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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2년 전 봄 친구 몇과 함께 102보충대로 가기 위해 춘천의 둑길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힘겹게 걸어야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24살의 늦깎이 입대였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며칠 후 한 번도 밟아보지 못했던 강원도 인제, 원통에서 본격적인 군생활의 서막이 올랐다. 때는 4월도 막바지로 향했던 시기였지만 왜 그리도 춥고, 을씨년스러웠는지 제법 포근한 오늘 같은 날씨에도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으슬으슬 추워지곤 한다.

'거꾸로 매달아도 국방부의 시계는 돌아간다'는 그 불후의 명언을 가슴에 화인처럼 찍어두고 인내가 한계에 다다랐을 때나, 속박 당한 자의 답답함이 목구멍까지 차오를 때마다 들춰보며 국방부의 시간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102보충대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부터 좀 더 편하고 좋은 보직을 받기 위해 순간순간 간절한 잔머리를 굴리면서 내가 서있는 줄에 ‘빽’(?)좋은 청탁의 아들들이 함께 하길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결국에 나는 인제, 원통에서도 민통선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가는 천도리라는 지역에 위치한 소총중대 행정반에서 중대장 뒤치다꺼리를 주 임무로 하는 중대 통신병 - 지금 생각하면 그나마 재미있었던 - 으로 자대생활을 시작했다.

심야 시간대에 상황근무를 서고 있다 보면 중대장이 불쑥 나타나서는 'XX야! 배고프다. 라면 하나 끓여봐라. 계란도 하나 넣고.' 이렇게 명령 아닌 명령을 하달하고는 불쑥 중대장실로 들어가 버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사병들이 각자 월급에서 조금씩 갹출해서 출출하거나 군대밥이 형편없어 입맛이 없을 때 함께 먹으려고 사다놓은 라면을 땡전 한 푼 보태지 않았던 중대장이 얄밉게 축내는 것을 참는 것도 한계가 있는 법.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 계란을 그 위에 푼 다음, 걸쭉한 침을 ‘퉷’하고 뱉어서 쑥쑥 두어 번 휘저어 진상하는 것이 버릇이 되던 일병 중반 때쯤의 일이다.

그즈음 마침 중대장의 보직기한이 끝나서 새로운 중대장과의 이·취임식이 있는, 소총중대로서는 제일 큰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행정반 회의실에서는 대대장과 타 중대의 간부들까지 참석하는 이·취임식의 다과준비를 위해 아침부터 인사계가 성질 급한 고성으로 계원들을 들들 볶고 있었다. 회의실을 말끔하게 청소하고, 과일과 과자, 차등을 준비하면서 인사계와 나는 회의실 탁자 위가 깨끗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얀 전지를 깔고 있었다.

요지가 무엇인지 물어 보지도 못하고...

“너 어디 가서 요지 좀 구해와!”
사소한 일에도 화부터 내고 보는 성질 급한 인사계의 명령이었다. “네? 요지 말입니까?”
“'그래, 인마, 시간 없어. 빨리 뛰어 갔다 와.”

사실 나는 그 전까지 '요지'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성질나면 목소리가 확성기보다 더 커지는 인사계의 비위를 거슬러 가면서까지 '인사계님! 요지가 무엇입니까?'라고 되물을 정도의 짬밥은 아니었기에 서둘러 '네, 알겠습니다' 일단 대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저 인간은 아마 전지를 요지라고 부르는 모양이군.”
그렇게 내심 결론을 내리고 행정반 양쪽에 있는 4개 소대 내무반을 다니며 요지를 애타게 찾았다.
"김 병장님! 요지 가지고 있는 것 있습니까?"

"요지가 뭐냐?"
"아, 저기 이·취임식 하는데 책상 위에 깔 종이가 필요해서요. 대자보로 쓰이는 그런 하얀 전지 말입니다."
"그래? 우리 소대에는 없는데.”

그렇게 나는 이 내무반, 저 내무반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다 결국은 타 중대까지 돌아다닌 후에 요지 아닌 전지를 구해서 이·취임식을 준비 중인 회의실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인사계님! 요지 구해왔습니다."

나는 구겨지지 않게 서너 폭으로 접힌 전지를 인사계에게 내밀었다. 주인이 멀리 던진 공을 물고 와서는 주인의 발밑에 놓고 머리 쓰다듬어 주길 기다리는 견공처럼 득의만만한 자세였다.

인사계는 말없이 전지를 돌돌돌 말아서 얇고 길쭉한 막대기 모양으로 만들었다. "입 벌려." "네?" "입 벌려." 벌린 입에 인사계는 전지를 쏙 들이밀고는 "이 자슥아, 너는 이걸로 이 쑤시냐?" 그 후로 요지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았다.

그리고는 요즘도 이쑤시개라고 말하는 주변사람이 있으면 가벼운 타박을 한다.
"이쑤시개가 뭐냐! 요지라고 해. 요지!!"
군대에서 일본어 하나 제대로 배워 나온 것이다.

사격장에서 병사가 중대장과 고참에게 총을 겨누다

내가 통신병으로 근무할 때 옆 중대에서 총기사고가 발생했다. 군기를 잡는다고 일과가 끝난 이후에 시도 때도 없이 특공무술과, 뺑뺑이를 거듭하는 통에 훈련소 동기 녀석은 입에서 단내가 다 난다며, 그 바람에 사병들 사이에 군기를 잡기 위한 구타도 만연해 있다는 푸념을 종종 털어놓곤 했었다.

그러다 사격장에서 사건은 발생했다. 오전에 사격연습을 하기 위해 참호로 들어간 병사 하나가 실탄을 장착한 뒤 갑자기 우측으로 총부리를 돌려서 중대장과 고참을 죽여 버리겠다며 소리를 내지른 것이다.

결국, 옆에서 탄피받이 역할을 하던 부사수가 이를 제지하면서 서로 옥신각신 하는 와중에 총이 발사되었고, 말리던 부사수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부사수를 쏜 병사는 곧바로 소총으로 자살했다.

대대가 발칵 뒤집어졌다. 즉시 대대 간부회의가 소집되었고 회의를 마친 중대장은 황급히 행정반으로 돌아와서는 나를 대동하고 그 사건이 발생한 중대의 내무반을 찾아갔다.

중대장은 총기사고를 낸 그 사병의 관물대를 뒤져 일기장을 찾아내었고, 그것을 다시금 내가 속해있던 중대건물 뒤의 소각장으로 가지고 온 후 한 장 한 장 찢어서 태웠다. 회의에서 각 간부들의 역할이 부여되었고 나의 직속중대장은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들 일체를 없애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이다.

그가 총구를 중대장과 고참에게 돌린 것이, 부대내의 가혹행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는지를 밝히는데 결정적인 자료일 수 있었던 일기장은 이렇게 흔적없이 사라졌다.

일체의 관련 자료 없애... 가정환경 비관 자살로 결론

중대장의 어깨 너머로 보았던 그 깨알 같은 일기장에 어떤 첨예한 갈등이 풀어져 있었는지 나는 정확히 볼 수가 없었다. 다만, 군 생활 내내 매일매일 일기를 썼던 내 입장으로 돌이켜 보건대 그곳엔 한 청춘이 밤마다 희미한 취침 등 아래에서 군생활의 고민과 힘겨움, 억울함 등으로 시커멓게 타버린 마음들을 일기장 곳곳에 알알이 박아 놓았을 거라 여겨진다.

오후부터 헌병대 수사관들이 부대에 파견되어 수사를 시작하기 시작했고 몇 날 동안 중대원들을 일일이 면담할 예정이며, 또한 대대의 간부들 사이에서는 사병들 입단속 잘 시켜야 한다는 것과 아마도 자살한 사병의 직속 중대장은 군복을 벗어야 할 거라는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벌집 쑤셔놓은 분위기 속에서 일주일가량 그 사건에 대한 수사가 이어졌다.

얼마 후 사건은 ‘가정환경과 신병을 비관한 한 사병의 총기사고와 그로 인한 자살’로 종결됐고, 옷을 벗어야 할 거라는 중대장은 계속 중대장 보직을 수행하다가 연대의 수색 중대장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동료사병에 의해 죽임을 당한 사병의 가족과, 자살한 사병의 가족들이 그 사건 결과를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에 관해서는 뜬소문 같은 것조차 듣지 못했다.

국방부의 시계는 어김없이 움직였고 얼마 후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자 전군에 준비태세가 내려졌다. 아직까지 느껴지는 그 당시의 생생한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북쪽의 산과 하늘을 바라보며 문득 '만약 지금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란 의문을 품어보았다. 그런 생각은 이내 나를 절망으로 몰아갔다. 왜냐하면 그런 조직을 위해, 죽고 죽이는 전쟁의 한복판에 내가 서있어야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해 왔건만 아직도 그러한가? 변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의 입에서 똥 냄새를 풍기게끔 만드는 곳이 군대여서는 안 된다. 우리 젊은 군인들에게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 본인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희생하고 있다는 고귀한 신념을 갖게끔 만들어 주자.

그들을 폐쇄적인 군 조직의 보호와 유지를 위해 더 이상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병(私兵)이 아니라 국민의 아들이자 형제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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