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한국전쟁의 혼란 속에서 사재를 털고 목숨을 걸며 3년 8개월간 독도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 하지만 최근 이들의 활약이 과장·왜곡됐다며 "이제는 역사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시 독도 수비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아니라 국립경찰이 도맡아했다는 것입니다. <오마이뉴스>는 바른 '독도수호사(獨島守護史)'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3차례에 걸쳐 이같은 사실을 보도합니다. <편집자주>
- 취재 : 김영균 기자
- 동영상 : 김호중 문경미 기자


▲ 1966년 4월 12일 방위포장을 받는 독도의용수비대원들. 오른쪽 맨 앞에 보이는 이가 고 홍순칠 대장이다. 이 때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1명. 하지만 30년 뒤인 1996년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33명으로 늘어났다.
ⓒ 독도박물관


1983년 7월 24일 밤, 울릉읍내에서는 한바탕 실랑이가 벌어졌다. 다음날 있을 '독도의용수비대 창설 3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일부 독도수비대원들이 "행사를 못 한다"고 버티고 있었던 것.

이들이 기념식을 거부한 것은 행사의 주인공인 독도의용수비대원이 갑작스럽게 33명으로 대폭 늘어났기 때문. 자칫 파행될 뻔한 기념식은 다른 대원들의 설득으로 다음날 간신히 치러지게 됐다.

"30주년 기념행사를 한다고 해서 황영문(작고)씨와 하자진씨, 나 3명이 울릉도에 들어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야단이 난 거지…. 독도의용수비대원을 33명으로 만들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그래서 내일 행사 못한다고, 왜 33명이냐고, 행사를 안 한다고 난리를 치렀다."

지난 10월 10일 울산에서 만난 독도의용수비대 제1전대장 서기종(78세)씨는 1983년 7월 '30주년 기념행사'의 뒷얘기를 풀어놨다.

혼성부대의 33명 벌거숭이 남자들?

서씨는 "애초에 독도에 들어간 사람은 나까지 포함해서 17명이었고, 보급선을 했던 배의 선원 4명을 포함한다고 해도 21명뿐"이라며 "독도에 한번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까지 다 넣어서 33명을 만든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현재까지 국민들에게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 규모는 홍순칠 대장을 포함해 33명. 하지만 이 숫자는 독도의용수비대가 창설할 즈음이 아니라 뒤늦게 급조됐다는 의혹이 그 동안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독도의용수비대원이 33명이라는 기록이 처음 보이는 곳은 1978년 홍순칠 대장이 서문을 쓴 <다큐멘터리 독도수비대>. 이 책에 나와 있는 독도의용수비대의 해단식 장면은 사뭇 장엄하기까지 하다.

"원래 50명으로 출발한 독도수비대였으나 그 동안 피치 못할 사정으로 탈락한 사람도 생기고 사망자도 있었으므로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숫자는 33명이었다…. 불빛을 에워싸고 설흔 세명의 벌거숭이 사나이들이 모여 섰다. 삼년간의 야수같은 생활 덕분에 그들은 한겨울에도 옷을 입지 않는 습관이 돼 있었던 것이다." (김교식 저, 홍순칠 서문, <다큐멘터리 독도수비대-의병은 살아있다> p335)

하지만 조금만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면 '33명'이라는 숫자가 거짓말이라는 점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독도의용수비대원 중에는 '박영희(후방지원대원)'라는 여성이 한명 들어 있다. 박씨는 바로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장의 아내다. <독도수비대>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불빛을 에워싸고 모여 선 설흔 세 명의 벌거숭이 사나이들" 중에는 박씨도 포함돼 있어야 한다.

1966년 11명 훈·포장→1983년 33명 등록

여성인 박씨는 과연 '벌거벗은 설흔 세 명' 중 한명이었을까?

"박영희라는 사람은 독도에 간일도 없어요. 홍순칠씨 아내인데…. 그렇게 따지면 우리 아내들은 다 (독도의용수비대에) 안 들어가나?"

홍 대장과 함께 최초로 독도에 들어갔다가 그해 12월 경찰관으로 특채된 이규현(82세·경북 울릉군)씨는 "33명이라는 사람들 중에는 독도에 한번 들어가본 적 없는 사람들도 모두 끼어 있다"고 지적했다. 다른 생존대원들과 마찬가지로 고령인 이씨는 독도에서 경찰관으로 근무할 때 다친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었다.

10월 12일 낮 울릉도 저동 집에서 만난 이씨는 후방지원대·교육대·보급대· 수송대 편제에 포함된 독도의용수비대원들도 모두 '가짜'라고 잘라 말했다. 특히 그는 수송대로 포함된 배의 선원과 선주들에 대해 "(그 배는) 미역 나르던 배일 뿐"이라고 회고했다. 서기종씨의 증언과 조금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면 보급선원들도 독도의용수비대로서 활동을 한 일은 없다는 점이다.

포항에 거주하는 박춘환(86세) 전 울릉경찰서 경사 역시 "독도의용수비대 숫자를 메우려고 별별 사람을 다 끌어다 넣었다"며 "오징어잡이 하던 사람, 미역 나르던 사람, 배 선원, 농사짓던 사람 등 다 끌어다 넣은 게 지금의 독도의용수비대"라는 증언을 내놨다.

▲ 지난 1996년 김영삼 대통령이 독도의용수비대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1966년 방위포장을 받을 때 11명이던 인원은 모두 33명으로 늘어났다. 이 가운데 독도 수비와 무관한 사람들도 다수 끼었다는게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 국가기록원
꼭 생존 수비대원과 경찰관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가 사실과 다르게 부풀려졌다는 점을 뒷받침할 만한 근거는 있다.

지난 1966년 4월 12일 독도의용수비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 및 포장을 받았다. 이 때 훈장을 받은 사람은 모두 11명. 홍순칠(5등근무공로훈장) 대장을 비롯해 서기종·김재두·최부영·조상달·정원도·김병열·한상록·유원식·오일환·고성달(이상 방위포장)씨 등이다.

애초부터 독도의용수비대가 33명이었는데, 22명을 제외하고 단 11명만 훈·포장을 받았다는 점은 분명 석연찮은 대목이다.

"우리 미쳤다고 손가락질한 사람도 독도의용수비대로"

그런데 당시 훈장을 받은 11명 중에서도 '가짜 독도의용수비대원'이 있었다는게 서기종씨의 증언이다.

"66년 4월에 홍순칠 대장이 와서 서울에 좋은 직장을 잡아줄테니 가자고 해서 올라갔다. 양정여관이라는 데서 하룻밤을 묵는데, 홍 대장이 내일 훈장을 받으러 간다고 하더라. 받기 싫었지만 그래도 경무대(현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11명이 같이 훈장을 받는데, 일부만 진짜 독도에서 고생한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아니었다."

심지어 이규현씨는 "우리가 독도에 간다고 할 때 '미친X'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사람들도 나중에 독도의용수비대가 돼 있더라"고 전했다.

반면 홍연순(홍순칠 대장의 딸)씨는 생존 수비대원들의 진술과 엇갈리는 주장을 펴고 있다. 홍씨는 "1966년에 11명만 훈포장을 받은 것은 경찰관으로 임명됐던 사람이나 공무원은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또 훈장에 크게 신경쓰지 않을 때라 일부러 받으러 가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홍씨는 또 "아버지(홍순칠 대장)는 11명만 훈장을 받은 것을 미안해하면서 77~78년 무렵 33명 모두를 합쳐 다시 훈장을 신청했다"며 "1996년 33명이 훈장을 받은 것도 울릉군청에서 공적조사를 다 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생존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현재 알려진 독도의용수비대원 33명 중 절반 가량은 독도 경비와 관련 없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진짜 수비대원들 중에서도 9명은 1954년 12월 경찰관으로 특채됐다. 이후 그들은 민간인이 아니라 경찰관으로서 독도경비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민간인 독도의용수비대원이 33명이라는 현재의 기록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얘기처럼 보인다. 남은 것은 독도의용수비대와 관련있는 생존자와 유족들이 역사를 바로 고쳐쓸 수 있도록 진실을 밝히는 일뿐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