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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요하
23개 상패... 선친 모친 상패 소중

우리 집 거실 진열장에는 갖가지 '패(牌)'가 꽤 많다. 진열장만으로는 부족하여 일부는 책장 안에도 놓고 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처음으로 헤아려 보니 정확히 23개나 된다. 감사패, 공로패, 기념패, 사은패, 상패, 위촉패, 추대패 등등이다.

갖가지 패를 진열해놓은 것이 좀 쑥스럽긴 하지만, 패를 만들어 공식 석상에서 내게 수여해 주신 이들의 뜻과 정성을 생각해서 잘 보관하고 있다. 갖가지 패들 중에서 '상금'을 결부시킬 때 가장 상위 격인 것은 아무래도 1999년에 충남도지사로부터 받은 '충청남도문화상' 상패일 것 같다.

@BRI@그리고 가장 특이한 것은 2004년 태안천주교회 40주년 기념행사 때 구본국 현 주임 신부님(직접 수여해 주신 이는 유흥식 당시 부교구장 주교님)에게서 받은 '태안천주교회 공소시절 최초 견진자' 기념패일 것 같다.

진열장 안의 패들 중에는 선친과 모친께서 받으신 패도 하나씩 있다. 선친은 1980년 회갑연 때 당시 윤세병 신부님에게 공로패를 받으셨고, 모친은 2004년 태안천주교회 40주년 기념행사 때 '태안천주교회 최장기 신앙생활자' 기념패를 받으셨다. 선친이나 모친이나 평생을 통틀어 단 한번 받으신 '상'이어서 나는 두 분의 패를 더욱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선친께서는 3년 중퇴로 마감한 보통학교 시절 시험 때마다 전교 1등을 하셨다고 하는데, 상장 같은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우리 집 거실에 최근 또 하나의 패가 자리하게 되었다. 지난 11일 저녁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로부터 받은 공로패가 그것이다. 그 패를 거실 책장 안에 놓고 보니 선친과 모친의 패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가장 값지고 멋진 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동기생간 나이차 4-5년... 벌써 환갑잔치 열기도

나는 태안초등학교 제47회 졸업생이다. 1960년에 졸업했다. 태안초등학교는 묘하게도 학생들의 출생 연도와 기수(期數)가 일치한다. 1947년 출생들은 47회이고, 48년 출생들은 48회인 식이다. 그런데 48년 출생인 나는 47회가 되었다. 2월 23일 출생이라서(아버지는 내 음력 생일을 그냥 양력으로 기입을 하신 듯하다), 3월 1일을 기준으로 하는 취학연도 탓에 앞쪽으로 붙게 되어 47회가 된 것이다.

태안초등학교 제47회는 역사상 가장 학급수가 많았던 기수로 꼽힌다. 6·25사변으로 취학 적체 현상이 빚어졌다가 한꺼번에 입학을 한 탓이다. 무려 8개 반이나 되었고, 한 학급의 학생 수는 60명 정도였다.

8개 학급 중에서 앞으로 5개 반은 남학생 반이고, 뒤로 3개 반은 여학생 반이었다. 오늘날처럼 남자와 여자를 섞어서 학급을 편성하는 일은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처럼 학년이 바뀔 때마다 학급 편성을 다시 하는 것이 아니어서, 입학을 할 때 1반이 되면 졸업을 할 때까지 1반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오로지 4반이다(내가 '4'라는 수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에는 초등학교 6년 동안의 인연 탓도 있지 싶다).

6·25사변으로 취학 적체 현상이 빚어졌다가 한꺼번에 몰린 탓에 47회는 특히 학생들 간의 나이 차이가 가장 심했다. 2∼3년 차이는 보통이고, 4∼5년 차이가 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막내였다. 정확히 제 나이에 입학을 한 것도 아니었다. 겨우 며칠 상간으로 앞의 취학연도에 붙은 탓에 조기에 입학을 한 셈이었다.

나는 요즘 20여 명의 초등학교 동기들이 함께 하는 '신우회'라는 이름의 친목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종종 회원의 환갑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지난 11일의 월례 모임에서도 환갑 먹은 한 친구에게 축하를 해주었다. 이제는 이미 환갑을 지낸 친구들이 훨씬 많다. 아직 환갑을 먹지 않은 친구들은 몇 명 남지 않았는데, 그들 중에서도 내가 맨 마지막으로 환갑을 먹을 것 같다.

12인승 승합차로 술 마신 친구들 '택배'

동기들의 수가 유난히 많은 탓이기도 하겠지만, 47회 동기들의 친목 모임이 3개나 된다. 가장 오래된 모임은 '청우회'라는 이름의 단체로 청년 시절에 만들어졌다. 나도 그 모임의 창립 멤버였는데, 청년 시절 몇 년 동안 객지 유랑생활을 한 사정과 관련하여 탈퇴를 했다. 다음으로 '농우회'라는 모임이 만들어졌다. 농사를 짓고 사는 동기들이 만든 단체다. 마지막으로 생긴 단체가 '신우회'인데, 현재 4년째 운영을 하고 있다.

신우회는 청우회나 농우회와는 달리 여자 동기들도 참여한다. 전체 22명 회원 중에서 여자 회원이 7명이나 된다. 모임은 한마디로 재미가 넘친다. 정식 회의를 할 때는 하나같이 진지한 태도로 품위를 유지하지만(이동규 회장은 늘 정장 차림으로 참석하고, 회의를 할 때는 벗었던 저고리를 다시 입는다), 일단 회의가 끝나면 너나없이 완전히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간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로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지없이 좋다. 배꼽을 잡고 웃는 일이 많다. 하지만 나는 동심을 반추하며 함께 즐기기는 하되 동기들이 대부분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예의를 깔고서도 얼마든지 자리를 즐길 수 있음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성인병들을 관리하며 사는 신세라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다. 맥주 한 컵이나 소주 한 잔이 정량이다. 대개는 소주 한 잔을 놓고 병아리 눈물만큼씩 홀짝거리며 술잔을 유지한다. 과거에 두주불사했던 사람이니 그런 식으로라도 술잔을 유지하는 것이 슬프고도 좋다.

내가 동창들 모임 자리에서 술을 많이 마시지 않는 것은 건강 문제 때문만이 아니다. 12인승 승합차를 갖고 사는 탓이기도 하다. 모임 자리가 끝나면 친구들을 내 차에 태우고 운행을 해야 한다. 읍내 중간 중간에 친구들을 내려주고, 근흥면 두야리로 가서 친구 세 명을 내려준다. 나는 그것을 '택배'라고 부른다.

내가 6Km 거리인 근흥면 두야리까지 친구들을 택배해주는 것은 모임 초기부터 자청을 한 일이다. 그 시오리 길은 별로 먼 길이 아니다. 친구들이 초등학생 시절 책보를 허리에 두르거나 어깨에 메고 필통 속에서 철렁철렁 연필 뛰노는 소리를 장단 삼아 아침마다 학교까지 마라톤을 한 길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길을 걸어갈 수가 없다. 자동차가 가뭄에 콩 나듯 귀하던 1950년대가 아니다. 수많은 차량이 밤이나 낮이나 쌩쌩 달리는 아스팔트길이다. 시절이 좋아지고 길이 좋아져서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일종의 아이러니다.

친구들 중에는 농사에 필요한 트럭을 가지고 있는 친구도 있지만 한 달에 한 번씩 갖는 동창 친목 모임에 차를 갖고 나오게 할 수는 없다. 버스는 이미 끊어졌더라도 택시를 탈 수 있지만, 태안 읍내에서 사는 친구들과는 달리 두야리 친구들이 모임 때문에 매번 택시비용을 들인다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 뭔가 불공평하고 억울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모임 날마다 근흥면 두야리 친구들 택배를 자청했고, 그 일을 4년째 계속하고 있다. 회원들 중에는 서산에서 음식점을 하는 여자 친구도 있어서 가끔 서산에서 모임을 갖는데, 그때마다 내 승합차는 더욱 유용하다. 이래저래 나는 친구들에게 좋은 구실을 하는 셈이다.

25년만에 귀향한 친구, 회칙 깨고 모임에 받아들여

운전봉사 때문에 '신우회' 모임에는 더욱 빠질 수가 없다. 평일미사 참례를 중심에 놓고 생활하는 고로, 붙박이 모임 날인 11일이 저녁미사 요일과 겹치면 미사 후에 늦게라도 꼭 참석한다. 아무튼 그 운전봉사를 거르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다.

지난 10일 아내와 함께 20주년 결혼기념일 나들이를 하면서도 11일 저녁의 신우회 모임을 잊지 않았다. 처음에는 2박 3일 정도 나들이를 할 생각이었는데, 신우회 모임 때문에 1박 2일로 축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11일 오후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11일 저녁의 신우회 모임만 생각했지 그 날의 모임 자리에서 '공로패'를 받으리라는 것은 전혀 알지 못했다. 전혀 뜻밖이었다. 물론 지난달 모임에서 논의를 거쳐 결정된 사항이지만 그 일이 곧바로 이번 달 모임에서 실행될 줄은 몰랐고, 나는 지난달의 그 논의조차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내가 공로패를 받는다는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옷도 좀 제대로 갖춰 입고 카메라도 가지고 갔을 텐데, 점퍼 차림으로 간 것이 친구들에게 미안하고, 카메라를 휴대하지 않은 것도 못내 아쉽다.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로부터 공로패를 받는다는 것이 어디 흔한 일인가. 참으로 의미 있는 장면일 텐데, 그 장면을 담아놓지 않은 것이 정말 아쉽다.

우리 신우회는 지난 11일 모임에서 매우 뜻 깊은 결정을 하나 했다. 25년만에 귀향한 한 친구의 참여 의사를 놓고 진지하게 논의를 한 끝에 그 친구를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회칙에 22명 인원 제한 규정이 있음에도….

객지 생활 25년만에 나이 먹은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동창을 따뜻이 맞아주어야 한다는 의견이 모두에게 공감을 주고 일치를 낳는 것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절로 내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나이 먹어 가면서 향리에서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과 친목 모임을 함께 하며 한 달에 한 번씩 정겨운 시간을 갖는 것은 정말 즐겁고도 행복한 일이다. 내게 질감 좋은 즐거움과 행복감을 선사하면서 귀한 '공로패' 선물까지 안겨준 동창 친구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고마운 마음을 표하며 그 공로패에 새겨진 말을 독자 여러분께 소개한다.

"귀하께서는 (태안초등학교 제47회 동창친목회) 신우회 회원으로서 상호 우정을 돈독히 하는 일에 앞장서 왔으며, 특히 단체 이동과 교통이 불편한 회원들을 위한 차량 봉사에 힘써 전 회원의 존경과 칭송이 크므로 그 공을 높이 사 이 패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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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태안 출생. 198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추상의 늪」이, <소설문학>지 신인상에 단편 「정려문」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옴. 지금까지 120여 편의 중.단편소설을 발표했고, 주요 작품집으로 장편 『신화 잠들다』,『인간의 늪』,『회색정글』, 『검은 미로의 하얀 날개』(전3권), 『죄와 사랑』, 『향수』가 있고, 2012년 목적시집 『불씨』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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