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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지 말고, 장례식도 치르지 말라. 쓸 만한 장기는 모두 기증하고 남은 시신도 해부용으로 기증하라. 죽어서 땅 한 평을 차지하느니 그 자리에서 콩을 심는 게 낫다. 유산은 맹인 복지를 위해 써라."

지금부터 10년 전인 1995년 3월 7일 세상을 떠난 한글운동가이자 고성능 한글타자기 발명가인 공병우 박사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7일 오후 공 박사가 남기고간 '한글사랑 나라사랑'의 뜻을 이어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글회관 5층 강당에 보여 10주기 추모식을 열었다.

▲ 공병우 박사 10주기 추모식 참가자들은 고인의 뜻을 이어 한글날 국경일 제정과 세벌식 자판 보급 등 한글기계화의 올바른 추진에 힘을 쏟겠다고 결의했다.
ⓒ 이민우
이날 추모식 인사말을 맡은 한글학회 김계곤 회장은 "공병우 선생께선 세벌식 글씨꼴을 만드시고 한글 타자기 발명 등 한글발전에 큰 공헌을 하셨다"며 "어느덧 10년 지났지만 남은 우리들이 선생의 정신을 이어 받는다는 생각으로 살아가자"고 당부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이 만날 청춘이었다"

이어 공 박사의 삶을 돌아보며, 뜻을 기리는 각계인사의 추모사가 이어졌다.

우선 전 언론인 문제안씨는 1983년경 미국에 망명 중이던 공병우 박사를 만났을 때의 경험을 얘기하며 "당시 박사님이 저한테 젊은 사람이 아직 컴퓨터도 안 배우고 어쩌자는 겨냐며 혼을 내신 적이 있다"고 회상했다.

"그때 공 박사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합니다. 제가 그때 예순 네 살이었는데, 길거리에서 막 혼을 내시는 거예요. 컴퓨터 안 배웠다고 말입니다. 그분은 젊다는 걸 나이로 따지지 않고 얼마나 자기실현을 하며, 사회에 열심히 공헌하고자 하느냐를 잣대로 삼으셨던 겁니다. 그분은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이 만날 청춘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전두환 정권에 맞서 <독립신문>이란 제호의 반정부신문을 만들던 당시 공 박사를 만났다는 전 국회의원 김경재씨는 "박사께선 하루에 열 번도 더 전화를 걸어 한글의 세계화와 세벌식 자판이 왜 중요한지 강조하셨다"며 말했다.

"전 공병우 박사를 통해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배웠습니다. 박사께선 평소 저에게 한글학자들이 맞춤법 갖고 다투고 있다고 하시면서, 중요한 건 한글의 세계화를 위해 뜻과 지혜를 모으는 일이라 하셨습니다. 박사님의 뜻을 이어 한글 '가나다'를 몽고에 수출하는 것을 추진해 주십시오.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공 박사는 안과 의사이자, 한글타자기 발명가, 사진가, 맹인운동가"

공 박사의 제자인 한글문화원 송현 원장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란 말이 있는데, 말 그대로 공 박사는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큰 사람이셨다"며 다양한 분야에서 고인이 남긴 업적을 기렸다.

"공 박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쌍꺼풀 수술을 하셨고, 콘택트렌즈를 우리나라에서 개발 도입하기도 한 안과 의사셨습니다. 또한 실용성 있는 한글타자기를 발명한 한글기계화의 아버지라 할 수 있으며, 독재정권에 의해 어려움에 처하면서도 옳은 생각과 정의로운 생각을 굽히지 않고 싸우신 분입니다. 그 분은 저명한 사진가였으며, 점자타자기와 맹인지팡이를 개발한 맹인운동가였습니다."

송 원장은 "공 박사의 소원은 한글 자판 통일이었다"며 "지금은 우리 사회에서 잘못된 과거청산을 하듯 한글기계화에도 과거청산이 필요한 시점인데, 진짜 전문가들이 모여 한글기계화를 세벌식으로 제대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이대로 공동대표는 "공 박사는 학력과 간판보다는 성실성과 사람됨됨이를 더 중요하게 보셨던 분"이라며 "선생의 삶과 정신 속에 오늘날 우리사회의 병폐를 치료하고 잘 살 수 있는 길이 있다"고 강조했다.

"선생께서 돈을 아껴 쓰고 꼭 써야 할 곳에 값있게 쓴 분이었습니다. 옷도 신발도 헤져 못 쓸 때까지 쓰셨지만, 어려운 사람을 위해선 끊임없이 베푸셨습니다. 여든여덟 할아버지가 날마다 피시통신에 글을 올렸으면, 또래의 노인들이 한자만 숭배할 때 한글 기계화로 그 우수성을 증명하셨고, 늘 책상 앞에 '한글 사랑, 겨레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큼직하게 써 놓고 일하셨습니다."

"세벌식이야말로 정확하고 빠르며 간편한 한글 자판 방식"

고누소프트 박흥호 대표(전 한글과컴퓨터 부사장)는 이찬진씨와 함께 '아래아 한글' 개발에 참여할 때 공병우 박사의 도움을 받았던 일을 떠올리며 "공병우 박사님의 격려 속에 한글 기계화의 저변 확대에 소임을 어느 정도 했다고는 생각하지만 세벌식 보급엔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전했다.

"사실 공 박사님이 개발한 세벌식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고 빠르며 간편하게 한글을 쓸 수 있도록 한 자판 방식입니다. 실제 연습해 보면 훨씬 자연스럽게 쓸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박사님의 큰 뜻을 제대로 받들지 못했지만, 앞으론 그 뜻을 빛낼 수 있는 일에 작은 역할이라도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병우 박사가 창안한 세벌식 조합형 자판이 한글 제작 원리와 과학정신에 가장 적합할 뿐 아니라 가장 쉽고 정확한 한글 자판 형식이란 지적이다.

끝으로 유족 대표로 참가한 공병우 박사의 둘째 아들 공영태(공안과 원장)씨는 "아버님께선 컴퓨터에서도 반드시 세벌식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셨던 만큼 가장 기뻐하실 호칭은 그 무엇보다도 '세벌식의 고안자'일 것"이라며 "뜻 깊은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추모식 참석자들은 '공병우 박사 기념사업회'를 꾸려 공 박사의 삶과 정신을 이어받자고 결의했으며, 곧 준비모임을 꾸릴 계획이다. 아울러 2006년 공병우 박사 탄생 100주년 이전에 한글날 국경일 만들기 사업을 힘 있게 벌여나가기로 했다.

한글운동가 공병우 박사는?

▲ 고 공병우 박사
공병우는 1906년 평안북동 벽동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평양 의학강습소에서 의술을 배운 뒤 정규학교는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1926년 조선의사 검정시험에 합격했다.

1938년엔 국내 최초의 안과전문 병원 ‘공안과’를 세웠는데, 당시 눈병 치료를 받으러 왔던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과의 만남이 계기가 한글사랑의 외길을 걷게 됐다.

1947년부터 한글 타자기 연구를 시작해 2년 뒤인 1949년 고성능 한글 타자기 발명한 이래 1994년 매킨토시용 무른모 한손자판을 개발하기까지 평생을 한글기계화 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점자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서울 맹인 부흥원 설립하는 등 시각장애인 교육에 힘쓰기도 했다.

1959년부터 1977년까지 한글학회 이사를 지냈으며,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하여 한글 글자꼴과 남북한 통일자판문제 등을 연구했다. 바로 '자판 통일'에 대한 논의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공 박사는 결혼식을 낮에 하는 건 시간 낭비라며 반대했고, 청소 등 생활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문지방을 없애버렸으며, 사과 궤짝으로 침대를 만들어 쓰는 등 남다른 삶을 보여줬다. 또 며느리에게 폐백 인사 절하는 것은 집우치우고 악수나 한번 하자고 했던 일과, 일흔이 넘어 사진 공부를 하기 시작했던 것 등 여러 일화를 남겼다.

공병우 박사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컴퓨터 통신 ‘하이텔’에 한글기계화 운동과 세벌식 타자기의 장점을 알리는 글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올렸다고 회고한다.

1995년 3월 7일 공병우 박사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들은 "아무에게도 죽음을 알리지 말고, 쓸만한 장기와 시신은 기증하라"는 유언에 조용히 따랐다.

'고집쟁이'로 알려진 고인이 남긴 책으로는 자서전인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대원사, 1989년)와 사진집 <공병우 사진집 1호, 2호> 등이 있다. / 이민우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신문[참말로](www.chammalo.com)에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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