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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 머리 모양이 단발로 모두 똑같다.
ⓒ 오마이뉴스 박상규
"머리도 못 기르는 이놈의 학교 빨리 졸업해야지."

수원 A여고 2학년 박아무개양의 짧은 탄식이다. 18살 박양의 머리 스타일은 일명 '바가지 머리'다. 뒷 머리카락이 교복 옷깃에 채 닿지 않을 만큼 짧다. A여고 1700여 학생 대부분 바가지 머리다. 학교의 '명령'이니 예외는 없다.

밤 10시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면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머리 모양의 학생 1천여 명이 교문을 빠져 나온다. 박양은 이 풍경을 "바가지 쓰나미"라 묘사했다.

박양과 같은 두발규제로 인한 탄식의 역사는 1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5년 12월 일제는 위생에 좋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단발령을 내렸다. 고종과 세자는 물론 내각의 신하들은 모범을 보인다며 먼저 상투를 잘랐다.

단발령 앞장선 김홍집 돌 맞아 죽어

이때 최익현의 "내 목은 자를 수 있으나 내 머리는 자를 수 없다"는 탄식을 시작으로 전국의 유생과 지방민들은 의병을 조직했다. 단발령은 명성황후 시해와 더불어 의병봉기의 이유였다. 게다가 단발령을 주도한 총리대신 김홍집은 광화문 거리에서 돌에 맞아 숨졌다. 단발령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직접 설득하러 나섰다가 변을 당한 것이다.

최근 일부 교사들이 학생 머리에 강제로 '고속도로'를 내는 행위의 기원도 이때다. 단발령이 민중들에게 먹혀들지 않자 조정 관리들과 순검들이 가위나 칼을 들고 직접 거리와 장터로 나섰다. 이들은 단발을 하지 않은 사람들의 상투를 강제로 잘랐다. 그야말로 '상투의 수난시대'였다.

상투 강제 절단이 자주 발생하자 이발소가 생겨났다. 사람들은 상투가 함부로 잘려 산발이 되자 이발소를 찾아 하이칼라(짧은 머리를 기름에 발라 넘기는 서양 스타일)로 다듬었다. 조선사람을 상대로 한 첫 이발소는 1910년대 종로에 처음 생겼다.

"지금 도시 남자치고 이발소에 안 다니는 이가 있습니까? 이발소 이야기는 결코 남의 이야기하듯 지나쳐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경성 안에서 어느 이발소가 제일 나은가? 대구, 평양, 개성, 인천에서는 어느 곳에 제일 나은가? 투표하여 주십시오."(<별건곤> 1927년 7월호)

▲ 1929년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최승희의 단발머리.
ⓒ 한국사 이야기
이 광고가 말해주듯 1920년대 후반에는 이발소가 많았다. 관공서와 단체에서 지정하는 이발소가 있을 정도였다. 농촌에서는 마을 경비로 이발 도구를 갖추었다. 일명 '떠돌이 이발사'도 이때 처음 등장했다.

남성보다 오래된 여성의 두발규제

여성들은 단발령의 폭풍은 피했다. 여성은 이미 조선후기 때부터 조정의 강력한 '두발규제'를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들은 머리를 틀어 올리는 형태를 선호했지만 조정은 쪽머리와 비녀를 사용하게 했다. 개화기 이후 비녀빼기는 여성운동 차원에게 전개됐다.

조선 여성들에게 최고의 충격은 1929년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무용가 최승희의 등장이었다. 웨이브를 넣지 않은 최승희의 단발은 최고의 '센스'로 통했다. 당시 시인 김기림은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누구인가 현대를 3S시대(스포츠, 스피드, 섹스)라고 부른 일이 있지만 나는 차라리 우리들의 세기의 첫 30년은 단발시대라고 부르렵니다. 얌전하게 땋아서 내린 머리, 그것은 얌전한 데는 틀림없지만 거기에는 이 시대에 뒤진 봉건시대의 꿈이 흐릅니다."(<동광> 1932 9월호)

1934년부터 여성의 단발머리 바람은 전국을 휩쓸었다. 파마는 전발(電髮)이라 불렸는데 단발의 뒤를 이어 유행했다. 최초의 조선인 미용실은 1933년 화신백화점에 생긴 화신미용실이다.

일본의 두발규제는 1940년대 다시 몰아쳤다. 전시 체제에서 남성에게는 삭발을, 여성에게는 파마를 금지하고 단발을 강요했다. 자신의 적국인 영국과 미국을 따라하지 말라는 이유였다. 그래서 이발사는 편하게 머리를 잘랐다. 5년 동안 머리 모양을 내지 못하자 여성들은 "이놈의 세상 빨리 망해야지"라며 불평했다고 역사가들은 적고 있다.

"이놈의 세상 빨리 망해야지"

▲ 1970년대 두발단속 모습
ⓒ 대한민국史
해방 이후 사람들은 개성에 따라 자유로운 머리스타일을 구사했다. 그러다 다시 머리에 각이 잡히기 시작한 때가 1970년대다. 청바지와 통기타로 요약되는 이 시대에 장발은 큰 유행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장발을 퇴폐행위로 간주했다. 다시 단발령이 내려진 시대처럼 사람들은 거리와 경찰서에서 강제로 머리를 깎였다.

박 정권이 끝나면서 비로소 두발규제는 사라졌다. 그러나 학생은 예외였다. 학생들에게 1895년 시행된 단발령은 21세기 지금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의 유화 조치로 잠시 두발규제가 풀렸을 뿐이다. 과거 학생들은 여러 형태로 두발규제에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조직적 양상은 아니었다.

21세기 인터넷을 통해 자기 뜻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학생들의 두발규제 반대 움직임은 과거와 다르다. 기성 세대가 추억으로 생각하는 강제 이발에 대해 중고생들은 "개성을 무시한 야만적인 인권탄압"이라 반발하고 있다. 두발규제를 반대하는 사이트(www.nocut.idoo.net)에13일 현재 7만명에 육박하는 학생들이 서명에 동참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고 헌법소원도 계획하고 있다.

두발규제 잔혹사는 언제까지?

서울 B고등학교의 김아무개군(18)은 "교복을 반대하는 것도 아니고 요란하게 염색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다"며 "내 몸은 스스로 가꾸게 내버려두고 건드리지 말라"고 주장했다.

▲ 머리카락이 강제로 잘린 모습.
ⓒ 아이두넷
그러나 일선 교사들의 생각은 다르다. 안양의 C고등학교 학생부장 교사는 "두발이 자유화 되면 교실 분위기가 산만해지고 전반적인 학습 분위기가 떨어진다"며 "학생들은 교사들의 지도하에 공부에 매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교육청은 두발규제에 학생 의견을 반영하라고 일선 학교에 지시했다. 다른 교육청도 고심중에 있다. 그러나 일선 학교의 많은 교사들은 "불가하다"는 입장이다. 학생들 또한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이다. 학생과 교사의 속마음은 여전히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 학생들은 14일 두발제한 반대 집회 강행을 예고하고 있다.

학생들에게 가해진 '두발규제의 잔혹사'는 언제까지 이어질까. 단발령 110주년을 맞아 문득 궁금해진다.

(참고자료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한홍구 <대한민국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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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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