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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1일, 우리는 이 땅에 철도가 놓여진 이래 처음 보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수도권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애틋한 낭만 하나쯤은 꼭 있을 경춘선의 역 하나가 이름을 바꾼다.

1939년 일제에 의해 경춘선이 개통되고 이름이 붙여진 후 65년만에 역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그것도 사람 이름이 역 이름이 된다. 서울 쪽에서 춘천역 두 정거장 전에 있는 '신남' 역이 '김유정' 역으로 바뀌는 것이다.

▲ '김유정역'이 될 '신남역'
ⓒ 곽교신
철도는 변화를 거부한다. 조그만 착오도 바로 대형사고로 이어지는 철도 운행의 특성상 때론 이상하게 보이는 행동들도 안전을 위한 필수사항인 경우가 많다. 철도여행을 하면서 유심히 보면 팔을 곧게 들어 떠난 기차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역무원을 볼 수 있다. 그건 기차의 무사 출발을 잘 확인했다는 자문자답이다. 이를테면 안전을 확인하는 혼잣말이다. 이토록 철도는 사소한 것까지 짚고 넘어가야 한다. 종사자들 생각 체계도 자연히 그 경직성을 닮아갈 수밖에 없다.

무엇이든 바뀌는 것을 일단 거부하는 철도의 특성을 잘 아는 필자가 역명에 사람 이름을 붙이겠다는 결정을 희한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 소재지를 역 이름으로 붙이는 것이 통례이니 신동면에 있는 역을 '신남'이라 붙인 것이 애초에 잘못이기는 하다.

그러나 역 이름을 바꾸는 일이 그저 페인트로 플랫폼 이정표 글씨를 다시 쓰거나 아크릴 간판을 바꾸는 것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다. 세세히는 12월 1일 0시 기준으로 컴퓨터 입력신호까지 모두 바꿔야 철도 전산망도 이상 없이 돌아가는 아주 골치 아픈 일이다. 그 번잡함을 무릅쓰고 역 이름을 바꾸겠다니 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 호기심이 신남역과 벼르고 벼르던 김유정문학촌을 찾게 만들었다.

마을이 아니라 소설을 지나가는 철도

▲ 생가 마당에서 바라본 실레 마을. 보이는 공간의 거의 전부가 김유정 문학의 무대.
ⓒ 곽교신
10월 마지막 주 평일. 십 수 년만에 경춘선 기차를 타고 신남역에 내렸다. 평일 오후여서 그랬겠지만 내린 이는 필자 혼자였다. 김유정문학촌은 기차역에서 200여 미터로 걷기에 딱 좋은 거리다. 한눈에 들어오는 마을은 김유정의 표현 그대로다.

춘천읍에서 한 이십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닷는 조고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찍굵찍한 산들이 빽 둘러섯고 그 속에 묻친 안옥한 마을이다.
-수필 '오월의 산골작이'를 발표 당시(1936) 그대로 옮김


마을이 전부가 문학의 무대인 것을 알고 왔으나, 실제 본 마을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필자를 김유정의 시대로 몰아갔다. 저 쪽 들판 어디에서 점순이(소설 <봄봄>에서의)가 나와 삐죽 웃을 것 같다. 문학촌을 향하는 이정표 외엔 특별할 것이 없는 조촐한 마을임에도 그 느낌은 특별했다. 일반적인 사항 외에는 자료 조사도 없이 갔기에 선입견 없는 느낌은 더 순수했다.

▲ 소설 "동백꽃"에 나오는 동박나무(생강나무). 잎을 비비니 '알싸한' 생강향이 났다. 꽃은 크기와 색깔,모양이 산수유 같다고.
ⓒ 곽교신
금병산과 경춘선 철도로 둘러쌓인 마을은 마치 분지 같아서 시야를 한 눈에 모은다. 모아진 시야 전체가 김유정 소설의 무대다. 아직도 마을 사람들은 김유정 소설 '만무방'에 나오는 노름방을 기억하고 닭싸움을 기억하며 <봄봄>의 봉필 영감을 기억한다. '만무방'의 노름방으로 가는 고갯길은 지금도 고갯길이고, 김유정이 세운 야학 '금병의숙' 자리는 지금도 간판은 '금병의숙'이다. 동박꽃은 지금도 해마다 '알싸한' 향을 뿜는다.

김유정이 소설을 쓴 것이 아니라 마을이 원래 소설 덩어리였고, 단지 김유정의 손을 빌려 마을이 소설로 탄생한 것이 아닌가 혼동이 된다. 그렇게 마을은 현실과 소설을 왔다갔다 한다. 그 혼동의 감각이 아주 포근하다. 문학의 현장을 적잖이 다녀봤으나 여기는 뭔가 느낌이 다르다는 직감이 온다.

필자는 실레 마을을 방문하고서야 변화를 거부하는 철도청이 왜 한 소설가의 이름을 역이름으로 바꿀 결정을 했는지 알았다.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이유를 스스로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바꾸는 것이 아니라 '이제사' 바꾸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철도가 지나고 그 철도 곁에 마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김유정의 소설 속으로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되어 알아챈 것이다. 이런 분위기라면 일찍이 김유정 역으로 했어야 맞는 일 아닌가 싶었다.

김유정 문학의 언어혁명

어떤 이유로든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인정되는 소설가에게는 '아무개 소설'이라기 보다는 '아무개 문학'이란 말을 붙이곤 한다. 2년 가량 짧은 기간에 당시 어느 소설과 비할 수 없을 만큼 색깔이 다른 31편의 개성 짙은 소설을 집중적으로 쏟아내고 폐병으로 스물 아홉에 요절했지만 필자는 그를 말하면서 '김유정 문학'이라 말하고 싶다. "글 쓰는 사람은 폐병으로 죽어야 왠지 멋있다"는 철딱서니 없는 감상에 젖은 말이 아니다.

▲ 김유정 문학의 백미 "봄봄"의 첫 부분. 1935년 朝光. 삼문사본. 문학촌 전시관의 조형물을 촬영. 필자는 이것을 거듭읽으며 갑자기 지면이 그림으로 바뀌는 착각을 했다. 김유정의 묘사는 글씨로 그린 그림이다.
ⓒ 곽교신
연희전문을 끝까지 다니지 못했지만 인텔리였고 서울 종로에도 큰 집을 소유한 부농의 아들이었음에도, 지배층과 기층 민중이 사용하는 언어가 철저히 분리되어있던 당시에 지식인 김유정은 그의 문학에 상류층의 언어를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고의적으로 소설에 배운 티가 나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의 언어에선 비온 뒤의 흙냄새가 풀풀 풍긴다. 소설 이미지가 진행되어가는 맛은 완전히 숭늉 마신 뒤끝이다. 그의 소설에 나오는 욕은 들으면 화나는 욕이 아니라 기분만 쬐끔 걸쭉해지고 마는 친근한 욕이다.

▲ 금병의숙 자리에 세워진 마을회관. 문학촌이 생기며 금병의숙 본래의 의미로 사용하려고 애쓰는 흔적이 보인다.
ⓒ 곽교신
그는 소설 언어에 관한한 당대의 혁명가다. 그의 언어들은 그 자체가 저항이요, 혁명이다. 연희전문에서 제적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 세운 야학 '금병의숙'은 그의 이런 언어정신과도 맥이 통한다. 그는 '금병의숙'을 통해 천석지기 지주의 아들이 아니라, 이 땅의 아들로 살기를 외쳤음이 분명하다.

그의 소설 속 언어들이 그걸 고스란히 증명한다. 그만큼 그가 소설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은 특별하다. '특별하다'는 말로는 허전하고, 부족해서 필자는 그의 문학에 등장하는 언어들을 '언어의 혁명'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도발적 언어의 거침없는 구사"라고 한 적도 있었다.

강원대 국문과 교수이며 김유정문학촌의 촌장을 맡고 있는 소설 <아베의 가족>의 작가 전상국 교수는 필자의 이런 표현에 굳이 이의를 달지 않았다. 더 나아가 사람 이름을 붙이겠다는 철도청의 혁명적인 조치도 생각해보니 결국 김유정이 일찍이 시작한 언어 혁명과 맥이 닿은 일이 아니냐고, 역 이름도 결국 김유정이 바꾼 것과 같지 않느냐는 필자의 주장에 일 리가 있다고 거든다.

김유정의 소설에 있는 단어들은 모두 실레 마을의 말들이다. 실레 마을 사람들은 아직도 '봄봄'처럼 살고 '동백꽃'처럼 산다. 김유정의 소설을 말하는 이마다 ''토속어'와 '해학', 이 두 단어는 절대 빼놓지 않으나, 김유정에겐 토속과 해학이 그저 모두 고향일 뿐이다.

운영방식도 토속적인 김유정문학촌

▲ 조카의 상세한 증언에 따라 복원된 생가는 김유정을 이해하는 나름대로의 자료이다.
ⓒ 곽교신
김유정문학촌은 2002년 8월에 세워졌다. 촌장을 떠맡은 전상국 교수는 꼭 20년 전부터 김유정 고향 마을에 '미치기' 시작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강원대 교수로 온 것도 실레 마을이 가까운 것이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문학 답사객들을 이끌고 마을을 둘러싼 금병산을 수백 번은 올라다녔다고 했다.

실레 마을이 김유정의 고향이란 것 외에는 아무 자료가 없던 시절부터 전상국 교수는 실레 마을을 찾아다녔고 김유정의 향기를 맡으러 실레 마을을 찾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마을을 돌아다닌 것이다. 그의 이런 극성(?)이 열매를 맺은 것이 오늘의 '김유정문학촌'이다. 아무개 문학관, 아무개 문학기념관이라 하지 않고 '촌'자를 붙여야 김유정답다는 것도 그의 고집이었다.

춘천시에서 연간 예산을 받아 문학촌을 꾸린다는데 그 지원 예산액이 여기에 숫자로 밝혀 적기가 쑥스럽다. 교통비 수준의 급료로 봉사하는 해설 직원 두 분과 환경 관리 직원 한 분의 용역비를 빼면 행사라도 치를 돈은 거의 없다. 그나마 촌장이 무보수 명예직이라니 다행이다.

크든 작든 행사를 치르려면 돈 들어갈 일 투성이인데, 그런 재정 여건에서도 문학촌의 행사들을 보면 내용은 토실토실 살이 쪘다. 그 비결은 마을의 협조에 있다.

처음 문학촌을 열었을 때 마을 주민들이 반갑지 않아 했단다. 주민들에겐 문학의 현장이기 이전에 생활의 터전인데 문학 답사여행이라고 차려입고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 일이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어렵게 예산을 갈라 세운 안내 팻말 조차도 무사하질 못했단다.

▲ 생가의 안마당. 북부지방의 ㅁ자 집이 추위를 더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 경우는 빈한한 농촌 대지주로서의 경계심이 더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상국 촌장의 추측.
ⓒ 곽교신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역 이름이 바뀌는 12월 1일을 축하하겠다고 주민들의 추렴으로 조촐히 음식을 준비해서 몇 사람이 찾아올지 모르지만 잔칫상을 준비할 예정이란다. 문학촌 측의 진심어린 성의가 주민들 마음을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소설과 관련한 행사 때마다 인사말이나 해당 소설 속의 현장을 설명하는 것은 동네 이장이나 어르신들께 맡긴단다. '내 일=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내려와 꼴 사나운 일을 벌이는 게 아니라, 자기 마을에 예전에 있던 일을 기억하고 찾아온 손님들 같으니 누군들 반갑지 않으리.

실제 마을 주민들은 소설 <봄봄>은 몰라도 '봉필 영감'(욕필이 영감. 실명은 김종필)은 알고, 소설 <만무방>은 몰라도 산 너머 노름방은 기억한다. 그러니 답사객들은 답사객들 대로 재밌고 주민들은 주민들 대로 자기 동네의 옛날 일을 알고 찾아온 외지 사람들이 신기하고 재밌을 것이다.

늘 향기로운 문학촌이 되기를 바라며

참 느낌이 좋은 실레 마을이요, 김유정문학촌이지만 기자의 눈엔 문인의 순수한 감상만으로 운영하기엔 벅찬 부분이 많다. 춘천의 문화자산이기에 앞서 국민 모두의 소중한 문화자산인 실레 마을과 김유정문학촌에 관련 기관의 세심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문학촌 입구 안내판, 생가 담장, 동상, 전시관 등 문학촌을 지을 때 이미 문학촌의 본질을 벗어나 집행된 예산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실수를 또 거듭하려 한다. 주차장을 넓힌다고 문학촌 오른편으로 흐르는 개천을 복개할 계획이란다. 이 계획은 틀림없이 시청 책상 위에서 나왔을 것이다. 최소한의 안목만 있어도 하천복개로 주차장을 넓힐 계획은 세우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춘천시의 하천복개 계획을 전 교수로부터 전해듣자마자 기자는 '수 년 내에 후회하실 일을 왜 하냐'고 했다. 목적을 가지고 배정된 예산이라 그건 꼭 복개하는데만 써야한다는 것이 행정의 경직성이다. 그렇다면 김유정도 배운 사람답게 유식이 철철 넘치는 말로 소설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의 김유정문학촌은 없었겠지만.

계속 현실과 소설을 혼동하면서 실레 마을을 보는 즐거움을 누릴지, 아니면 소설 속에서만 볼 수 있을 지는 순전히 살아있는 자들의 몫이다. 꼭 김유정이 살아나와 걸죽하게 한 마디 할 것 같은 착각을 하며 문학촌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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