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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살아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곳은 어디일까.

화려한 황제들의 공간인 구궁(古宮 자금성), 여름 별장 이허위안(이화원), 하늘에 제사지내던 톈탄(天壇) 등 이름만 대도 알 수 있는 세계적 문화유산? 아니다. 베이징을 자세히 여행해본 이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으라면 많은 이들이 후통(胡同)을 꼽는다. 왜 많은 이들이 후통을 꼽을까. 과거의 풍경만 놓여있는 그곳들에 비해 후통에는 사람이 있다는 게 이유다. 그런 후통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베이징의 뒷골목 '후통'

▲ 인력거를 타고 후통을 여행하는 이들. 여행자들을 위한 몇곳의 후통은 계속 보존할 계획이다
ⓒ 조창완
관광안내 가이드에 나온 베이징의 익히 알려진 풍경을 구경하다가 인력거에 끌려 뒷골목을 구경해본 사람들은 금세 새로운 매력에 빠진다. 그곳이 후통이다. 중국어를 알아들을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그곳에는 수백 년간 공유하던 베이징 사람들의 생활이 있고, 그들의 냄새가 있다.

대로에 있는 시장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과일이나 채소, 막 잡아 온 듯한 생고기가 줄줄이 걸려있는 고깃집, 그리고 온갖 생활용품이 즐비한 잡화점까지, 생활의 모든 것이 뒷골목에 놓여있다.

말이 통하지 않더라도 맘에 드는 집에 들러 그들의 삶에 대한 궁금증을 표현해도 좋다. 많은 이들이 이방인들을 불러 자신의 애완용 새들이나 강아지를 보여준다. 잘 조각된 함속에 있는 싸움용 귀뚜라미를 보여주는 경우도 있는데 더러는 수백만 원까지 호가하는 것도 있으니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후통의 시작은 칭기즈칸이 베이징을 정벌하면서부터다. 그는 연(燕)나라 때부터 도시의 기능을 해오던 베이징을 초토화한 후 그 자리에 우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가로망을 건설하고 대도(大都)라고 불렀다. 후통은 몽고어로 우물(井)이라는 뜻인 '후통'(忽洞)의 음차라는 게 보편적인 해설이다. '도시'라는 말의 몽고어 '하오터'(浩特)에서 유래됐다는 말도 있고, 여진족이나 몽고족을 뜻하는 '후인'(胡人)의 대동을 뜻하는 후인대동(胡人大同)의 줄임이라는 말도 있긴 하다.

초원을 달리던 몽고족들은 생명과 같은 물을 중심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그 위에서 행복을 찾았다. 이후 베이징이 도읍의 기능을 시작한 명(明) 영락제(永樂帝, 1360.5.2~1424.8.5) 이후에는 심장부인 구궁을 중심으로 다양한 삶의 현장이 되었다.

후통은 삶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도시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최고의 시가전 장소가 되기도 했다. 웬만큼 길눈이 밝은 사람이라도 후통에 한번 들어가면 나올 곳을 제대로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복잡하기 때문. 혹자들은 후통의 구조가 제갈량이 잘 활용한 팔진도(八陣圖)에 기초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들은 시가전에서 후통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해 애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 과거 첸먼 후통의 모습.
수천 개 후통에서 수천가지 향이

그렇다면 베이징 내에 후통은 어느 정도나 될까. 원대에 생겨나기 시작해 청대에 2000여 개였던 것이 1950년대에는 6000개에 이를 만큼 늘어났다는 통계가 있으나 실제로는 "북경에는 이름을 가진 후통 삼천육백개가 있고, 이름 없는 후통이 소털처럼 많다"(有名胡同三千六, 無名胡同似牛毛)는 속담처럼 많은 후통이 존재한다.

후통의 가장 큰 구역은 지금도 이름이 남아있는 동쪽의 제화문(齊化門), 남쪽의 영정문(永定門), 서쪽의 평칙문(平則門), 북쪽의 안정문(安定門) 등이 연결되는 직사각형에 가까운 구조 안이다. 하지만 베이징의 성이 구궁을 기준으로 황성(皇城, 동으로 왕푸징에서 서로 중남해, 북해까지), 내성(內城, 위의 사각 구조 중에서 정양문의 북쪽), 외성(外城, 정양문의 남쪽)으로 구분되어 있어서 거주자들의 형태도 당연히 큰 차이가 있었다.

지금도 징산(景山), 베이하이(北海) 공원과 스차하이(什刹海) 후통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있는 건물들은 보통은 문당(門當)이 2개나 4개여서 만만치 않은 집안임을 말해 준다. 문당이 2개라면 5~6품 정도지만, 4개라면 정승까지 한 인물의 집안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격이 맞는 결혼을 한다는 뜻의 문당후대(門當戶對, 신분과 직위가 서로 비슷한 집끼리 다한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 가장 아름다운 코스로 유명한 스차하이 후통의 중심에 있는 후하이.
ⓒ 조창완
여행자들은 보통 들르는 곳은 징산공원 동문의 옆에서 출발하는 후통과 스차하이에서 출발하는 후통이다. 징산 후통은 주로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이 살았던 곳이기도 한 징산둥지에(景山東街)에서 출발해 구로우(鼓樓)까지 여행하는 식으로 둘러보게 되는데, 좀 답답하기는 하지만 서민들의 본 모습을 잘 느낄 수 있다.

여행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곳은 스차하이(什刹海) 후통이다. 원래 열 개의 사찰이 있어서 이름이 생긴 스차하이는 베이징에서 가장 각광받는 밤 문화명소로 자리 잡은 후하이(后海)에서 출발한다. 출발지 인근에 있는 꽁왕푸(恭王府)를 비롯해 궈모루(郭沫若) 옛집, 쑹칭링(宋慶齡) 옛집, 경항운하의 종착지이자 황제들이 자주 들렀다는 은정교(銀錠橋) 등을 지나는 노선이다. 수백억만원이 든 덩샤오핑 딸의 신축 사합원은 중국의 현대를 보는 독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또 콩이지(孔乙己)를 비롯해 각 지역의 미식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음식 기행으로도 각광 받고 있다.

후통의 다양한 면모는 <베이징 이야기(imperial peking)>를 쓴 린위탕(林語堂)의 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후통의 이름에는 도시의 토속적인 정취와 특색이 잘 나타나 있다.... 이를테면 '양꼬랑지 후통'(羊尾巴胡同)은 문어투인 '양꼬리'(羊尾)로 쓰지 않고 '양꼬랑지'(羊尾巴)로 썼다. '말꼬랑지후통', '소뿔후통', '활등 후통' 등의 이름은 후통의 생김새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밖에 '단우물', '아줌마' 등도 있다."

올림픽과 도시개발로 하나둘씩 철거

▲ 전체 철거가 진행중인 첸먼따지에 동쪽 후통. 오른쪽 건물이 베이징 여관 문화의 역사적 장소인 전문제일 여관이다
ⓒ 조창완
그러나 소박함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누추함을 동반한 것을 의미한다. 공동공간이니 만큼 협소한 생활공간과 비위생적인 화장실, 열악한 냉난방 시설 등 전통식 후통이 가진 문제도 적지 않다.

이런 문제로 인해 수년전부터 후통은 위기에 처해 왔다. 그런데 최근에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톈안먼 광장 앞을 지나는 창안지에(長安街) 남쪽의 후통은 이미 철거중이거나 시한부 인생에 접어들었다. 외성 가운데서도 먼 지역은 이미 철거를 마쳤고, 그나마 시 중심부에 있어서 보호되던 후통도 이미 철거가 진행되고 있다.

▲ 1~2년 안에 철거될 예정인 첸먼 서쪽 지역의 중심인 따자란 시장.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시장이다.
ⓒ 조창완
현재 철거가 진행되는 대표적인 곳은 오랜 역사를 가진 오리구이 집 '첸쥐더(全聚德)' 본점을 비롯해 여관 등이 밀집되어 있는 첸먼따지에(前門大街)의 동쪽지역이다. 중국 정부는 첸먼 동쪽 1에서 4캉(巷), 차오창(草廠) 1에서 10구역을 2006년까지 완전 철거한다며 공사를 진행 중이다. 물고기 모양의 이 지역은 명나라 말부터 청대에 이르는 기간에 완성된 건축들로 건물 보존 상태가 가장 좋은 곳 중 하나였지만 500년 가까운 이곳의 흔적은 이제 없어졌다. 철거가 반 이상 진행된 이 곳에는 생활쓰레기만 수북이 쌓여있다.

맞은 편 따자란(大柵欄) 후통도 1~2년 내에 재개발이 이뤄질 예정이다. 그 곳은 베이징의 가장 유서 깊은 시장인 따자란 시장이 있는 곳이다. 약재 판매의 대명사 통런탕(同仁堂)을 비롯해 의류판매의 대명사 루이푸샹(瑞蚨祥), 차 판매의 명소인 장이위앤(張一元)을 비롯해 중국 영화의 발상지인 따관로우(大觀樓)가 만들어진 곳이다.

▲ 부서진 잔해의 한 켠에서 엄마가 나오길 기다리는 아이.
ⓒ 조창완
창안지에 북쪽이라고 해서 안전하지만은 않다. 징산공원에서 정 북쪽으로 있는 고루로 가는 방향의 주변 후통은 이미 정비에 들어가 상당수가 이미 철거됐다. 또 올림픽 스타디움이 만들어지는 야윈춘(亞運村), 와리(洼里)로 가는 길목의 후통들과 톈안먼 광창 서쪽의 샤오쑤저우(小蘇州胡同)도 이미 철거가 진행 중이거나 완료됐다. 후통의 이런 운명이 어디로 확장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행지로 가치가 확인된 스차하이나 징산 후통, 용허궁(雍和宮)과 궈주지엔(國子監)을 잇는 후통 정도만이 그 가치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다.

후통 없는 베이징은 인사동 없는 종로

▲ 철거 현장에서 떠나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생활하는 한 할머니.
ⓒ 조창완
그런데 많은 이들이 후통 없는 베이징의 멋에 의문부호를 단다. 명승고적에서 느낄 수 있는 베이징과 후통에서 느끼는 것에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후통을 체계적으로 보호하자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대표적인 이가 루쉰문학원(魯迅文學院) 왕빈(50, 王彬) 교수다.

80년대 말부터 베이징을 연구하고 특히 후통의 보호에 심혈을 기울여온 그는 특히 2004년 여름, 올림픽 경기장으로 인해 없어지는 베이딩춘(北頂村)의 따먀오(大廟)나 마을의 보호를 주장해 주목을 끌었다. 당시 그는 <주간인물>에 "역사상 (베이딩춘은) 대형 건축군의 하나가 있던 곳"이라며 "이곳을 보호해야만 우리는 인문 올림픽으로도 최고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후통의 역사적 연원을 찾는 베이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베이징 옛 모습에 관한 전통을 소개하는 '옛 베이징'(老北京網 www.oldbeijing.net)에도 '차오창 후통을 걷다'(草厂胡同漫步), '안녕 첸먼 후통'(別了前門胡同) 등 사라지는 후통에 대한 씁쓸한 회고 기사들이 적지 않게 올라오고 있다.

베이징은 거대한 평원에 세워진 도시다. 때문에 5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후통을 먼저 철거하지 않더라도 개발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그러나 후통의 철거에 관한 다양한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정책에 반기를 들기 힘들다는 점이 후통의 보호를 더디게 하고 있다. NGO가 거의 없고, 그나마 있는 단체들도 거의 목청을 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

이미 철거가 진행된 첸먼 후통에는 머지않아 마천루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통 없는 베이징'은 '인사동 없는 종로'와 같을 것이라는 점이다. 1966년부터 10년 동안 진행된 문화대혁명이 사상의 이름으로 문화와 사고가 파괴된 시기였다면 지금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옛 유산이 파괴되는 '자본주의 문화대혁명' 시기인 셈이다.

▲ 철거중인 첸먼 동쪽 후통. 미처 이사가지 못한 집에는 춘지에(설날)에 붙이는 다오푸가 붙어 있다. 이들에게 떨어질 복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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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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