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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미국(미국인)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을 하면서도 때론 부러워하고 존경해마지 않는 사안이 몇 있다. 그 중 하나는 미국인들의 파격적인 입양이다. 피부색도 다르고 또 더러는 심신이 온전치 않은, 낯선 나라의 아이들을 데려다 마치 피붙이처럼 정성을 다해 키우는 미국의 가정을 볼 때 그런 생각이 든다.

또 하나는 천리 만리라도 찾아가 자국 군인의 유해를 발굴, 수습하는 태도다. 미군은 오래전에 해외에서 전사한 자국 군인들의 유해발굴과 신원확인을 위한 DNA검사, 그리고 수습를 위해 적지 않은 인력과 예산을 투자해 전담팀을 운용하고 있다. 가끔 외신을 통해 오래전에 해외에서 전사한 미군의 시신을 수습해 성조기로 덮어 고국으로 운구하는 모습을 볼 때 국적을 넘어 경외감마저 들게 한다.

잊을만하면 한번씩 터지는 소위 지도층 인사들의 미국국적 시비와 여유층 젊은 여성들의 원정출산 등이 사회적 논란으로 떠오를 때마다 쏟아져 나온 비판 가운데 하나가 이러다 나라에 위기가 봉착하면 누가 나서서 목숨바쳐 나라를 지키겠느냐는 것이다.

극도의 이기주의, 개인주의와 국적불명의 세계화 추세 등으로 예전에 비해 애국심이 희박해진 게 아니냐는 지적이 높다. 물론 이같은 주장에는 '파쇼적 애국주의'에 대한 강한 거부감이 없진 않다. 그러나 국적과 인종을 떠나 애국심은 여전히 가치있는 의제이다. 또 국가마다 자국민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국민교육에 물심양면으로 투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6.25 한국전쟁 발발 53주년인 지난 25일 국가유공자와 유족 등 22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온몸을 던져 나라와 동포들을 위해 헌신한 주인공, 그리고 그 유족들에게 국가원수인 대통령이 위로의 차 한잔, 점심 한 끼 대접하는 것은 지극히 마땅한 일이다.

노 대통령은 이날 오찬장에서 보훈업무 주무부서인 국가보훈처를 "장관급 부처로 승격해드리겠다"고 약속해 참석자들로부터 큰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이같은 약속에 대해 윤태영 청와대 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보훈처의 격상문제는 보훈처가 인수위 시절부터 줄곧 요구해왔는데 인원이나 기구의 확대 없이 부처의 격을 국무위원급으로 격상시키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윤 대변인의 설명을 보면 '보훈처 격상'은 업무영역 확대나 재조정과 같은 획기적인 변화는 없고 단지 수장인 국가보훈처장의 지위를 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만 격상하려는 것 같다. 이 자체로만 본다면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던 국가유공자들이 노 대통령의 '약속'에 대해 박수칠 것도 없어 보인다.

노무현 정부가 국가보훈 업무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접근하고자 한다면 보훈처장의 직위를 한 단계 높이는 식의 전시행정을 펼 것이 아니다. 각 부처별로 산재해 있는 보훈 관련 업무 전반에 대해 정밀진단을 통해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국민들에게 심어주는 방안을 모색해야할 것이다.

현 국가보훈처의 업무는 크게 보면 한국전, 월남전 등에서 희생된 전사자와 상이군인, 4.19 유공자, 그 외 국가유공자, 그리고 독립유공자에 대한 현창사업과 금전적 보상업무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또 삼일절, 광복절 등 국경일이나 각종 국가적 기념일 행사를 주관하는 것도 대개 보훈처의 일이다.

이처럼 보훈처는 정부부처 가운데 민족사의 정신사적 영역을 담당하고 있는 대표적인 부서다. 그러나 현행 보훈처의 업무 내면을 들여다보면 국민들에게 민족적 자긍심과 애국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특별한 사업은 찾아보기 어렵다. 특히 일반 국민들로부터 커다란 호응을 얻는 사업도 얼핏 눈에 띄지 않는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일상적 행사를 주관하고 '순국선열과 호국용사', 그리고 그 유족의 연금지급이 업무의 전부인 것처럼 보이는 면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이제 국가보훈 업무는 시대에 맞게 조정되고 강화돼야 한다고 본다. 다양한 형태의 국가유공자들의 공로를 기리고 또 이를 통해 후세들에게 나라사랑하는 정신을 고취시키려 한다면 현행 보훈업무는 다음 몇 가지 측면에서 일대 혁신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첫째, '형식주의'를 탈피하고 내실있는 국가 차원의 애국정신 고취 정책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사유에서건 국가를 위해 일하다 희생된 국민들에 대해서는 국가가 끝까지 돌봐주고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할 것이다. 우리 역시 한국전쟁, 월남전 등에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는데 과연 미군처럼 열과 성을 다해 국가가 예를 갖추었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인력을 대거 동원해 삼일절 행사를 성대하고 치른다고 순국선열에 대한 추념의 마음이 솟아나는 것은 아니다. 우선 역사교과서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순국선열과 그 후손들이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고, 또 그런 공로자나 후손들이 대접받는 사회를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게 산다는 얘기가 더 이상 나와서는 곤란하다.

둘째, 보훈처의 권위주의적 업무자세도 고쳐야 한다. 한 예로 독립유공자 선정을 받으려면 당사자나 그 유족들이 공적내용을 입증할만한 서류를 챙겨 보훈처에 접수토록 돼 있다. 독립운동가들과 사회의 반발로 이같은 관행은 다소 시정되긴 했지만 훈장받자고 제 손으로 공적내용 챙겨 서류신청하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보훈처가 광복회를 산하 기관 정도로 여기는 자세도 마땅히 고쳐져야 한다.

셋째, 이념적 폐쇄성에서 통일지향적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는 극도의 이념적 대립과 갈등을 겪어 왔다. 일제하 독립운동 공적은 분명하나 해방후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아직도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된 항일투사가 적지 않다. 민족사 차원에서 돌이켜보면 황산벌에서 최후를 맞은 신라 화랑 관창이나 백제의 계백 장군 두 사람 모두 충신이고 열사라는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최근 특별법 제정을 위해 수 년째 시위를 벌여오고 있는 민간인학살 문제도 보훈차원에서 접근해야할 문제라고 본다. 이들의 경우 국가에 대한 공로 여부를 논하는 것과는 별개로 국가의 변란으로 인해 희생된만큼 이들 역시 국가가 나서서 위령사업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한국전쟁 전후 전국적으로 수 백만이 목숨을 잃었는데도 그간 정부부처 그 어디에서도 이 일에 나서지 않았다면 그건 정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얘기다.

넷째, 유관업무의 통합, 조정이 절실하다고 본다. 현행 국가차원의 보훈업무는 보훈처 이외에 여러 곳에 산재돼 있어 효율적인 처리가 어려워 보인다. 우선 국가유공자에 대한 현창사업, 연금지급 등은 보훈처가 맡고 있으나 전몰 군경 및 국가유공자 안장 및 묘지관리는 국방부 산하 국립현충원(구 국립묘지)에서 관할하고 있다. 물론 이는 국립묘지가 전물군인을 주 대상으로 만들어진 연유이긴 하나 현재 국립현충원엔 이밖에도 국가유공자, 독립유공자 등이 안장돼 있는 만큼 보훈처로의 이관이 적절하다고 본다.

항일투쟁사와 함께 국민정신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천안 독립기념관의 경우 현재 문화관광부 산하기관으로 돼 있다. 그 이유는 독립기념관에 각종 전시물이 전시돼 있다고 해서 이곳을 일종의 '박물관'으로 본 탓이다. 또 명칭을 두고 최근 다시 논란이 되고 있는 전쟁기념관은 국방부 산하기관으로 돼 있는데 이 역시 비슷한 경우다. 그러나 이들 기관 역시 민족사 교육기관이라는 점에서 현 체제보다는 보훈처와의 연관성을 찾아보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논의의 범위를 좀더 넓힌다면 앞서 언급한 기관들과 함께 현 교육부 산하의 국사편찬위원회, 정신문화연구원까지도 망라해 부총리급의 별도 정부부처(가칭 '국가보훈원') 신설이 필요하다고 본다. 즉 국가차원의 보훈업무를 총괄하고 나아가 지식교육과는 별개로 건강한 민주시민을 길러내는 국민 정신교육기관이 이제는 필요하다.

지난 백년의 우리역사는 반목과 질시로 인해 동포끼리 가학적인 행태를 보여온 고통의 역사였다. 35년간의 외세지배 기간에는 친외세-반외세로 민족이 서로 나뉘어 싸웠고, 해방의 기쁨을 채 접기도 전에 남북전쟁으로 국토가 양분되고 아직도 그 이산의 상처를 치유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서 민족사를 거시적, 통합적으로 정리하고 화합의 기록으로 가꿔야 할 때가 되었다. 나아가 과거사 속에서 상처받은 국민들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고 이를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통합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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