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일본 버블경제를 상징하는 신주쿠의 고층빌딩 지역.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있었던 일본의 '버블경제(Bubble Economy)'는 채 1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일본인들에게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선사했다.

세상이 멸망할 때까지 가격이 올라갈 것이라는, 속칭 '부동산·토지 신화'가 천국이었다면, 그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신화가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 후 찾아온 '헤이세이 10년 불황'은 지옥이었다.

국내언론에서도 '버블'이라는 용어를 숱하게 쓴다. 특히 요즘처럼 이상하리만큼 과열되고 있는 부동산 경기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일본 버블경제 때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해설이다.

경제적 현상으로서의 버블은, 쉽게 설명하면 지금까지 200원이 적정하다고 생각했던 사과가 갑자기 1천원, 1만원에 거래된다는 것이다. 왜 거래가 될까? 1만원에 사더라도 1만 2천원에, 또 1만 2천원에 산 사람들은 다시 1만 4천원에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수요가 있으니까 너도나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는다. 2만원에 산 사람이 더이상 2만 2000원에 팔 수 없다. 이 때 팽창할대로 팽창했던 비누방울이 비로소 터진다. 2만원에서 200원을 뺀 1만9800원이 아무런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언젠가는 터지고 마는 거품(버블)이었던 것이다.

지금 한국의 부동산 투기도 현상적으로는 당시의 일본과 비슷하다. 가격과는 상관없는 '구매자의 시장'이 형성되어 있어, 너도나도 프리미엄을 노리고 부동산을 사들인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피라미드의 최정점, 아무도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을 때까지 열심히 기어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마지막 구매자가 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말이다.

▲ 일본은행이 2006년 5월 9일 발표한 <일본의 버블시기 전후의 경제 물가동향 보고서> 에서 발췌한 그래프. 위로부터 주가, 지가, 외환율.
일본의 버블경제, 그리고 비참한 몰락

1985년 9월 22일 선진 5개국(미국·영국·서독·일본·프랑스)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 프라자 호텔에서 회담을 열고 '외환레이트에 관한 합의문'을 발표한다.

프라자합의(Plaza Accord)라 불리는 이 합의는, 미국이 자신들의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외환율에 인위적인 조정을 가한다는 내용으로, 일본의 경우 1달러에 250엔을 기록했던 것이 합의문이 도출된 그 다음날부터 떨어지기 시작해 1년 후에는 달러당 120엔까지 떨어지는 사상 최대의 엔고(円高)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출에 거의 모든 것을 의존해 왔던 일본으로서는 엄청난 타격을 입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전후 줄곧 중앙집권적 금융정책을 행해왔던 일본정부가 프라자 합의로 인한 엔고(円高)현상에 타격을 받은 수출업계를 구제하기 위해 금융완화 정책을 시행했고, 이 바람에 시중 은행의 막대한 자금이 시장으로 흘러나와 돈이 넘쳐나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시장으로 빠져나온 자금은 일본경제의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수출중심의 제조업이 아니라 주식과 부동산 시장으로 몰렸다. 엔고(円高)현상으로 수출제조업이 저수익을 내고 있는 상황에서 폭등하는 주식시장과 프리미엄이 붙는 부동산 시장은 매력적이었다.

89년 주식버블 피라미드가 최정점에 달했을 때, 닛케이지수(일본증권시장의 대표적인 주가지수)는 3만 9천엔을 기록했다. 버블이 시작될 무렵 닛케이지수가 1만이었고, 현재 약 1만 6천엔대에서 오고가는 것을 본다면 이 지수가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알 수 있다.

정부의 금융정책 완화로 일반은행의 돈세례를 받게 된 부동산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행은 기업뿐만 아니라 일반 개인에게도 마구잡이로 돈을 풀었다. 50년짜리 '초장기 론', 2세대에 걸쳐 대출금을 갚아도 되는 '2세대론'들이 이 때 나왔고, 은행의 돈으로 이들은 토지와 부동산을 마구 사들였다.

이 시기 일본 전체의 토지가격 상승은 50% 정도를 기록하고 있다. 별로 상승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이 수치에 지금도 그 때도 부동산 가격에 변함이 없는, 일본 국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골촌락 등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실제 부동산의 혜택(?)을 입은 도쿄·오사카·삿포로·나고야 등의 대도시와 그 인근지역의 지가 상승률은 200%~900%에 이르렀다.

부동산버블 피라미드의 정점(91년)에 올랐을 때 도쿄 23개구의 땅값이 미국 본토 전체를 사고도 남았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실제로 1989년 미쓰비시 부동산은 록펠러 센터를 2천억엔에 매수하기도 했다. 엔고현상을 이용해 아예 다른 나라의 부동산 매입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점은 당시에는 이같은 버블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비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버블시기에 대장성 관료로 일한 후, 지금은 무사시노시에서 부동산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이와오(54)씨는 통화에서 다음과 같이 그 이유를 설명했다.

"무엇보다 체감경기가 좋았다. 또 기업들도 주식과 부동산의 시세차익 등으로 총자산액이 증가하면서 기존의 제조업을 계속 운영할 수 있었고, 오히려 다른 분야, 특히 리조트 개발 등 서비스업의 확장에 나섰다. 당연히 고용이 늘어난다. 시간당 1500엔의 임금이 보통이었으니까. 또 디스인플레 때문에 물가도 오르지 않으니까, 아무도 버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옥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 도쿄 중심지인 신주쿠, 시부야까지 약 20~30분이면 갈 수 있는 고쿠분지, 무사시코가네이 일대의 단독주택 가격이 2천만엔(1억 6천만원)에서 4천만엔(3억 2천만원)정도에 거래되고 있다.
ⓒ 박철현
일본정부의 순간적인 판단착오, 그리고 '잃어버린 10년'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버블은 그렇게 순식간에 터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한다. 어차피 경제의 총규모라는 게 정해져 있기 때문에, 피라미드 꼭대기의 근처까지 올라가면 서서히 눈치를 챈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업확장이나 부동산 매입을 그만 둔다던가 하는 내부적 정리를 할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하는데, 어느날 갑자기 나온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버블을 그야말로 '펑' 터트렸다는 것이다.

그 정책이 바로 1990년 3월, 대장성 은행국이 발표한 '토지 관련 융자의 억제에 대해'라는 보고서였다. 은행을 대상으로 내려진 이 지침은 쉽게 말해서 부동산 관련 융자 '금지'였다.

초저금리로 융자를 해오던 은행이 철퇴를 맞으면서 더이상 돈이 돌지 않게 되고, 은행들은 발빠르게 '현금' 회수에 나섰다. 그러나 현금이 있을리 만무하다. 너나 할 것없이 은행 융자금을 갚기 위해 매물을 내놓지만 살 사람이 없다.

자연스럽게 부동산의 가격하락이 뒤따르고, 융자금을 갚지 못한 기업과 사람들의 파산이 이어졌다. 융자금 회수가 불가능한 은행들은 파산의 길을 걸었다. 은행들의 연쇄도난은 다시 시장에 영향을 미쳤다. 지옥의 악순환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파산하거나 합병을 발표한 은행 및 신용금고는 줄잡아 50여개에 달한다. 지역은행 중 가장 자산규모가 컸다고 했던 홋카이도 탁쇼쿠 은행, 일본 최고의 신용기금라고 불리웠던 일본장기신용은행 등이 이 때 도산한 은행들이다.

게이오 대학의 카네코 마사루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일본재생론>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국이 대일무역적자를 만회하고자 힘으로 밀어붙인 '프라자 합의'가 버블경제가 발생된 가장 큰 원인일 수 있다. 그러나 설령 원인이 그렇다 하더라도 실제 가장 큰 주범은 '금융완화'를 계속해서 실시해 온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정부가 시장에 모든 것을 맡겨버리는, 근대초창기에서 볼 법한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이 버블경제을 초래한 것이다"

버블이 붕괴된 91년 이후 일본정부는 은행의 불량채권 문제를 해결과 금융기관 재생, 기업을 위한 공적자금 투자등의 시책을 시행하게 되고, 이러다 보니 93~94년에는 실질 GDP가 전년도에 비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치욕을 겪기도 한다.

갑자기 터져버린 버블의 후유증을 치유하는 데 10년 정도가 걸렸고, 이를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하는 것이다.

▲ 고쿠분지에 있는 한 부동산 회사의 전경. 요즘의 경기회복을 반영이라도 하듯 저녁 8시가 지나도 불이 켜져 있다.
ⓒ 박철현
문제는 사람의 욕구다

2005년 9월, 도쿄와 나고야의 공시지가가 예년에 비해 15%~30% 정도 상승했다는 통계가 나왔다. 그러나 학습효과가 효력을 발휘했는지 이 통계가 나오자마자 각 언론들은 '버블을 경계하자'는 경고문으로 지면을 채웠다.

일본의 경기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물론 신자유주의 노선에 따른 격차사회, 빈익빈부익부 논란은 있지만, 적어도 닛케이지수와 부동산 가격은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나 검찰도 금융에 관해서는 철저하다. 주가조작이나 투기성 펀드, 이를테면 라이브도어와 무라카미 펀드의 내부자 거래(인사이딩)는 여지없이 수사망에 걸려든다.

결국 버블의 기억, 물론 달콤했던 천국이 아닌 끔찍했던 지옥의 기억이 현대 일본사회의 교훈이 되고 있는 셈이다.

스루가다이 대학의 후루카와 테쓰오 교수는 버블경제가 파산한 직후인 1993년도에 <버블의 연구>라는 책을 내면서 부제로 '욕망의 경제학'이라는 말을 달았다. 그때 왜 그런 부제를 달았는지 물어 보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버블이든 뭐든 문제가 생겨난 곳에 가보면 그 원인이 전부 인간의 욕망, 욕구 때문에 생겨나더군요. 서로가 적당히 참으면서 살아가면 다들 행복해 질 수 있는데 그걸 그때는 몰랐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부제를 붙였었는데, 요즘도 여전히 욕구를 제어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아 보여서 걱정입니다."

결국 문제는 인간의 욕구인 셈이다. 한국의 부동산 열풍도 말이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부터 도쿄거주. 소설 <화이트리스트-파국의 날>, 에세이 <이렇게 살아도 돼>, <어른은 어떻게 돼?>, <일본여친에게 프러포즈 받다>를 썼고, <일본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를 번역했다. 최신작은 <쓴다는 것>. 현재 도쿄 테츠야공무점 대표로 재직중이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