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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이 가신다는데 우리들은 어디로 가야 합니까?"

웃지 못할 희극이다. 좌군도통사 조민수 장군은 우군도통사에 앞서 선임 지휘관 좌군도통사다. 명나라를 치기 위하여 출정한 고려 정벌군의 야전군 사령관이다. 이렇게 막중한 책무를 짊어진 장군이 자신의 위치를 잃어버리고 우왕좌왕하는 것이다. 이성계는 오히려 담담했지만 조민수는 갈피를 못 잡고 허둥댔다.

강을 건너면 명나라. 뒤돌아 강을 건너도 항명. 이성계가 없는 위화도는 조민수에게 죽음의 땅이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곤경에 처한 것이다. 명나라의 오만을 응징하기 위하여 출정한 선임지휘관 조민수는 진퇴양난이었다.

@BRI@"내가 가긴 어디로 가겠습니까? 장군은 이러지 마십시오."

조민수 장군을 진정시켜 돌려보냈다. 군막에 홀로 남은 이성계는 깊은 시름에 잠겼다. 이거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군사들은 동요하고 사기를 좀먹는 유언비어마저 유포되고 있으니 뭔가 특단의 결단이 필요했다. 사활을 건 중대결심이 필요했다.

군막 너머를 바라보니 말없이 흐르는 압록강 물줄기가 자신을 향하여 덮쳐오는 것만 같았다. 밤은 깊어 잠을 청하는데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어린 나이부터 활 메고 산야를 달렸다. 칼 차고 말 달리며 수많은 전장을 누볐다. 아끼는 부하 군사를 잃기도 하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생사의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이토록 심각한 고뇌는 53년 생애에 처음이었다.

얼핏 잠이 들었을까? 밀려오는 말발굽소리에 소스라쳐 잠을 깼다. 명나라 군사였다. 꿈이었지만 자신의 군사들을 짓밟던 명나라 군사들은 무자비했다. 눈을 떴다. 머리를 털고 군막 밖으로 나왔다. 사위는 고요했다.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백두산에서 발원한 압록강 물이 말없이 흐르며 어둠 속에서 별빛에 빛나고 있었다.

천명이라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늘을 쳐다봤다. 눈썹 같은 하현(下弦) 달이 하늘에 걸려 있다. 평양을 떠나올 때 둥그런 보름달이었는데 그 달이 기울고 다시 둥근 달이 떠올라 위화도를 비추었지만 또다시 그믐달로 향하고 있었다. 불과 한 바퀴 남짓이었지만 1년만큼 길게 느껴지는 기간이었다.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울었다가 다시 차오르겠지? 하지만 이즈러지는 달을 붙잡지는 못하겠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성계는 발길로 땅을 툭툭 차더니만 다시 하늘을 쳐다봤다. 우기에 잠시 갠 맑은 하늘에서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을 바라보는 이성계의 목울대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 천명이라 받아들이자."

장수가 전장에서 죽는 것도 하늘의 뜻. 왕명을 거역하고 군사를 돌리는 것도 하늘의 부름. 천명(天命)이라 받아들이고 싶었다. 하늘의 부름을 거역하는 것도 항명이라 생각했다. 군주(君主)와 하늘. 선택의 기로에서 마음의 결심을 굳히자 편안해졌다. 사나이 한목숨, 죽고 사는 것을 하늘에 맡기니 홀가분했다.

이튿날. 5월 22일 아침. 군영에 휘하 장수와 군사를 모아놓고 이성계가 말했다.

"만약 상국(上國)의 국경을 범하여 천자(天子)에게 죄를 얻는다면 종사(宗社)와 생민(生民)에게 재화(災禍)가 이르게 될 것이다. 내가 순리(順理)와 역리(逆理)로써 글을 올려 군사를 돌이킬 것을 청했으나 왕도 살피지 아니하고 최영도 또한 늙어 정신이 혼몽하여 듣지 아니하니 어찌 경(卿) 등과 함께 왕에게 화(禍)되는 일을 하겠는가? 복(福)되는 일을 진실 되게 하여 임금의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하리라?" <태조실록>

회군선언이다. 이성계가 비장한 결심을 토로하며 장수들의 동의를 구하자 반대하는 이가 없었다. 이성계 없는 자신은 꽁지 빠진 수탉 같은 꼴이 되어버릴 것 같아 진퇴양난이던 조민수가 더욱 반겼다. 군사들은 죽고 죽이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간다니 무조건 좋았다.

여기에서 한 가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있다. 명나라를 상국이라 칭하고 명나라 황제를 천자라 존칭으로 부르고 있는 대목이다. 실록이야 어차피 승자의 기록이고 특히 태조실록은 건국 초기의 어수선함 때문에 태종 때 편찬되었다.

편찬을 총지휘한 하륜은 제1차, 제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거사를 성공시킨 이방원의 오른팔로서 성리학을 숭상하는 학자이다, 이에 못지않게 무인(武人) 이성계도 학자들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에 심취되고 사대(事大)에 경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군사적인 면보다도 상국을 칠 수 없다는 성리학적 관념이 크게 작용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말머리를 남(南)으로 돌려라!"

이성계 장군의 명이 떨어졌다. 위화도회군이다. 위화도에 군영을 마련하고 숙영한 지 딱 보름 만에 돌아가자는 명이 떨어진 것이다. 군사들의 환호성이 위화도를 진동했다. 전장에 나선 군졸들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이 소임이지만 죽고 죽이는 전투를 하지 않고 처자식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간다니 뛸 듯이 좋아했다.

군권을 가지고 있는 팔도도통사 최영 장군의 명이 없는 철군은 항명이다. 군 최고통수권자 임금의 윤허 없는 철군은 반란이다. 순간에 정벌군은 반란군이 되었고, 정벌군 장수 이성계는 반란군 수괴가 되었다. 정벌군이 반란군이 되는 것은 순간이었다.

천리마를 찾아 이 서찰을 방원이에게 전하라

회군을 명령한 이성계는 진중의 준마를 찾아 대령하라고 부하 장졸에게 명했다. 하룻밤에 천리를 달릴 수 있는 천리마를 찾아오라는 것이다. 고르고 골라 제일 잘 달리는 말이라고 소문난 흑마를 끌고 군졸이 이성계 앞에 부복하자 품속에서 두루마리를 꺼내며 말했다.

"이 서찰을 개경에 있는 방원이에게 전하라. 화급하다. 가는 도중에 길을 막는 자가 있으면 베어도 좋다. 즉시 떠나라."

명이 떨어졌다. 군령이다. 명령자의 신분이 오늘 현재 반란군 수괴이지만 거역하면 목이 달아난다. 우물쭈물할 겨를이 없다. 가다가 붙잡혀 죽어도 떠나야 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이성계가 말의 엉덩이를 발길로 찼다. 놀란 말이 위화도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같은 시각. 의주에 있는 역참마(驛站馬)도 남쪽을 향하여 뛰기 시작했다. '이성계가 이끄는 반란군이 개경으로 향하고 있다'는 의주목사의 장계를 가지고 바람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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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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