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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십이 훌쩍 넘은 노인네. 날마다 출퇴근해야 하는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전문적인 취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 나이 되도록 그저 밥하고 빨래하고 자식들 키웠을 뿐인 뚱뚱한 노인네, 바로 나의 엄마다.

엄마 세대에게는 먹고 사는 일이 큰일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산으로 들로 누비며 먹을 것만을 용케 알아내는 재주를 가지게 된 것도. 그런 것들로 식탁을 가득 채울 줄 아는 재주를 가지게 된 것도.

▲ 엄마의 사찰요리, 모듬 버섯탕
ⓒ 정혜자
봄이 채 시작되기도 전인데도 엄마는 내게 채근을 한다. "아야, 비가 왔응께, 고사리가 고개를 내일었을 것인디야." 이런 말 떨어지면 싫으나 좋으나 엄마를 따라 고사리를 캐러 가야 한다. 내가 캐러 갈 때까지 엄마는 전화 걸어서 귀찮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연신 툴툴거린다. "엄마가 음식점을 하는 것도 아니고, 고사리를 뜯어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면서 왜 온 산의 고사리를 다 못 뜯어서 난리야?" 모내기철이면 우렁이를 잡는다고 한밤중에 농로의 보에서 랜턴을 들고 헤맸고, 가을 산에 소담스럽게 핀 조선 국화까지 다 엄마의 차지였다.

▲ 엄마의 사찰요리, 국화꽃 튀김
ⓒ 정혜자
얼마 전에도 드라이브를 하다가 갑자기 차를 세우고 야산으로 들어가자고 한다. 산초나무를 보셨다는 거다. '산초'는 생선 비린내를 제거하는 양념이며 사찰에서는 장아찌를 담그기도 한다. 나는 엄마의 노동 아닌 노동에 가끔은 자발적으로, 가끔은 속아서 끌려 다닌다. 이렇게 사는 게 좋으면 시골로 아예 내려 가는 건 어떠냐고 진지하게 속을 떠보기도 했다.

▲ 야산의 산초열매
ⓒ 정혜자
학교 다닐 때 소풍을 갈 때면 선생님의 도시락 당번은 으레 우리 차지였다. 그 중에서도 엄마가 하신 김치는 언제나 금방 동이 나곤 했다. 언젠가는 선생님께서 뜬금없이 엄마의 고향을 물으셔서 "강진"이라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는 강진에는 강도 있고 바다와 산, 들이 있어 재료가 풍부해 엄마의 음식 솜씨가 좋으실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그런 엄마가 사찰을 다니기 시작하시고 당신의 종교를 가지게 된 것은 20년쯤 전의 일이다. 법당에 좌정을 하신 채 철야로 정진하시는 모습이 보기에 좋았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는 법당에 들어가시는 일이 뜸해지셨다. 대신 공양간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소매에 음식 국물이 묻은 채 분주하게 지내셨다. 엄마는 왜 교양 있는 법당을 마다하고 공양간에서 궂은 일을 하게 되신 것일까.

▲ 엄마의 사찰요리, 연근 초 절임
ⓒ 정혜자
지금도 사찰에서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앞장서 부엌에 들어가신다. 요리 전문가도 아니면서 백명이 넘는 손님들이 들이닥친다 해도 눈 하나 꿈쩍 안하신다. 반면 나는 메뉴만 생각해도 머리가 아프다. 하물며 그 음식상이 채식으로만 차려져야 한다면…. 언젠가 엄마의 요리를 한 번 도운 적 있었는데 그냥 손을 들었다. 그리곤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안할 거라고 몇 번을 다짐했다.

▲ 엄마의 사찰음식, 도라지 정과
ⓒ 정혜자
엄마는 행사를 마칠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내가 미쳤는갑서야. 담에는 절대로 못 하것는디 어쩌까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안다. 그 말이 엄마의 진심이 아님을. 어디선가 또 음식이 필요하다고 하면 엄마는 부엌으로 들어가서 더 맛난 것을, 더 많이 해 먹이고 싶어서 손바닥이 까칠해지도록 요리를 해댈 것이다.

예쁘게 화장하고 교양 있게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 아니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속으로 나는 엄마를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푸서푸석한 얼굴과 그 입가에 묻어 있는 김칫국물을 닦아 주며 속으로 말할 것이다. '엄마, 어지간히 바쁜 척 좀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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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초보라서 잘될지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기사 쓰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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