비롯한 유가족들은 군 당국에 다시 위령제를 올려달라고 요청했다. 1982년 5월, C123 공군 수송기에 탑승했던 군인들을 위한 위령제를 다시 지냈다. 이씨는 1982년 7~8월, 그해 여름이 다 끝나갈 무렵까지 7차례 정도 제주도에 시신을 수습하러 다녔다.

개미등 계곡에 앉아 파리가 덤벼드는 곳을 파보면 영락없이 썩어 가는 주검이 있었다. 낙엽이 질 무렵에는 살 더미가 떨어지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유골을 심심찮게 발견했다. 해골이나 엉덩이 모양의 뼈 등을 수십 점 넘게 화장한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군인덜이 이제 다 정리했다구 해서 가보니께 비양기를 폭파해서 흙으로 싹 덮어놨드만. 그담부텀 1년에 한 번씩 제사 때 갔구, 점점 익히는 게지 뭐. 죽은 놈 자꾸 생각해봐야 뭘 혀.

날씨가 원체 안 좋아서 공군이 비양기 못 뜬다구 청와대에 보고했는디, 장세동이가 당시 경호실장 아녀. 전두환이한티 충성허느라 기냥 띄우라고 그랬다드만. 그러니께 그 비양기가 1982년 2월 5일 아침에 뜰 거였는디 날이 원체 안 좋아서 오후 1시 30분엔가 떴다지. 것두 다 장세동이가 호통해서 그랬다는겨.

우리 유족들은 그래유. 전두환이를 보호하러 가다가 애들이 참 그렇기 무선 사고를 당한 거 아닌감. 그럼 1년에 한 번은 국화꽃 한 송이 들고 찾아와야지. 일절 없어. 저를 보호하러 가다가 죽은 사람들 아닌감. 충혼비 앞에 묵념 한번 하구, 방명록 적구, 꽃 한 송이 놔주면 좀 좋아?"

이씨는 당시 사고로 법정 보상금(사망 보상금, 대간첩작전 원호보상금, 군사원호상법에 의한 유족연금, 군인연금법에 의한 유족연금)과 급여,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서 500만원, 주영복 국방장관에게서 200만원, 각 군이 1000원씩 걷은 조위금 등 약 2500만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꽤 큰 금액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과를 받지 못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족들에게 단 한 번도 사과의 뜻을 전달한 바 없다.

"공수부대 위험하니께 빨리 제대하라구 그럼, 이눔이 시익 웃으문서 만약 불의의 사고가 생기면 아부지 평생 동안 편안히 살 수 있게 해드릴 수 있어유, 이랬다구."

매달 보름께 연금 타러 우체국 앞에 서면 그 말부터 떠올라 눈앞이 흐려진다는 이씨는 주름진 손으로 안경을 벗고 눈물을 훔쳤다.

▲ 1982년 2월 9일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C123기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안장식이 열리고 있다. 군인들이 유해를 땅에 묻는 모습.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증언 ②] 김홍 "너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아들 죽지 않았을 텐데..."

제주 봉황새 작전으로 희생된 고 김인현 중사의 아버지 김홍(68)씨. 김씨는 당시 숨진 장병들의 부모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사건 25주기였던 지난 달 5일 취재진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을 찾았다가 김씨와 마주칠 수 있었다.

한 달 뒤인 지난 6일 서해바다와 인접한 경기도 시흥 월곶의 자택에서 김씨와 다시 만났다. 김씨는 사진 등 25년 전 비행기 사고를 기억할 수 있는 유품들을 내놓고 기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인 김씨는 1982년 2월 6일,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밥을 먹고 TV 브라운관 앞에 앉았다. <9시뉴스>를 보기 위해서였다. TV를 켜자마자 자막에 실린 '7787부대'가 커다랗게 보였다. 아들이 속한 부대에 사고가 났으니 걱정이 밀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이튿날(7일) 아침 일찍 서울 송파구 거여동에 있는 특전사령부 7787부대로 찾아갔다.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보도만 접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고소식을 들어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우리 부부보다 먼저 부대로 찾아온 가족들이 있었지만 부대 안으로는 못 들어가게 했어요. 면회실에서 이름을 대면, 괜찮은 아이들은 괜찮다고 말해주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하고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어요. 참 추웠는데, 연탄난로를 피워주고 손이나 녹이고 앉아 있으라고 했죠.

순식간에 20~30명의 유족들이 모여들었는데 남은 가족들의 아이들은 모두 사망한 거라는 입소문이 돌았어요. 군대가 공식적으로 말해주지 않았지만 알게 된 거죠. 일순간 면회실이 아수라장이 됐어요. 죽은 사람 시신 보여 달라면서 의자 부수고, 책상 엎어버리고 난리였죠."

김씨는 당시 숨진 장병 53명의 유족 가운데 가장 젊은 나이였다. 장남을 잃은 터였지만 남은 세 아들과 아내를 위해 당장 돈을 벌지 않으면 생계가 곤란한 처지였다. 남들은 제주도를 열심히 뛰어다녔지만 김씨는 함께하지 못했다.

"시신도 못 보고 2월 9일 장사를 치렀어요. 순직통지서는 2월 10일자로 배달됐죠. 군인이 직접 집으로 가져왔어요. 이 비행기에 탄 사람들이 제주도 가기 전에 한 달 동안 스키훈련을 갔다 왔어요. 훈련이 참 잘된 아이들인데, 사고를 직감했다면 어떻게 해서든 탈출했을 텐데, 모두 여러 훈련 때문에 고단해서 졸다가 사고를 당한 게 아닌가 싶어요."

김씨도 군 당국이 치러주는 100일제에 참가한 뒤 유품을 찾기 위해 제주에 한 번 더 내려간 일이 있다. 한라산 개미등 계곡에서 전자시계를 주웠는데, 시계들은 일제히 '3:15'에 멈춰있었다. 그래서 김씨는 이 비행기 사고가 2월 5일 오후 3시 15분에 일어났다고 믿게 됐다.

그렇지만 사고원인에 대해서는 일체 들은 바 없다. 그저 기상악화로 인한 사고 정도로만 인식하고 있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고 원인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알려고 백방으로 뛰어 봐도 알 길은 없었다.

"너무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공수부대 가는 게 아니었는데…. 공수부대에 입대하면 월급 받으면서 군대 있을 수 있다고 그래서 간 거예요. 22살, 입대한지 1년 만에 죽은 거지요."

김씨가 갑자기 흐느끼기 시작했다. 가난하지만 않았어도 아들을 죽음의 현장으로 내몰지 않았을 것이라는 자책감이 몰려온 듯했다. 옆에 앉아 있던 부인 이영자(65)씨도 몇 마디 거들다 울음을 터뜨렸다.

▲ 1982년 2월 9일 영결식 후, 고 김인현 중사의 어머니 이영자씨가 묘비를 쓰다듬고 있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엄마, 나 좀 빼줘. 나 너무 힘들어.' 특전사 공수부대 훈련이 너무 힘들다고 그랬어요. 우리 집은 '빽' 없냐고, 얘가 너무 힘들어서 휴가 나왔다가 조금 늦게 들어갔더니 탈영이라고 엄청 두들겨 팬 모양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빼줄 힘이 있어야죠. 딴 애들 다 잘 하고 있는데, 너만 왜 그러냐고 오히려 핀잔을 줬던 게 정말 가슴이 아파요. 공수부대는 들어가면 월급 준다고 하니까 덥석 들어간 모양인데 그렇게 심하게 훈련시키는 줄 우린 몰랐죠. 눈병이 나서 눈에 벌겋게 됐었는데…. 다 부모 잘못 만나 그렇게 된 거지요."

고 김인현 중사가 살아있다면 올해 마흔일곱이 된다. 김씨의 아파트 거실 벽에는 장성한 동생들과 조카들, 제수들이 촬영한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김씨는 장남인 고 김 중사가 빠져 있는 게 못내 아쉬운 눈치였다.

"청와대 앞에서 우리 데모 참 많이 했습니다. 아직까지도 사고 원인이 변변하게 밝혀지지 않았잖아요. 기상악화, 이 한 마디 말고 군 당국이 설명한 게 없습니다. 원호금 타가라는 안내문에도 대간첩침투작전이라고 돼 있는데, 우리 아들은 간첩 잡으러 간 게 아니라 전두환 대통령 경호하러 간 것이거든요. 천하가 다 아는 일을 왜 군대만 쉬쉬하는지 모르겠네요."

[증언 ③] 이재영 "전두환에 과잉충성하다 빚어진 사고... 바라는 건 사과"

"장세동이 전두환한테 과잉충성하다 빚어진 사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달 20일 수원역 부근의 한 지하다방. 기자를 만난 고 이민호 상사의 아버지 이재영(80) '특전사 2·5 유족친목회' 총무는 앉자마자 대뜸 이렇게 말했다. 모두 잊혀 가는 판에, 생각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꺼내는 것 자체가 이씨에게는 고통인 것처럼 보였다.

이 총무는 "1982년 2월 5일 당시 기상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공군 당국에서 수송기를 띄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두 차례나 권고했는데도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장세동씨가 이를 강행했다"며 "결국 우리 아들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전두환 정권"이라고 호되게 비판했다.

이어 "전두환은 염치가 없다"며 "무관심해서 그렇겠지만 자신을 보위하다 스러져간 53명의 영령들을 위해 방명록에 서명 한 번 한 일이 없다"고 씁쓸해했다. 25년 동안 유가족 차원에서 무수한 행사를 했는데도, 전 전 대통령은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도 얼굴을 내민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섭섭해 했다.

이 총무가 기억하는 25년 전 비행기 사고에 대한 기억은 이광형씨나 김홍씨와 비슷하다. 한 군인한테 '비행기가 실종됐다'는 사고소식을 듣고 특전사에 갔다가 군인들한테 거의 '감금'당하다시피 했다는 것. 당시 공직에 있던 터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고, 다만 다른 유족들한테 사체 수습이 제대로 되지 않아 7차례 넘게 시신수습을 하러 다녔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다.

네 형제 가운데 장남이던 고 이민호 상사는 수원공고를 졸업하고 막노동을 하다 공수부대에 입대했다. 당시 이 상사의 혼담이 오갔는데, 상대편에서 사진을 보고는 '검은 베레를 쓴(공수부대) 군인과는 혼인할 수 없다'며 거절했다는 얘기도 들려줬다.

25년이 지난 지금, 이 총무가 바라는 것은 두 가지다. 정부 차원의 진정한 진상조사와 반성. 이 총무는 "이 사건이 오래 전 일이기 때문에 정부는 이미 잊었겠지만 유족들에게는 아직도 살아있는 사건이나 마찬가지"라며 "이제라도 당시 위정자이던 전두환씨의 사과와 반성을 듣고 싶다"고 당부했다.

▲ 1982년 2월 5일 발생한 공군 수송기 C123기 사고기에 탑승했던 장병들은 1달 동안 스키훈련을 다녀왔다. 스키훈련 후 기념촬영한 사진.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덧붙이는 글 | [발굴탐사] '제주 봉황새작전의 비밀을 찾아서' 기획기사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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