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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홍련전은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민중소설이다. 권선징악의 교훈을 주고 있는 이 소설은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던 옛날 이야기의 단골 메뉴였고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으며 영화나 연극작품으로도 공연돼 우리에게는 매우 친숙하다.

계모에게 구박 당하고 급기야 죽임까지 당하는 장화와 홍련의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고 나중에 귀신이 되어 고을 원님 앞에 나타나는 장면에는 무서움으로 밤에 오줌을 누러 가지 못했던 추억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장화홍련전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실제 있었던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소설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장화홍련전은 조선 효종시대 평안도 철산부사 전동흘이 배좌수의 딸 장화와 홍련이 계모의 흉계로 원통하게 죽은 사건을 처리한 실력담을 토대로 쓰여진 고전소설이라는 것이다. 장화홍련전에 나오는 철산부사의 이름이 정동우 또는 전동우 등 여러 가지로 전해지면서 이견이 없지 않지만 학계에서는 전동흘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전동흘이 철산부사 시절 겪은 이야기를 그의 8대손 전만택의 간청에 의해 박인수가 1818년 섣달 초하룻날 쓴 것이라고 한다. 실제 한문본은 전동흘의 8대손인 기락 등이 1865년 편찬한 '가재사실록'과 '가재공실록'에 실려 있으며 국한문본은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 실려 전한다.

진안군 진안읍 가림리 일대는 장화홍련전과 깊은 관계가 있다. 장화홍련전의 무대는 평안도 철산이지만 전동흘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이 바로 가림리 일대이기 때문이다.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는 전동흘의 탄생에 대해 그의 어머니가 50이 넘도록 자식을 얻지 못하다가 한 시주승의 권고로 마이산에 정성을 들여 잉태하고 광해군 2년에 가림촌 한모퉁이 오막살이집에서 태어났다고 쓰여 있다.

은천마을은 천안 전(全)씨의 집성촌으로 조선초기 원가림마을에 살던 전대승(全大昇)라는 사람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으며 후에 최씨와 박씨 등이 함께 살면서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일설에는 전동흘이 출생지를 가림리 탄곡마을로 지목하고 있으나 바로 대승이라는 인물은 전동흘의 아버지로 은천마을이 어린시절 전동흘의 성장지였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전동흘은 고려 문종왕때 천안부원군 충민공 전락(全樂)의 원손으로 조선초기 호조판서를 지낸 대호군 전극례(全克禮)의 6대손이며 어렸을 적부터 성격이 대담하고 무예가 출중했다고 한다. 인조 2년에 서울에 올라가 월사 이정구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다가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15세의 나이로 지원병으로 출전했으며 인조 5년 정묘호란에 부친이 순절하자 고향에 안장하고 3년간 시묘하고 한때 고향에 머물렀다.

1636년에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남한산성 싸움에서 용맹을 떨쳤으며 삼전도 굴욕후 동궁과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가자 배종무관으로 동행, 청나라의 각종 정보를 파악해 조선의 군사전략 수립에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귀국해서는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했다가 효종이 등극하자 우암 송시열의 추천으로 40세가 되어서야 선전관 내삼청과 흥덕현감이 되었고 강원·충청·황해병사를 거쳐 포도대장과 훈련대장, 오위도총관까지 지냈다.

전동흘은 96세의 나이로 숙종 31년(1705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임금이 관리를 파견해 조문하고 지사(地師)를 보내 묘택을 잡아 장사를 지낼 정도로 애석해 했다고 한다.

장화홍련전은 전동흘이 철산부사로 재직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광국장군전동흘실기' 제 6회부터 제 9회까지로 구성돼 있다.

강선여향화입몽 혹후처가서성태(降僊女香花入夢 惑後妻假鼠成胎; 선녀가 내려오니 향기로운 꽃에 현몽하고 후처에 혹하니 쥐를 잡아 태라하도다)로 시작되는 장화홍련전의 이야기는 부임하는 철산부사들마다 원인도 모르게 횡사하자 전동흘이 철산부사를 자원해 장화와 홍련의 원혼을 풀어주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같은 전동흘의 이야기는 진안읍 가림대 일대에 살고 있는 후손들에 의해 전해오고 있으며 은천마을에서 마주 보이는 숯실산, 탄곡마을 입구 좌측 산기슭에 그의 선친(대승)과 조부(수감), 증조부(규)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어 전동흘의 일화와 흔적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특히 숯실산 묘택은 전동흘을 만들어낸 명당으로 유명하며 이와 관련된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정묘호란에 부친이 순절하자 시신을 수습해 고향에 내려온 전동흘이 유해를 엄장하며 장지를 구하던 중이다. 마령 가정리에 다녀오다 쉬는 길에 우연하게 지나던 노승과 상좌의 대화를 듣게 된다.

노승이 "천하에 숨어 있는 명당이 사람을 기다리니 뉘 능히 적선과 덕을 백년 쌓아 이 같은 큰 땅을 얻으리오"하며 상좌에게 "너는 어딘 줄 아느냐"고 물었다. 이에 상좌가 "한 곳은 당대에 장신이 날 곳이요, 한 곳은 삼대 뒤에 상신이 날 곳입니다"라고 답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전동흘이 십여리를 뒤쫓아 가며 간청한 끝에 노승이 도술로 종이를 나비로 만들어 날린 두 곳 가운데 한 곳을 선택, 묘를 쓰게 됐다는 것이다.

이밖에도 수군훈련에서 90여명의 인명을 구한 것과 청나라 사신을 혼내주고 광국장군 칭호를 얻은 일화 등 전동흘의 애국충정이 담긴 많은 이야기들이 전한다.

은천마을을 중심으로 가림리 일대에 살고 있는 전씨 문중에서는 이 같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광국장군전동흘실기'에 한글 토씨를 달아 후손들에게 나눠줘 자랑으로 삼으며 그의 충절과 효심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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