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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도 열리는 10월 3일 지리산 법계사 하늘을 구름 한 점 없이 맑기만 했습니다.
ⓒ 임윤수
하늘이 참 맑습니다. 정말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파란색뿐입니다. 보궁 앞 하늘거리는 들국화에는 맑은 가을 햇살을 즐기듯 나비 한 쌍이 나풀대고 있습니다. 천왕봉 정상부근엔 이미 빨간 단풍들이 가을 지리산을 치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붉은색 물감을 가지고 여기저기 연지곤지라도 찍은 듯 빨갛게 물든 단풍들은 녹색 바탕에 더 산뜻하게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언제, 누가, 무엇 때문에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 혈맥에, 이해할 수도 없고 용서할 수도 없을 그런 못된 짓을 자행했는지 모르지만 하늘이 열렸다는 4338번째 개천절을 맞아 지리산에선 천왕봉 혈맥을 짓누르고 있던 주술적 쇠말뚝이 학생들의 손길에 제거되는 가슴 벅찬 그런 날이었습니다.

▲ 천왕봉 정상부근엔 붉은색 물감을 가지고 여기저기 연지곤지라도 찍은 듯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녹색 바탕에 더 산뜻하게 시선을 집중시킵니다.
ⓒ 임윤수
얼굴엔 여드름 자욱이 닥작닥작 남아있고, 송송한 밑머리 솜털로 한층 앳돼 보이는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쯤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가쁜 숨 헉헉거리며 법계사로 들어섭니다. 과천교육청 관할 7개의 초중고학생 22명이 지리산 쇠말뚝 뽑기를 체험하기 위해 이른 시간에 해발 1450m인 법계사까지 올라온 것입니다.

지난 6월 25일 80여 kg 정도의 쇠말뚝이 제거된 이후 또 다른 쇠말뚝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쇠말뚝을 제거하기 위해 과천 관할 초중고학생들이 과천문화원 주관하는 체험학습의 일환으로 쇠말뚝 제거현장을 찾은 것입니다. 쇠말뚝을 제거할 역사적 주인공이며 일꾼들은, 과천여고 학생부장인 김윤식 선생님을 비롯해 4명의 인솔교사와 초등학생 7명, 중학생 4명 그리고 고등학생 11명 등 총 26명으로 지리산 아랫마을인 중산리에서 1박을 하고 이른 시간에 올라왔습니다.

▲ 쇠말뚝은 지난 6월에 발견된 지점으로부터 고도 80여 m쯤 아래지점입니다.
ⓒ 임윤수
산행에 익숙하지 못하고, 막노동에 가까운 쇠말뚝 뽑기와 위험하기조차 한 쇠말뚝 운반 작업이 고스란히, 정말 고사리 손 같은 학생들의 손으로 이루어지는 그런 순간들입니다. 숨고르기가 끝나고, 민족정기를 살리는 일이라면 만사 제쳐놓고 앞장서는 민족정기선양위원회장인 소윤하 선생님의 인솔로 드디어 쇠말뚝이 박혀있는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천왕봉으로 가는 길, 법계사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만나는 마당바위 가장자리, 천왕봉과 법계사가 일직선으로 이어지고 있어 두르르 굴리기라도 하면 법계사까지 그 쇠말뚝이 데굴데굴 굴러갈 듯한 그런 위치에 쇠말뚝은 박혀 있었습니다.

▲ 이번에 뽑혀진 쇠말뚝 역시 포탄처럼 그 끝이 뾰족하게 가공되어 있었습니다.
ⓒ 임윤수
산죽 사이로 삐죽이 올라온 쇠말뚝이 마치 불발포탄처럼 보입니다. 주변의 흙을 조심스레 걷어내고 말뚝을 따라 삽과 괭이를 이용해 구덩이를 팠습니다. 말뚝을 좌우로 흔들며 공간을 넓힌 후 밖으로 들어내려 시도해 보지만 그 묵직함 때문에 꼼짝도 하지를 않습니다. 결국 지난 6월과 같이 밧줄을 대신해 광목천으로 말뚝의 허리를 묶고 V자로 하여 위로 당겨 올렸습니다.

쇠말뚝이 뽑혀 올라오는 순간 뭔가, 막혔던 뭔가가 울컥 솟아나는 기분입니다. 흐르다 막혔던 천왕봉의 정기가 콸콸거리며 흘러내릴 듯한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체증이 내려가듯 가슴 후련한 그런 뭔가가 느껴집니다.

▲ 밧줄을 대신해 광목으로 무거운 쇠말뚝을 뽑아 올렸습니다.
ⓒ 임윤수
이번에 제거된 쇠말뚝은 지난 6월에 쇠말뚝이 제거된 곳으로부터 고도 80여 m쯤 아래쪽인 해발 1520m 쯤의 위치에 박혀있었으며 굵기와 길이는 물론 형상이 비슷해 누군가 작심하고 지리산 위쪽부터 아래쪽으로 지맥을 따라 박았음을 한 눈에 짐작할 수 있게 했습니다.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뾰족한 부분을 길게 가공해 6월에 제거된 쇠말뚝보다 대략 10kg정도는 가벼워 70kg쯤 된다는 사실입니다. 재질 또한 6월에 제거된 쇠말뚝과 똑같은 구리 재질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인솔교사의 이마엔 이미 땀방울이 송송 솟았습니다. 그 육중한 쇠말뚝을 법계사까지 운반하는 것이 걱정됩니다. 그러나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인솔교사와 학생들만의 인력으로 힘들고 위험한 고비를 반복하며 끌고 당기며 쇠말뚝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천왕봉을 오르던 많은 등산객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냅니다.

▲ 앳된 학생들이 어엿차 거리며 쇠말뚝을 옮기고 있습니다.
ⓒ 임윤수
이따금 "어어어~" 거리는 위급한 소리들도 들렸지만 흐르는 땀 쓱쓱 닦아가며 조심스레 한발 한발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무게 때문에 얼마가지 못해 어깨가 빠질 듯하고 팔뚝이 끊어질 듯 아파오는가 봅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치를 바꿔가며 팔 바꾸기를 하는 지혜들도 동원해 봅니다.

정말 앳돼 보이는 학생들의 그 당찬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대견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안 기온제를 지내려는 공터까지 쇠말뚝이 옮겨졌습니다. 제상을 마련하는 동안 말뚝의 흙을 닦아내며 꼼꼼히 살펴보니 말뚝에 뭔가 글씨가 보입니다. 한글도 보이고 일본어인 듯한 그런 글씨도 보입니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는 정확한 해독이 어렵기에 그 정보가 훼손되지 않게 운반해 줄 것을 국립공원관리공단 지리산사무소 측에 신신당부를 하는 것으로 마쳐야 했습니다.

▲ 정안제에는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골고루 참석했습니다.
ⓒ 임윤수
법계사 주지스님이 마려해준 제상으로 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정안제를 올렸습니다. 참석한 모든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동안 못된 쇠말뚝 때문에 심신이 불편했을 수도 있는 지리산에 미안해하고 위로하는 마음들이 가득한 듯합니다. 하늘에 고하고 땅에 알리는 그런 마음들이 보입니다. 강신과 초헌, 아헌, 그리고 종헌이 차례대로 진행됩니다. 어른 학생 할 것 없이 푸른빛 도는 예복을 입고 검은빛 모자까지 쓰고 삼배를 올립니다. 천지인, 하늘과 땅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예이며 정성입니다.

정안제가 거반 진행되었을 무렵 산청군의회 이서우 의장님이 도착합니다. 예기치 않게 지각한 것이 사뭇 미안한 듯 몇 번씩 권했을 때서야 예복을 입고 잔을 올리고 삼배를 올립니다. 지난 6월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산청군청 차원의 지원은커녕 별다른 협조조차 없는 듯하여 제거된 쇠말뚝을 직접 본 입장에서 추후 또 다른 쇠말뚝이 발견되었을 경우 지원해 줄 의사가 있는지를 물으니 아주 흔쾌하게 그렇게 하겠노라 쾌답을 하십니다.

▲ 정안제를 지낸 후 뽑아낸 쇠말뚝을 가운데 놓고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 임윤수
그동안 쇠말뚝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 못해 별다른 지원이나 협조를 하지 못했는데 다음에 이런 행사가 있을 경우 군수와 협의하여 기꺼이 돕겠다며, 이번뿐 아니라 지난번 행사에도 별다른 도움과 협조가 이루어 지지 않았음을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으니, 그럴 기회가 없으면 더 좋겠지만 혹시 숨겨진 쇠말뚝이 또 발견되어 제거되는 날엔 좀더 나은 조건에서 행사가 이루어지리라 생각됩니다. 어찌 되었건 뽑혀진 쇠말뚝은 산청군 의회의장의 마음도 움직였고 그런 움직임은 결국 민심을 움직이고 그렇게 움직여진 민심이 민족의 정기로 되살아나리라 기대됩니다.

어떤 이는 산행을 하며 어렵게 구해 담가두었을 산삼주를 제물로 올렸습니다. 어림할 수 없을 그 오랜 세월 철심이 밖힌 채 지내야 했던 지리산의 통증을 어루만지는 그런 심정으로 귀하디귀한 산삼주를 제물로 올렸을 거라 생각됩니다.

▲ 뽑아낸 쇠말뚝에는 분명한 글씨가 보였습니다. 해독해봐야만 할 그런 숙제일 듯합니다.
ⓒ 임윤수
쇠말뚝에 가로막혀 어쩌지 못해 마당바위에 맴돌던 지리산 지기가 가로쇠말뚝을 옮기며 조심스레 내딛던 학생들의 발자국을 따라 법계사 마당까지 따라 내려온 모양입니다. 정안제를 지내고 음복주로 얻어 마시는 그 산삼주 한잔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지고 혈기가 넘쳐흐릅니다.

가을 햇살은 이미 중천에 떠 있고, 그렇게 흘러든 천왕봉 지기가 법계사에서 기력을 발휘하는 듯 초하루를 맞아 기도를 올리는 신도들의 정근소리가 더 한층 크게 울리고 주변의 산색조차 기운이 넘치는 듯합니다.

▲ 지리산 아랫마을 중산리광장에서는 지난 6월에 뽑아낸 쇠말뚝을 옮겨놓고 겨레의 빛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 임윤수
법계사를 나와 터벅거리며 하산을 해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그곳에는 지난 6월에 뽑아낸 쇠말뚝을 옮겨놓고 '겨레의 빛' 행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학생들의 옹골찬 체험학습이 막혔던 지리산 정기를 형통시키더니 이렇듯 지리산 아랫마을에선 덩더꿍 거리는 축제마당이 펼쳐지는가 봅니다.

10월을 상달이라고 합니다. 이 좋은 10월에 단풍 찾아 딴 곳에 갈 것 없이 막혔던 지기 흠뻑 흘러들 법계사를 찾아 사색 삼매에 빠져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덧붙이는 글 | 법계사를 찾는 사람들은 좋겠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피를 얻음은 물론 봇물처럼 흘러들었을 천왕봉 정기도 느낄 수 있을테니 말입니다. 그런 천왕봉 정기 느끼러 한번 다녀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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