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1980년 아버지의 사진
ⓒ 김지영
1980년 6월 24일.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50세의 이른 연세에 장장 3년여를 아버지와 그리고 그의 가족들을 신물나게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했던 위암과 식도암도 같이 안고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위해 내가 흘린 눈물은 임종 직전부터 만 하루를 넘기지 못했다.

철없던 시절 내내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더럽게 구차했던 시절에 대한 회한들만 남기신 아버지를 위해 내가 흘린 눈물이 고작 그것뿐이었던가?

'지천명' 오십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가난, 가난, 가난

아버지의 투병 끝 죽음이 남긴 흔적들은 빨리 지워지고 있었다. 입관을 마치고 어머니는 아버지의 옷가지와 유품들을 몇 가지만 빼놓고는 동네를 이웃 한 야산에서 긴 울음과 함께 모두 태워 버렸다. 검은 연기로 잿빛 하늘을 유영하던 아버지의 흔적들은 더욱 끈끈해진 6월의 바람에 실려 날아가고 있었지만 지독한 가난만은 남겨둘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기자였다. 서슬 퍼런 1970년대를 오롯이 기자로만 살아오신 분이었다. 지금도 가끔 떠오르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의 내 인생은 제법 사는 축에 들었던 '호시절'이었다. 적어도 아버지가 신문사를 나오시고 사업을 시작하여 잘 나가던 시절까지는 잘 살았다. 집에 금송아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참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시절에 알았어도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일이었겠지만 70년대에도 언론 통폐합이란 게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유신정권 시절이었으니 무얼 못했겠는가 마는.

아버지는 그 시절 J시에서 그 지역신문의 편집장까지 올랐지만, 불온한 시대에 대해 고뇌하던 지식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역시 한참 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몇 번 중앙정보부에 끌려 다녔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아버지가 신문사에서 해직 당하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버지는 어쨌든 신문사를 그만 두어야만 했다.

그 신문사의 사주는 나중에 내가 다녔던 대학의 이사장이기도 했다. 그래서 더 어처구니없는 조우이긴 했지만 대학 3학년 때 학원민주화 투쟁을 하면서 가장 선봉에 섰던 나는 아버지가 다녔던 신문사의 사주이자 내가 다녔던 대학의 이사장과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협상 테이블에 앉기도 했다. 운명은 역시 묘한 데가 있다.

그 사람은 전 편집장이었던 아버지를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고 학원민주화 투쟁위원장인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버지의 아들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듯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만.

유년 시절 아버지에 대한 생생한 기억은 몇 토막 있긴 하다. 술을 거의 매일 드시다시피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주사도 보통은 넘으셨던 것 같다(선친에 대한 도리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못한다). 옛날엔 다들 그랬는지 모르지만 종종 신문사 후배들을 데리고 와서는 늦은 밤 술상뿐 아니라 방까지 내 주는 일이 잦았고, 덕분에 어머니의 신경질은 바늘 끝처럼 날카로워 부부싸움도 심심치 않게 하곤 했다. 어머니의 신경을 바늘 끝으로 만들어 버렸던 그 술이 때로는 불온한 시대를 고뇌하던 술이기도 했나 보다.

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오형제 중 넷째인 나와 그래서 막내가 되는 동생에겐 손찌검 한번 안하셨다. 위로 형만 줄줄이 셋이었던 나는 애초에 딸 몫이었는데(그래서 내 이름만큼은 예쁜 여자다) 불행히도 남자로 태어났지만 한국 사람들의 굳은 철학적 명제 중 하나인 '내리사랑' 덕에 제법 귀여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막내는 말해 무엇하랴.

대신, 어머니의 매가 모질긴 했지만 그래도 어머니는 항상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존재였기에 감수할 수 있었다. 또 그렇게 맞고 나면 잠들기 전 어머니의 더운 체취가 나는 가슴을 실컷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기 때문에 전혀 원망이라고는 하질 않았다(아니 조금 하긴 했었다).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해, 큰형은 이미 서울에서 유학하는 S대학원생이었다. 둘째 형은 아버지가 한창 지방 언론 권력의 정점에 계실 때 일반인들은 한번도 하기 어렵다는 고등학교 전학을 몇 군데나 시켜줬지만 결국 졸업을 못하고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셋째 형은 J대학 80학번으로 80년 광주의 비극을 J시에서 재현해내는 통에 나는 다른 친구들보다 훨씬 먼저 최루탄 냄새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 1971년 가족사진
ⓒ 김지영
막내는 갓 초등학교 6학년, 나는 어느덧 겨드랑이에 털이 나기 시작한 중학교 2학년이었다. 아직 몽정도 해보지 못한. 그때 마흔 일곱의 어머니가 환갑이 넘으신 연세까지 봉제공장을 다니시며 다섯 아들 중 네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느라 흘려야 했을 눈물과 피와 땀을 생각해 보면 난 가슴이 미어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시대의 가난해야 했던 어머니들은 여자가 아닌 자식들의 어머니로서만 사셨던 거다. 아!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부터 이미 기울대로 기운(더 이상 기울어질 것도 없는) 집안 살림 덕에 4km 남짓 되는 학교를 스쿨버스비를 못내 걸어 다녀야 했다. 수학 여행비가 없어 3박4일을 내리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도 하고, 학교 뒷산에서 풀도 뽑고, 학교 테니스장에 소금도 뿌리고 바닥을 다지는 내 몸뚱이만한 콘크리트 바퀴를 굴려야 했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슬프게 한 건 수업료 못 낸다고(절대로 안내는 게 아닌데도) 수업 시간에 호명하고 불러내어 엎드려뻗쳐 시키고 몽둥이로 때리는 선생의 득의만만한 표정이었다(그 시절엔 그랬다).

당신에게도 고뇌가 있었겠지요

아버지가 당신의 인생을 어떻게 가꾸고 어떻게 지켜오셨는지, 가족들에게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머니를 사랑하긴 하셨는지, 정말 불온한 시대를 고뇌하긴 하신 건지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신 다음날 버스 안에서 라디오로 소식을 전해 듣고 눈물을 훔쳤던 내가, 오후 다섯 시가 되면 국기가 없어도 국기가 있을 법한 방향으로 서서 가슴에 손을 얹고 가슴 찡하게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내가, 북한 사람들은 손과 얼굴이 빨간색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내가, 아직 몽정도 해 보지 못한) 내가 알 턱이 없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도 당연한 세상의 순리였다. 지나가는 소를 보고 소라고 말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그래서 그때는 당신과 당신 가족들을 그렇게 비참하고 서럽게 만들었던 가난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자연 아버지에게 이르렀음을 부끄럽게(그리고 가슴 아프게) 고백한다. 아! 아버지….

'공부는 쓸데없는 짓'이라는 술주정뱅이 할아버지 품을 뛰쳐나와 갖은 일을 하며 고학을 하셨던 아버지가 기어이 신문사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하셨을 때의 감회는 남달랐으리라. 하필 야만의 시대를 만나 야만의 시절을 살아 냈을 지식인으로서의 아버지와 그 아들세대마저도 온전히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이었음을 다시금 회상한다.

이십대의 암울하고 혹독했던 시절을 보내면서 나는 '긴 병에 효자 없었던' 시절의 철없음을 인정해야 했고 시대를 고뇌했던 지식인으로서의 아버지를 다시 불러낼 수 있었다. 비록 그 끝이 포도당 주사 바늘 하나 더 이상 꽂을 데 없었던 팔뚝의 형상만큼이나 비감하긴 했지만…. 나는 나보다 더 쓰라린 야만의 시절을 살아내야 했던 아버지의 존재를 서른이 가까워서야 비로소 온전하게 다시 가슴에 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내셨던 유신이라는 야만의 시절을 아버지의 아들인 나도 그 시절의 주인공만을 달리한 채 결코 용서될 수 없는 또 다른 위정자들이 만들어 낸 야만의 시절을 살아내야 했다. 난 살아 남았고 아직은 건재하다.

어린 아들의 혼곤히 잠든 모습을 보며 난 질기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그래서 해보는 거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 낳은 또 다른 아들의 미래만큼은 결코 야만의 시절이 되어서는 안되겠기에.

이미 그 전조는 싹을 틔울 수 없게 되었다. 더 이상 아버지와 내가 살아야 했던 야만의 시절은 존재할 수 없겠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남아있긴 하다. 그래서 나는 분명하게 살아 있어 줘야겠다. 내 아버지가 못다한 삶의 완성을 위해서… .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에 응모합니다.


태그: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20년 유목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을 거쳤다가 서울에 다시 정착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