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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사망 사고 10여 시간 뒤

현대 역사의 어떤 이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이라고 해서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는 영웅이 되었지만 2001년 한국에서는 자유가 아니면~~! 이라고 외치기도 전에 장애인 할머니 한분이 장애인 수직형 리프트와 함께 추락하여 비명 횡사해야 했다.

설날 연휴에 터진 이 어처구니 없는 사건은 설날 연휴라는 절묘한 타이밍 때문에 매 시간 정시 뉴스마다 라디오에서 소식이 흘러 나왔지만 장애인들에게조차 무슨 일일까 할 정도로 사람들을 둔감하게 만들었다.

주요 신문들은 연휴가 끝나야 나올 수 있으니 이미 그 때는 잊혀진 사건이 될 위험이 높고 방송 뉴스는 대개가 머리와 꼬리가 짤려 편의시설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태의 심각성이나 사건 개요를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였다.

오마이뉴스에 에바다 소식과 장애인 관련 기사를 쓰고 있던 나는 이런 안타까움에 라디오 뉴스가 나온 바로 다음 인터넷에 들어가 연합뉴스 등의 속보들을 검색했으나 라디오에서 방송된 내용 이상은 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방송사마다 사건 경위와 용어, 피해자의 프로필이 제각기 달라 사건 피해자에 대해 정확한 인적상황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멀쩡한 수직형 리프트가 주요부품인 케이블이 끊겨 안에 타고 있던 노인 부부중 할아버지는 크게 다치고 할머니가 사망한 것도 심각했지만 정작 기사화가 필요했던 것은 관계당국인 철도청과 역관계자가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할머니가 사망하지 않았다면 사건 자체가 아예 드러나지 않을 뻔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수직형 리프트를 탔던 할아버지, 할머니의 단순 실수로 매듭지어질 사건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반인들의 사건의 이해가 부족하여, 이 오이도역 참사를, 어느 장애인 노부부의 개인 실수로 빚어진 사고로 치부하려는 분위기가 짙은 상황에서 밀착 관련 기사는 필수적이었지만 미약하나마 언론에 알려진 것도 사건이 발생한 지 이미 10여 시간이 지난 뒤였고 사건 현장도 경찰 조사없이 완전 복원된 뒤였던 터라, 직접 오이도역 현장 방문 기사밖에는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다음날 노들 장애인야학 박경석 교장이 현장으로 급히 달려갔고 유가족부터 만났다.

이미 다른 취재로 체력을 소비한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실시간 전화 중계로 기사화 했다. 그 과정에서, 사고가 발생한 4호선 오이도 역은 지난 2000년 7월 28일 엘리베이터를 설치 개통되었으며 휠체어 장애인과 보호자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3인용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한 수직형리프트 외곽엔 사고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감시용 카메라가 바로 매표소와 연결되어 있으며 추락할 당시 리프트 본체가 지면에 떨어지는 소리가 오이도역 전체에 크게 울렸다는 증언도 확보했다. 그와 함께 철도청 관계자가 언론을 상대로 사실을 왜곡하려 했다는 것도 역 관계자의 입을 통해 들었다.

추락 사고가 발생하자 역무원들에 의해 119에 신고되었고 그들은 인근 시화병원에 호송되었다가 그 곳에서 감당하지 못해서 인천 길병원으로 다시 옮겨졌으며 박소엽 할머니는 길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도중에 숨졌고, 고재영 할아버지는 응급치료만 받고 구정으로 인해 당직의사가 없는 가운데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었다.

박경석 씨는 오이도 역에서 인천의 길병원을 달려가 유족들에게서 상황 이야기와 대책을 이야기하였다. 유족들은 사고가 난 후 10시간이 지난 후에야 길병원에 도착하여 갑자기 당한 사고에 영문이 뭔지 모르고 우왕좌왕하고 있었고, 그동안 송산엘리베이터 직원들만 급하게 달려와서 만나보았고 관계당국은 상황 파악만을 하기 위해 왔다갔다 하다가 하루가 지난 23일에야 철도청의 수도권전철운영단의 단장이라는 사람이 사고대책본부를 만들었다고 하면서 유족들에게 어떤 보상을 원하느냐만 묻고 내일 다시 오겠다고 하면서 갔다

유족들은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했고, 장애인단체에서는 함께 간 노들장애인야학이 처음 찾아왔다고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많은 질문을 했다. 이에 주무관청인 철도청이, 사건 진상규명은 외면한 채 유가족과 사망보상에만 급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이와 아울러 시공책임자인 철도청이 장애인 관련 시설물에 대한 인식이 턱없이 부족했음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달려라 목발맨! 오이도역 추락사고에 숨겨진 이야기

오이도역 대책위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이번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루트가 없었기 때문에 취재와 진상규명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오이도역은 찾아갈 때마다 공식기자증이 없다는 이유로 문전박대를 당해서 사실확인을 못해서 곤란했다. 그래서 대안으로 찾은 것이 인터넷이었다. 무엇보다 오이도 역에서의 장애인 관련 시설물 설치과정과 이용자의 특성, 그리고 직접 설치한 회사의 정보를 지하철 이용 게시판과 뉴스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었다.

먼저 오이도역이 정동진과 마찬가지로 바다에 인접해 이용자들이 많아서, 이번 사고가 발생한 수직형리프트처럼 하루 이용자 100명 정도를 소화할 수 있는 케이블형 수직리프트 설치가 과연 타당했는가가 의문이었다. 설사 일반인에게 리프트 이용을 개방한 것을 장애인 시설의 보편성 획득을 위해서 였음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인터폰으로 연결되어 있고 감시카메라까지 설치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역무원이 동행하지 않은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1999년, 시공업체인 특수엘리베이터 전문 '송산' 사장인 김운영(39) 씨는 신문 인터뷰에서 “제일 중요한 건 역시 품질이죠. 장애인이나 노약자가 다치면 어떡합니까”라고 한 적이 있다.
“우리가 가진 기술이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보람"이라던 이 업체의 수직형리프트가 노약자인 장애인 할머니를 죽게 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한 3일만에 유가족과 1억7000만원에 합의하고 그 합의금 전부를 '송산'에게 전액 부담씌운 철도청의 처사 역시 책임회피와 직무유기라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또한 이 새로 개통한 수직형 장애인 리프트는 철도청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 시범적으로 시공한 것으로 이후 연차적으로 서울과 수원, 인천지역 96개 주요 역에 설치된 계단부착형 리프트 340여개도 수직형으로 교체할 예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우리나라 유수의 건설 시공업체가 참여, 부정과 뇌물 수수에 대한 의심도 피할 수 없었다.

사건 발생 일주일만에 장애인 시민단체로 구성된 오이도역 대책위가 구성되어 조직적인 대응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거주이전의 기본적 국민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통금시대에 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덧붙이는 글 | 목발맨의 오이도역 취재수첩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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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학생지원네트워크(eduable.jinbo.net) 사무국장을 맡아 장애인들의 고등교육기회확대와 무장애배움터 실현을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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