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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악산 천불동 계곡
ⓒ 배지영
6월 25일 새벽 1시 30분, 관광버스는 강릉 휴게소에서 멈췄다. 사람들은 군산에서부터 몇 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온 찌뿌둥한 몸을 푸느라 말 그대로 달밤에 체조를 했다. 그러고 나서 아침밥을 먹었다. 무슨 입맛으로 먹을까 싶겠지만 뜻밖으로 맛있다.

버스는 새벽 3시 30분에 설악동에 사람들을 내려놓았다. 어렴풋하게 설악산의 능선들이 보였다. 랜턴을 켜고 신흥사를 지나 비선대까지 빠르게 걸었다. 금강굴에 왔을 쯤부터는 랜턴을 껐다. 설악동에서 봤을 때만 해도 허공에 떠 있던 달은 누군가 잡아끌어 내리고 있는지 능선 사이로 지고 있었다.

▲ 원효 대사 수행했다는 금강굴 앞에서 본 설악산
ⓒ 배지영
금강굴은 원효 대사가 수행을 한 곳인데 이 양반이 심상치 않다. 1500년 전쯤에 대세였던 당나라 유학을 가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고 나서는 나고 자란 경주에만 머무르지 않고 아직 반듯하고 고른 길이 없던 우리 나라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나는 6월 들어 경주에서, 부안에서, 설악산에서, 모두 세 번 원효 대사의 발자취를 보았다.

옛날 사람 중 몇은 하늘을 날기도 했고, 하룻밤에 천리를 갔다고 생각한다. 같이 산에 다니는 동주 선생님은 얼마 전 보름달이 떴을 때 지리산 성삼재에서 5시간 30분을 달려 천왕봉에 닿았다. 눈앞에서 진짜 '휘리릭~' 사라져 버리는 선생님을 볼 때면 내 추측이 황당하지만은 않다고 ‘확신’한다.

공룡 능선을 타기 위해서는 금강굴에서 마등령까지 3시간쯤 올라가야 한다. 이 구간은 경사가 심해서 공룡 능선의 신선대 부근처럼 탈진에 인명 사고까지 일어나는 조심스러운 곳이라고 한다. 나는 같이 온 후배 태경이 직장 연수에서 밤 늦도록 술을 마시고, 레프팅까지 하고 와서 몸이 고되다는 핑계를 대면서 일행들로 부터 뒤처졌다.

▲ 설악산
ⓒ 배지영

▲ 안개가 껴서 공룡 뼈 같은 바위 능선이 잘 보이지는 않는다
ⓒ 배지영
느긋하게 올랐다. 태경과 둘이서 조난당하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낄낄댔다. 배낭이 무거워서 도시락도 동주 선생님한테 맡겨 버렸지만 태경과 내 배낭 속에는 참외 4개가 있고, 미네랄 사탕이 있다. 집에서 얼려온 물통도 누구 손에 들려있는지 모르지만 갈증이 심해질 때에 운 좋게도 나뭇잎으로 받쳐서 흘러나오는 샘물을 받아 마셨다. 마등령에서 밥 먹고 있는 일행을 만났다. 밥도 먹고, 술 한 잔 마시고, 낯선 이들한테서 커피도 얻어마셨다. 몸이 나른해지면서 한없이 꾸물거리고만 싶어졌다.

마등령에서 무너미 고개까지 5km쯤 되는 거리에 있는 다섯 개의 바위 능선을 공룡 능선이라고 부른다. 처음에는 공룡처럼 거대하고 무서워서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는데 산에 솟은 바위 모양이 공룡 뼈를 닮아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안개가 얕게 껴 있어서 공룡 뼈 같은 생각은 안 들고 조선시대 화가 정선의 그림처럼 느껴졌다.

▲ 일부러 그런 것처럼 큰 돌들이 길에 깔려있다.
ⓒ 배지영
밥 먹고 나서 모두 함께 일어섰지만 태경과 나는 뒤로 물러났다. 길은 누군가 일부러 그래놓은 것처럼 수많은 바윗돌이 깔려 있었다. 천천히, 몸을 숙이고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보고, 고개를 젖히고 쳐다볼 게 있으면 그렇게 했다.

태경은 지리산보다 설악산이 낫다고 했다. 글쎄, 나한테 지리산은 첫사랑의 산이니까 어느 산하고도 댈 수가 없다. 설악산은 불안하면서도 영원할 것 같은 청춘의 산처럼 느껴졌다. 청춘이란 원래 사람을 흔들어 놓는 법이니까.

동주 선생님은 신선대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주고 싶으셨나 보다. 안개 때문에 우리가 넘어온 능선들이 잘 보이는 편은 아니어서 마음속에만 담아두려고 했는데 공룡 능선을 배경으로 태경과 나는 다정하게 서서 웃었다.

▲ '정체'가 없어서 바위 오를 때 순서를 기다리지 않아도 됐다...^^
ⓒ 배지영
공룡 능선을 넘는데 보통 5시간 걸린다고 한다. 태경과 나는 해찰할 건 다 하고 왔는데도 4시간쯤 걸렸다. 산에도 ‘정체’가 있다. 고속도로에서 차가 밀리는 것 같은 진짜 ‘정체’. 단풍철이거나 연휴거나 휴가 기간일 때는 바위 하나를 넘을 때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그런 ‘정체’가 없어서 빨리 왔지 싶었다.

공룡 능선이 끝나고 천불동 계곡에서 비선대로 내려오는 길은 지루했다. 풍경이 아무리 멋져도 다 끝났다고 안심한 순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길은 괴롭기까지 했다. 3시간쯤 걸려 내려오는 길에서 두 번이나 계곡으로 내려가 발을 담갔다. 비선대에 와서 맥주 한 캔 마시고서야 겨우 한 숨 돌린 사람처럼 느긋해졌다.

바위산들을 올려다봤다. 나무들은 바위틈에도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자세히 보면 벼락 맞은 듯 쩍 갈라진 나무들도 있었다. 아무리 나무라도, 사람보다 벼락 맞을 확률이 조금 높다 해도, 그렇게 죽으면 한이 남을 것 같았다. 달걀귀신처럼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몇몇 외로운 나무귀신이 우리 주위에 있을 것도 같았다.

▲ 공룡 능선
ⓒ 배지영

▲ 공룡 능선
ⓒ 배지영
비선대, 공룡 능선, 천불동 계곡, 다시 설악동까지 12시간 걸렸다. 생각보다 고되지 않았지만 남편하고 전화를 할 때는 좀 힘들었다고 엄살을 떨었다. 남편은 산에 뭐 하러 가냐고 다시는 가지 말라고 했다. 전날, 내 도시락을 싸 주면서도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는 ‘미친 짓’을 뭐 하러 하냐고 구박을 했다.

공중 화장실에서 씻고 옷 갈아입으면서 왜 ‘미친 짓’을 하러 다니나 생각해 봤다. 산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과는 관계를 맺지 않고 낯선 채로 있어도 된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이 준 음식을 먹고 내미는 손을 잡으면서 ‘마음의 셔터’를 내릴까 망설이지 않는다. 묵묵히 길을 가면서도 낄낄거릴 게 많아 처음으로 산을 알아봤던 열 일곱 살짜리 여자애처럼 웃고 있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내 인생이라고, 장엄하지만 팍팍한 저 길을 혼자 힘으로 걸어가야 한다는 것에도 투덜대지 않는다. 아이 말도 흘려듣지 않아서 혹시 소원을 들어주는 콧김 센 거인을 만나거나 못 생겼지만 맛있는 것을 주는 전갈 괴물이 있을 지도 몰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관심 있게 본다.

일상의 온갖 크고 작은 일들도, 밥벌이도, 상처 받았던 일도, 모두 나하고 천 걸음쯤 떨어져 있다. 그것들은 자세히 보려고 해도 희미하다. 산 아래에서는 스타일을 중시하느라 절대 입지 않는, 실용성만 강조한 등산옷을 입고도 좋다. 자유롭다.

▲ 천불동 계곡
ⓒ 배지영
군산에서 설악동까지 6시간 걸렸다. 빠른 편이었다. 돌아올 때는 버스 기사가 길을 잘못 들어서 대포항까지 빠졌다가 왔는데도 앞서 달리는 차들을 경적까지 울리면서 몰아내서 5시간만에 왔다. 산에서 충전한 의연한 마음은 핸드폰 배터리보다도 더 빨리 닳았다. 나는 자다 깨서 일어나서는 버스 기사 뒤통수를 째려봤다.

덧붙이는 글 | 6월 25일에 다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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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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