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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골의 단풍은 삼홍이라 하여 지리산 8경에 속할 정도로 유명하다.
ⓒ 구례군청
소슬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벌써 이곳 남녘에도 산 언저리가 붉게 물들고 있다. 엄청난 비를 뿌려대던 지난 여름은 이 산하 곳곳에 상처만 남겨놓고 소리도 없이 떠났다.

시간만 나면 지리산을 찾는 나로선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준 가을이 반갑기만 하다. 아무 곳이나 자리를 깔고 누워도 보이는 청명한 하늘도 좋고, 귓불을 만지작대는 바람을 느끼는 것도 즐겁다. 후두둑 떨어져 내린 알밤을 주워 손톱으로 껍질을 벗겨 오도독 깨물어 먹는 맛도 일품이고, 산사에 들러 꼬리뼈까지 시리게 만드는 맑은 물 한사발 들이키는 것도 재미가 있다.

하지만 가을엔 역시 단풍놀이가 제격이다. 눈을 뗄 수 없는 나무들의 화려한 패션쇼가 가장 큰 즐거움이다. 산이야 사시사철 좋지만 그 중에서 제일을 꼽으라면 아마 단풍이 물드는 이 때가 아닐까 싶다.

요즘엔 지리산과 가까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맙기만 하다. 생각 같아선 아예 산 속에 들어가 살고 싶지만 그래도 주말이면 부담 없이 찾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복에 겨운 일이다.

어디 지리산 뿐이랴,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섬진강이 있고, 바닷바람이 생각나면 1시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남해바다가 펼쳐져 있으니 더 이상의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산수절경은 다 가진 셈이다.

피아골에서 죽어간 의병장 고광순과 30인 의병

▲ 이달의 독립 운동가 고광순 의병장. 그는 1907년 10월 연곡사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 국가보훈처
피아골의 단풍은 '지리산 8경' 중 하나다. 삼홍(三紅)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피아골 단풍. 산이 붉게 물들어 산홍(山紅)이요. 물빛에 비친 붉은 빛이 아름다워 수홍(水紅)이고, 피아골에 들어선 사람조차 단풍 취하니 인홍(人紅)이라 하여 이 모두를 합쳐 삼홍이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곳은 표고막터에서 삼홍소 사이 1km 구간인데 이곳의 절경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다. 피아골의 단풍이 다른 곳 보다 절절히 아름다운 것은 모두 그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의병장 고광순(高光洵·1848∼1907). 연곡사 입구의 안내문을 보면 고광순 의병장의 죽음과 일제 만행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해 놓았다. 그냥 흘려 넘길 수도 있겠지만 10월의 독립운동가가 바로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고광순 의병장이니 피아골 단풍을 보러오는 관광객들은 단풍에만 취하지 말고 연곡사 동백꽃 숲속에 자리한 그의 순절비에 새겨진 글귀도 한번 되새겨 보아야 한다.

"의를 보고 몸을 버림은 종기에 침 놓은 것 같고(見義捨身如大腫一針),
이익 따라 몸을 달림은 도둑과 같다(見利殉身卽穿踰一轍)"

이 글을 항상 가슴 속에 품고 있었던 고광순 의병장은 1895년 을미사변과 1905년 을사조약 직후 의병을 일으켜, 1907년 의병장으로 추대됐다. 전북 남원, 전남 화순 등에서 일본군과 싸워 혁혁한 전과를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결국 그해 피아골 연곡사에서 일본군에 의해 포위돼 전사하고 만다.

'불원복(不遠復)' 세 글자를 세긴 태극기를 앞세우고 '축예지계(蓄銳之計)'를 세워 일제에 대해 결사항전을 다짐했던 그의 꿈은 연곡사와 함께 불태워지고 말았다. 전력의 약세를 지리산의 힘을 빌려 역전시켜보려 했던 노(老) 의병장의 기개는 그곳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우연히도 그가 전사한 것은 단풍이 절정에 달하는 10월이었다. 피아골의 붉디붉은 단풍을 바라보며 그와 30인의 의병들은 일본군의 총탄에 선혈을 쏟아야만 했다. 비통함에 무너지는 몸을 다시 일으켜 세웠으리라.

빨치산의 피가 흐르는 피아골

▲ 연곡사 동부도탑. 나말여초 형식인 이 부도는 우리나라에서도 가장 화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보 53호로 지정돼 있다.
ⓒ 조경국
의병들의 피로 물들었던 피아골은 해방 후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다시 피바람이 몰아친다.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좌익 게릴라들이 지리산으로 숨어 들었고, 1955년까지 국군의 토벌작전이 계속됐다.

남한에서 빨치산의 수가 가장 많았던 시기는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2년으로, 당시 6000여 명이 남한 각지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지리산은 가장 큰 활동무대였고, 그만큼 후유증도 심했다.

토벌대와 빨치산의 전투로 인한 피해 뿐 아니라 많은 양민들이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제물이 되어 학살됐다. 당시 군경으로부터 죽음을 당한 인골들이 지금도 가끔 발견되고 있고 당시 이야기를 어르신들로부터 생생하게 들을 수도 있다.( * 참고로 필자의 할아버지 고향이 산청군 시천면이다.)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리산의 피로 얼룩졌고, 피아골은 그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군경과 빨치산을 포함해 무려 2만여 명의 젊은 목숨들이 바로 피아골을 비롯한 지리산 기슭에서 숨졌다. 특히 피아골은 한국전쟁 직후 빨치산의 가장 큰 아지트로 토벌대와 빨치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끊임없이 벌어진 곳이다.

어떤 이들은 피아골의 이름도 죽어간 이들의 피가 골짜기를 붉게 물들여 붙여졌다고 하지만, 실제 피아골의 이름은 옛날 이곳에 오곡 중 하나인 피를 많이 재배했던 피밭골이 있었는데, 이것이 나중에 '피아골'로 바뀐 것이다.

하지만 그 이름에는 피아(彼我) 구분 없이 처절하게 피 흘리며 죽어갔던 이들의 넋이 깃들어 있는 것이 아닐까.

가릉빈가의 슬픈 울음소리 들리는 곳

한적한 연곡사 뒤편을 조금만 올라가면 화려한 부도를 볼 수 있다. 신라말 혹은 고려초 양식이라고 전해지는 이 부도에는 불국토에서만 산다는, 반은 인간 반은 새의 모습을 한 '가릉빈가'가 양각돼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동부도 탑에 양각돼 있는 가릉빈가. 반인반조의 모습을 한 가릉빈가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법을 전한다고 한다.
ⓒ 조경국
국보로 지정돼 있어 연곡사를 찾는 이들은 한번은 보고 간다지만 부도의 화려한 조각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하긴 피아골 맑은 물이 어서와 발을 담그라고 요란스레 부르는 지라 마음잡고 찬찬히 부도를 살펴보는데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곳저곳 많은 절터를 다녀보았지만 이보다 더 아름다운 부도를 본 적이 없었다. 보통 부도라고 해봐야 두루뭉실한 종 모양이 대부분인데 연곡사 부도는 흠잡을 데 없는 균형미 뿐 아니라 범접할 수 없는 세련미까지 갖추고 있었다.

날렵한 팔각 지분에 층층마다 새겨진 사천왕, 나한상, 각종 불구들.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가릉빈가다. 절에서 볼 수 있는 동물들은 용, 토끼, 거북, 잉어 등 다양한 편인데 가릉빈가처럼 반인반조(半人半鳥)의 형상을 한 것은 보기가 쉽지 않다.

연곡사 부도 뿐아니라 상원사 동종에 새겨진 비천상이나 은해사 백홍암 극락전 불단의 가릉빈가 공양상이 유명하다는데 아직 책으로만 봤을 뿐이다.

가릉빈가는 보통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아름다운 목소리(妙音)로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범부들을 깨우친다고 한다. 설산에서 태어나 극락정토를 날아다녀 극락조라고도 불리며 사천왕과 함께 움직인다고 한다. 연곡사 부도에도 사천왕상이 새겨진 바로 하대에 가릉빈가가 자리잡고 있어 이런 설을 뒷받침 해준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울어주지 않았던 피아골에서 죽어간 넋을 위해 1천년이나 연곡사에서 부도를 떠나지 않았던 가릉빈가의 슬픈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원래 가릉빈가의 울음소리는 히말라야 설산처럼 맑고 청명하다지만, 여기 단풍 물드는 피아골에서는 선홍빛 피울음소리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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