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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평준화? 어떻게 들어온 대학인데…."

29일 한 대학교정. 철거촌 두 아이가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포스터를 보고 있던 기자의 등 뒤에서 난 소리였다.

"그러게, 말도 안돼."

옆에 있던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두 학생은 그렇게 팔짱을 끼고 햇살을 향해 계단을 올라갔다. 좋은 대학 들어가려고 발버둥깨나 쳤을 법한 그들에게 '대학 평준화'란 말은 들을 가치도 없는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그들은 대학생이라는 자신들의 신분을 당연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분 속에서의 서열까지도 말이다.

호기심이 생겼다. 도서관으로 달려가 '학벌없는 사회'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보았다. 2000년에 생긴 '학벌없는 사회' 학생모임에서는 2005년 새내기 토론회를 3월 29일 경북대를 시작으로 서강대, 성공회대 그리고 연세대에서 열고 있었다. 나는 지리적인 문제로 경북대를 제외한 서울의 3개 대학 토론회에 참가, 학벌의 최대 수혜자이자 피해자인 그들의 소리를 듣고자 참가하였다.

3월 30일 수요일 오후 5시, 서강대학교

"1학년 아니어도 괜찮죠?"

새내기 토론회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강의실 칠판에 써 있기에 4학년인 나는 멋쩍게 인사를 하며 자리를 잡았다. 원형의 책상을 따라 9명의 학생이 주최 측에서 준비한 자료집을 열심히 읽고 있다. 학벌 타파의 요구가 무시되고 있는 사회를 연상시킬 만큼 강의실 밖은 꽤 소란스럽다.

"신촌역 3번 출구와 6번 출구의 차이. 우리 학교 학생들은 어느 정도 2등 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1학년 자퇴 비율도 서울의 타 대학에 비해 높은 걸로 알고 있어요."

5시 30분경, 서강대 모임을 주도한 서강대 철학과 황현숙씨가 자신이 느끼는 학벌의 문제로 말문을 열었다.

"제가 학벌은 맨 처음 느낀 건, 1학년 때 미팅을 주선하면서였어요. 미팅이란 소리에 솔깃했던 과 친구들이 상대가 수원의 모 대학 여학생들이란 사실을 알자 오히려 불쾌해 하더라고요. 마치 자신들이 무슨 모욕을 당한 것처럼 말예요."

강원도의 한 명문고를 나왔다는 서강대 경제학과 01학번 정우람(남)씨는 자신의 집안에 대학생은 자기 혼자라고 했다.

"이처럼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데도 학벌을 따진다는 사실을 쉽게 바꿀 수 있을까요? 사실 우리가 초등학교에서 맨 처음 배우는 게 인성과 예절 교육이 아니라 받아쓰기와 회초리잖아요."

"맞아요. 제 친구가 지방에 한 의대에 다니는데, 그 학교 다른 과 애들하고는 이성교제를 잘 안하려고 한대요."

서강대 사회과학부 1학년 김영지씨의 얘기다.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서울의 명문대가 아닌 다른 대학을 가고 싶다 하면 으레 모의고사 점수가 낮으려니 하고 생각한단다. 물론 전국의 모든 고등학교가 그럴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자신을 그냥 '풀잎'이라고 소개한 학생은 우리의 인간관계에서 학벌이 진실된 만남을 방해한다고 했다.

"우린 처음 만날 때, 어느 대학 어느 과라고 하죠. 그럼 그때부턴 동등한 위치에서 의사소통이 깨지게 되요. 학벌에 가려져 진정한 친구를 발견하지 못할 수 있는 명문대 학생들도 학벌의 피해자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개인적 관심으로 홍대의 미술수업도 듣고 싶다는 서강대 경영학과 심희찬씨는 "왜 연대하고 이대는 되고 홍대는 안 되는 거죠? 서강대, 연대, 이대가 도대체 홍대보다 나은 게 뭡니까?"라고 성토했다.

3월 31일 목요일 6시, 성공회대학교

종교적인 분위기를 물씬 느낄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온 성공회대 캠퍼스를 찾은 기자는 여느 대학과 같은 밝은 분위기에 다소 놀랐다. 어쩌면 이때도 내 안의 학벌 의식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미 작용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학벌없는 사회에선 '어느 학교 누굽니다'라는 식의 자기소개를 지양합니다. 목에 힘들어간 소개 혹은 주눅 든 소개를 통해서 이미 학벌의 신화가 발현되기 때문이죠."

사회를 맡은 준호씨의 첫 마디였다.

"평소에 교육에 관심도 많았고, 대안을 논하고 싶어서 왔어요. 지금처럼 수능 점수가 경쟁력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현재의 서열화 체계 속에선 타 대학에 다니는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만나는 게 쉽지는 않아요."

성공회대 1학년 이은주씨가 차분하게 말했다.

"일단 대학 평준화에선 전국의 국공립대학을 단일 네트워크로 묶고자 합니다. 한 해 약 10만 명 정도가 국립대 학생이 된다면, 어느 정도는 학벌 의식을 희소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평준화의 목표는 하향 평준화가 아님을 분명히 밝힙니다. 단지 수능 점수에 의해 획일적 줄서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2년 전부터 학벌없는 사회 대학모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보임씨의 설명이다.

"그렇다면 그냥 가까운 대학 가는 건가요?"

또 다른 신입생 성공회대 1학년 정효민씨의 질문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학으로 자유롭게 진학하는 것을 말합니다. 대학의 이름을 없애고, 그 후에 서서히 사립대학을 흡수하는 거죠. 사실 엘리트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능력의 차이를 말하는데, 개인의 능력을 논하기 전에 동등한 교육환경을 보장하자는 거죠."

비명문대생들을 자신들을 ‘쓸모없다’ 느끼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체념하게 만든다며, 또 다른 일꾼 성공회대 이은희씨가 말했다.

"사실 전 고려대학교에 다녀요.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사실 이름값이지 특별한 내용은 없는 것 같아요."

올해 수시로 입학한 고려대학교 1학년 문수진씨는 현행의 입시제도에서는 경쟁력 제고가 아닌 소모적인 경쟁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내가 하고픈 공부를 마음껏 못 하는 게 가장 큰 학벌의 피해인 것 같아요. 정말 단기적 효과가 아닌 멀리 내 아이가 학벌 없는 세상에서 살기 위해서라도 대학평준화는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교육에 관심이 많다던 신입생 이씨의 끝맺음 말이었다.

4월 1일 금요일 6시, 연세대학교

봄을 맞아 캠퍼스는 술렁이고 있었다. 여기저기 엠티를 가는 무리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만우절과 겹친 연유인지, 새내기 토론장 안에 정작 새내기는 없었다.

"학력에는 두 개의 뜻이 있습니다. 능력을 말하는 학력(學力)과 기록을 말하는 학력(學歷)이죠. 그런데 학벌의식으로 점철된 우리의 사회엔 학력(學歷)이 곧 학력(學力)이 되었습니다."

연세대 모임을 주최한 김고종호씨의 말이다. 그가 이번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를 교내에 붙이고 난 뒤, 익명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고 한다.

"대학평준화하면 당신이 전국의 고3과 기존에 대학에 들어온 학생들을 책임질 건가요?"

김고씨는 학벌의 수혜자일 수 있는 명문대 학생들 역시 기득권화 된 것이 아닌가 하며 걱정을 했다.

"현행 교육체제 속에선 자아실현의 욕구가 아닌 사회적 만족도와 성취도를 위해 교육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과연 사회가 개인에게 그렇게 요구할 권리가 있을까요?"

연세대대학원 김신희씨의 말이다. 학부 시절, '도대체 대학은 뭐하는 곳인가?'라는 질문에 휩싸였었다는 김씨는 "수능, 고시 등의 각종 시험에 의해 소위 '한 큐'에 끝내는 현행의 교육제도는 문제는 잘 푸는데, 정작 졸업논문은 쓰지 못하는 수학과 학생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시키는 대로 따라가는 것도 능력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학벌로 고착화되어 혁신과 창조가 없다는 거죠. 한 마디로 모나지 않은 것이 뛰어났던 한국사회 속에서 학벌은 이제 무한 경쟁시대에 맞지 않는 부산물인 거죠."

"맞습니다. 적당히 성적만 따면 취직이 되는 명문대생과 죽어라 해도 안되는 지방대생이 공존하는 우리 사회는 결국 대학생들을 모두 공부 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경쟁을 방해하고 있는 거죠."

김고씨의 맞장구가 이어졌다.

"현행의 사회 속에선 대부분 소위 '있는 집' 자식들이 명문대에 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그 학벌을 이용해 자신들의 계급을 공고히 하죠. 어느 사회에서나 계급이 고착화되면 사회적 건강성을 해치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게 학벌이 준 병일 것입니다."

제대한 지 3개월 되었다는 연세대 01학번 이장원씨의 말이었다.

"그렇게 동등한 경쟁 환경을 제공하는 가장 근본적 방안이 대학평준화라고 생각해요. 서울대생들이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그들이 선천적으로 뛰어난 것보다, 그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사회적 지원, 그리고 스스로 느끼는 엘리트주의적 책임감도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왜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지' 사실 동기부여가 잘된 사람이 학습 성과가 뛰어난 것 아닙니까?"

연세대 물리학과 02학번 한진택씨의 말이다.

"현행 입시체제는 우리 학생들을 고등학교에서 다 소모시켜버려요. 그러니 대학에 와선 공부를 안 하죠. 해봤자 고시나 토익·토플 정도죠. 사실 '그때그때 상황에 맞는 교육과 평가'가 필요한 건데…."

다시 대학원에 다니는 김씨의 푸념이다. 이런 현행의 많은 폐해가 입시제도로 대표되는 학벌의 문제에서 시작된다는 것이 김고씨의 설명이다. 따라서 그는 입학에 힘을 쏟는 대학이 아닌 졸업과 실력을 위한 대학이 되는 대학평준화가 꼭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평준화의 틀 속에서 대학의 다양화와 특성화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사회 대역전 혹은 시대 대역전?

이미 우리 사회는 학벌에 찌들어 있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그것이 개인의 노력에 의한 성취물인데 뭘 문제 삼느냐고 말한다. 하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말한다. 그 개인의 성취물은 갑옷을 입고 링에 오른 사람이 벌거숭이를 상대로 녹다운시킨 결과일 뿐이라고 말이다.

어떤 이는 이미 소위 명문대 출신자들이 과반수 이상을 점거한 국회, 정부, 그리고 언론 속에선 진정한 학벌 타파의 담론은 형성되지 못할 것이라고 비관한다.

하지만 만나는 친구들에게 자신을 학벌없는 사회 소속이라고 밝힌다는 황씨, 내 자식만은 대학배치표에 의해 진학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씨, 스스로를 양심적 과외 거부자라 한 김고씨, 그리고 주변의 아는 친구와 후배들에게 김상봉씨의 책 <학벌사회>를 선물한다는 한씨. 그들과 같은 희망이 존재하는 한 사회 대역전 혹은 시대의 대역전, 대학평준화는 일어날 수 있지 않을까?

덧붙이는 글 | 매주 금요일 7시 인사동의 문예아카데미에서는 김상봉씨의 주재로 학벌없는 사회 대학모임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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