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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 베를린에서는 50만 명이 몰려든 대대적인 거리 축제가 있었다.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 1969년 6월 말 뉴욕의 크리스토퍼 스트리트의 동성애자 바인 스톤월 인에서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경찰들의 폭력적인 수색이 있었다.

이에 항의하여 일어났던 동성애자들의 역사적인 시위를 기리고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주장하기 위해 1970년부터 시작된 이 거리 축제는 독일에서는 1979년 시작되었으며, 이제 국민 축제의 규모로 크게 발전하여 베를린을 유럽 동성애자들의 중심지로 만들고 있다.

금년에 23회를 맞이한 유럽 동성애자들의 축제. 이 날 참석한 동성애자들의 티셔츠에는 온통 보베라이트 신임 베를린 시장의 커밍아웃 선언인 "저는 동성애자입니다. 그건 나쁘지 않습니다"가 찍혀 있었다.

이 날 '동성애자이기도 한 베를린 시장' 보베라이트가 참석한 것은 당연하기도 하지만, 연방하원 의장이나 녹색당 당수, 연방환경장관, 연방가족장관 등 거물 정치인들이 참석한 것이나 슈뢰더 총리가 축전을 보내온 것 등 모두가 예사롭지 않다.

이번 크리스토퍼 스트리트 데이에 그 어느 때보다도 언론과 정치권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이러한 정국의 변화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또 다른 요인으로는 금년 축제가 독일 극우파에 대한 반대를 모토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번 축제에 높이 걸려진 표어는 "우리는 우파에 삐딱하게 반대하는 퀴어다(Wir stellen und que(e)r gegen Rechts)"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금년에 처음으로 '시민의 용기'라는 상을 제정하여 파울 슈피겔 재독 유태인협회 회장을 비롯한 4개 개인과 단체에 수여하기도 했다. 독일의 유태인을 대표하는 슈피겔 회장은 동성애자들과의 연대에 특히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그는 동성애 파트너쉽 인정을 지지해 왔고, 또한 나치 시대 동성애 희생자 추모비 설립을 적극 찬동하고 있는 것이다.

형법 175조

독일에는 현재 이런 성격의 추모비가 세 곳에 있다. 프랑크푸르트, 쾰른, 베를린. 그러나 모두 민간 차원에서 설치된 것이다. 국가사회주의 정권이 국가의 이름으로 저지른 죄악이라면 이에 대한 반성 역시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러한 상식적인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독일에서 동성애자에 대한 형사상 처벌 조항이 최종적으로 사라진 것은 언제일까?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1994년에 와서야 동성애자 처벌조항인 형법 175조가 사라졌다. 그리고 2000년 12월에 이르러서야 연방하원이 나치에 의해 탄압 받은 동성애자들을 공식 복권시켰는데, 이는 이 때야 이들에 대한 나치 법관들의 판결은 무효화되고 배상을 위한 재단 설립이 추진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1919년 독일의 첫 번째 공화국으로 등장하였지만 1933년 히틀러의 집권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체의 동성애자들에게는 그리운 시절이다. 이 시기에는 동성애자에 대한 국가의 차별적 대우가 거의 없었다. 19세기 내내 동성애자 권리 운동의 요람이기도 했던 베를린은 이 시기에 스스로 유럽 동성애의 중심지로 정체를 드러냈다.

전세계 그 어느 도시에서도 동성애자를 위한 바와 클럽들, 협회들이 그렇게 활기를 띤 적은 없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베를린의 의사이며 스스로 동성애자이기도 했던 마그누스 히르쉬펠트는 성 과학 연구소를 개설, 동성애를 연구했다. 그는 '제3의 성'이라는 개념으로 동성애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했는데, 이는 동성애 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나치의 동성애자 탄압

그러나 히틀러가 총통으로 등극한 운명의 1933년. 모든 것이 변화했다. 나치는 우선 히르쉬펠트의 책부터 분서하고 그의 연구소를 파괴했다. 그 후 나치는 남성 동성애자(게이)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로 19세기 등장했던 형법 175조를 강화해서 동성애를 국가반역죄로 규정했다.

이 법 조항은 동성애자에 대한 체포와 강제수용소 수용, 강제 거세 등의 온갖 박해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이 법 조항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도 의연히 살아 남아 동성애자들을 범죄자로 만들다가 1994년에야 완전히 형법에서 제거되었다.

나치 시대에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5만 여명이 감옥으로 가게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 많은 동성애자들이 나치에 의해 체포되었던 것은 바이마르 시대를 통해 모두가 공공연하게 노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들 중에서 약 1만 5천명은 실형을 다 산 후에도 소위 보호관찰을 위해 강제수용소에 갇히게 되었다.

여기서 동성애자의 수인복에는 분홍색 징표가 달리게 되었고 이들은 죄수들 중에서도 가장 저급한 범죄자로 취급받았다. 부헨발트 강제수용소에서는 비르네트라는 의사에 의해 생체 실험을 당하기도 했고, 또한 강제 거세 시술을 받기도 했다.

섹슈얼리티는 나치에게는 개인의 사적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의 인종주의적 인구정책의 한 부분이어야 했다. 나치 친위대(SS) 대장이던 하인리히 히믈러는 1937년 "게이는 국가의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실 나치주의자들 내부에서도 동성애는 드문 일이 아니었다.
이들은 '강한 성(性)'인 남성들만의 연대라는 취지 하에서 병영 등에서 공공연하게 동성애를 즐기기도 했다. 나치 친위대와의 권력 다툼에서 밀려나서 해체되었던 나치 돌격대(SA)의 에른스트 룀 대장 역시 동성애자였으나 1934년 6월 권력투쟁 과정에서 살해되었다.

룀의 피살로 동성애자들은 나치 치하에서 자신들이 더 이상 그 전과 같이 안전할 수 없음을 알았다. 모든 동성애자를 위한 술집, 잡지, 모임 등은 즉각 금지되었다. 동성애자의 모임과 같다는 평을 얻을 정도이던 나치 돌격대는 이제 나치 친위대에 의해 권력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나치 친위대는 나치주의자 중의 동성애자들을 일제히 체포해 강제수용소에 보냈고 이들은 대부분 '도주 중 사살' 되었다.

1935년 형법 175조가 강화되어 모든 종류의 남성 간의 '부도덕'은 처벌될 수 있었다. 이제 남성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소위 '음란한 시선'만 보내도 체포될 수 있었다. 그러부터 1년 후 "동성애와 낙태와의 전쟁을 위한 제국본부"가 설치되었고, 1937년과 1938년에는 이미 동성애로 처벌 받은 적이 있는 사람들에 대해 특별 감시조치를 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1940년부터는 동성애자는 반드시 강제수용소로 가도록 의무화되었다.

이러한 동성애 탄압은 소위 '건전한 시민층'의 지지를 얻으려는 나치의 인기주의 정책이기도 했지만, 나치의 병적이던 '민족의 위생'에의 집착 때문이기도 했고, 또한 남성적인 파시스트 국가가 동성애로 허약해질 것이라고 두려워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동성애자 나치 희생자 추모비

그러나 이러한 혹독한 나치의 박해에서 살아남은 동성애자들은 2차대전 종전 이후 1959년까지 겨우 14명만이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이 형법 175조 때문이었다. 이들은 전후에도 나치 피박해자로서 인정을 받거나 재정적으로 피해배상을 받기는커녕 여전히 동성애자라고 손가락질을 받고 법적 처벌을 두려워하면서 나치 시대의 박해 받은 사실을 쉬쉬해야 했다. 동성애자에 대한 처벌은 동독에서는 1957년, 서독에서는 1969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제야 이러한 역사의 부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의 일환으로 나치에 의해 박해받은 동성애자들을 추모하는 기념물 설치가 논의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 년 간 독일 사회는 베를린 한가운데 유태인 대학살 추모비 건설 문제로 전사회적인 토론을 겪었다. 현 국회의사당 근처에 설립될 이 유태인 대학살 추모비 부근에 나치 박해 동성애자 추모비도 건립할 것이 고려되고 있다.

아직도 히틀러의 '손자'들인 독일 극우파들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독일 신나치 내에서 과거 나치 돌격대와 나치 친위대의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80년대 신나치의 새로운 지도자로 각광받았던 미하엘 퀴넨은 나치 돌격대장 에른스트 룀의 계보를 잇고 있는 동성애자인데 1991년 에이즈로 사망했다.)

그러나 이러한 동성애자에 대한 적대감은 나치들의 머리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동성애자들의 90%가 언어적, 심리적,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으며 물리적 폭력을 당한 경험이 있는 동성애자도 20%에 달했다.

베를린에 세워질 동성애자 박해 기념비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사회적 불관용에 대한 지속적인 경고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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