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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 보수와 진보의 '한 판'이란다. 부자신문의 부추김이다. 심지어 학자라는 자들까지 거든다. 폐지 주장을 빨갛게 물들이는 작태를 서슴지 않는다. 윤똑똑이들은 부르댄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국가보안법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과연 그러한가. 아니다. 정반대다.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국가보안법을 '반드시' 없애야 옳다. 누가 뭐래도 민주주의란 사회 구성원들의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에 밑절미를 둔 까닭이다. 표현의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성립할 수조차 없다. 대한민국은 헌법 제1조에서 민주공화국을 선언하고 있다. 바로 그 점에서 국가보안법 폐지는 진보의 과제가 아니다. 보수세력이 나서야 마땅한 숙제이다.

더러는 남북대치 상황을 든다. 하지만 그 또한 억지다. 근거 없는 주장이 아니다. 한국의 보수적 법조인들이 존경하는 초대 대법원장이 있다. 누구인가. 가인 김병로. 그는 한민당 창당에 깊숙이 관여한 만큼 누구도 그를 진보로 분류하지 않는다. 가인은 1953년 4월에 형법을 제정하는 과정에서 초안을 내놓으며 말했다.

"특수한 법률로 국가보안법 혹은 비상조치법, 이러한 것이 국회에서 임시로 제정하신 줄 안다. 지금 와서는 그러한 다기다난 한 것을 다 없애고 이 형법만 가지고 오늘날 우리나라 현실 또는 장래를 전망하면서 능히 우리 형벌법의 목적을 달할 수가 있겠다는 고려를 해보았다. 지금 국가보안법이 제일 중요한 대상인데, 이 형법과 대조해 검토해 볼 때 형에 가서 다소 경중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나 이 형법 가지고 국가보안법에 의해서 처벌할 대상을 처벌하지 못할 조문은 없지 않는가 하는 그 정도까지 생각했다."

가인의 생각은 분명했다. 실제로 형법 여러 조문에 내란죄와 외환죄, 공안을 해하는 죄를 포괄했다. 하지만 국가보안법은 살아남았다. 그 명분도 차라리 순진했다. "전시의 치안 상태 및 국민에게 주는 심리적 영향"이었다.

그랬다. 보수주의자 가인 김병로의 발언이 나온 것은 '전쟁 상황'(1953년 4월)에서다. 자칭 보수주의자들에게 묻고 싶은 것도 이 지점이다. 가인. 그가 진보인가. 더구나 지금이 과연 '전시'인가. 가인이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르지 않은가.

국가보안법이 없으면 마치 나라가 결딴날 듯 떠드는 자들이 있다. 저들이 반세기 넘도록 초·중등 교육에 신문과 방송으로 '세뇌'한 결과 적잖은 구성원들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제 '여론 조작'에 나선 부라퀴들에게 찬찬히 들려주자. 그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 대한 모독이요, 민주시민에 대한 모욕이다.

더러는 '민주주의론'으로 밀리는 탓인지 '시장 경제론'까지 들먹인다. 이 또한 희극이다. 시장경제의 논리를 존중한다면, 당연히 사상도 시장에 맡겨야 하지 않은가. 국가보안법은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법만이 아니다. '사상의 시장'을 제한하는 법이다. 그래서다. 과연 이 땅에 참다운 보수는 있는가. 거듭 묻고 싶은 까닭은.

물론 이 땅의 보수세력을 애도하며 이미 장송가('한국보수주의의 장송곡' 2004년 1월 14일)를 불렀기에 부질없는 질문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회' 아닌가. 가인 김병로에서 끊어진 보수세력이 부활을 선언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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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다. 저질연극판을 벌이는 수구정당의 정치모리배들이나 수구언론인, 그리고 그들에 부닐고 있는 '먹물'들은 그렇다고 치자. 열린우리당 안에서도 개정론과 대체입법론 따위가 흘러나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저들이 국가보안법 논쟁을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몰아가는 깜냥은 무엇일까. 케케묵은 악령을 내세워 기득권을 '사수'하고 싶어서다. 국가보안법 폐지론에 빨갛게 색깔을 덧칠할 속셈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국가보안법은 더더욱 폐지해야 옳다. 정권은 물론이고 국회에 과반의석을 지니고도 그 '보수의 숙제'조차 풀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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