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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민수
아직은 나무도 앙상하고, 흙빛의 억새들은 아직도 다 삭질 않았습니다. '아직은'이란 말이 주는 여운은 '기다림'이라는 단어를 더욱 그리워지게 합니다. 그러나 그 그리워하는 것은 이미 내 곁에 와있음을 알게 됩니다.

겨울이라는 계절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습니다. 지난 겨울은 유난스럽게도 추웠고, 그 추위에 마음 한구석까지 싸늘하게 식어 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꽃샘추위가 지난 후 봄비가 두어 차례 내렸습니다. 봄비를 흠뻑 머금은 대지가 겨우내 품고 있었던 새순을 내놓고 갈색의 들판을 초록으로 물들여갈 것이라는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춥다고 움츠러들어 있을 때에도 봄은 이미 우리 곁을 기웃거리고 있었습니다. 따스한 햇살에 이끌려 봄의 들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 김민수
엉성한 돌담, 그러나 아무리 거센 바람도 감히 무너뜨리지 못하는 돌담입니다.

그 돌담 안에 봄이 왔습니다. 엉성한 돌담이 무슨 바람을 막을 수 있을까 했는데 돌담을 경계로 봄과 겨울의 경계선도 그어져 있었습니다.

빙 둘러쳐진 돌담 안에 화들짝 피어 있는 노란 유채꽃, 유채꽃이 화들짝 피어나면 봄도 화들짝 피어난 증거입니다. 간혹 어떤 증거들을 눈으로 보아야만 믿는 나약함에 고뇌를 하기도 하지만, 보고도 믿지 못하는 이들도 있지만, 보여지는 것이 또한 전부가 아니기에 무언가 본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이 느끼게 하는 것이겠지요.

마치 노랑물감을 돌담 안에 풀어놓은 듯하고, 그 노랑물감이 엉성한 돌 틈을 비집고 나와 온 들판을 물들여갈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봄의 영역이 커지다 어느 순간 겨울과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니라 여름과 맞물릴 것 같습니다.

▲ 보리밭의 초록물결
ⓒ 김민수
보리가 바람에 일렁이는 것이 마치 초록물결을 보는 듯합니다.

초록바다, 그랬습니다. 바다에만 파도가 일렁이는 것이 아니라 저 들판에도 파도가 일렁이고 있었습니다. 이제 조만간 저 푸른 초록의 물결 위로 보리가 하나 둘 고개를 내밀고, 이내 누렇게 익어갈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봄이 바로 곁에 왔는데 허전한 이유, 그것은 너무도 짧은 봄일 것 같은 기우에서입니다. 아직 봄도 오지 않았는데 짧은 봄을 걱정하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인간의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유채를 뜯는 아낙들
ⓒ 김민수

유채나물을 뜯는 아낙들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푸릇푸릇한 유채나물 속에 들어있는 봄, 그 향기가 아삭하게 씹힐 것만 같습니다.

새벽 동트기 전부터 해질 녘까지 열심히 유채를 뜯고 받는 일당은 3만원이라고 합니다. 많으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종일 일해서 그렇게 모으고 또 모아도 쪼들리는 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그들이 못 배워서가 아니라 이 사회구조가 악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땀방울 흘리는 노력도 없이 몇 십억씩 주무르는데 그것이 바로 능력이라고 여겨지는 사회풍토가 문제인 것입니다.

꿈이지요.

열심히 땀 흘리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들이 대접받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그냥 꿈이지요. 그러나 그 꿈이 현실이 되는 꿈을 꾸는 것, 비록 그것이 꿈일지라도 놓아버릴 수 없는 꿈입니다.

▲ 하도리해안가의 유채밭-앞에 보이는 섬은 소를 닮은 섬 '우도'
ⓒ 김민수
해안가에 화들짝 핀 유채꽃, 그 물결이 수 천 수 만 겹의 파도를 압도합니다. 봄비가 한 차례 지난 후 유채의 노랑색의 더욱 더 진해지고, 풍성해졌습니다. 추위에 바들바들 떠는 것도 모자라 바닷바람에 온 몸이 흔들렸는데도 때가 되니 활짝 피어난 유채꽃을 보면서 삶이란 힘들어도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관광차들이 유채꽃밭에 서고 관광객들이 하나 둘 내려 유채꽃밭에서 기념사진을 찍습니다. 나이 많으신 어르신들, 이 곳 제주에서 종일 땀 흘려 일하는 투박한 손을 가진 이들 같은 분들이십니다. 아마 제주도 여행을 위해서 일년 동안 계를 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평생소원이었던 제주여행을 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이고, 아마 이번 여행을 끝내고 뭍으로 돌아가면 내내 '언제 다시 그 곳에 가볼꼬' 하며 빛바랜 사진을 보면서 추억만 간직하실 분도 있을 것입니다.

일상처럼 다가오는 풍경들이 어떤 분들에게는 평생소원일 수도 있고, 이뤄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익숙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것 같습니다.

▲ 남제주군 대정읍의 마늘밭
ⓒ 김민수
지난 겨울이 너무 길어서 텃밭에 심겨진 마늘들은 자잘한데 남제주군 대정읍의 마늘밭은 자잘한 나의 텃밭 것과 비교하면 팔뚝만하다고 표현해야 할 것 같이 굵습니다. 내가 농사지은 것이 아닌데도 마음이 뿌듯합니다.

무럭무럭 실하게 자라서 정성껏 가꾼 이들에게 환한 웃음을 안겨주길 바랄 뿐입니다. 누군가의 작은 행복이 나의 행복도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종종 그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는 봄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보니 봄타령이 길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봄타령을 하다 봄비 맞은 들판을 바라보니 이미 봄은 우리 곁에 와있었습니다. 그 짧은 봄이 봄맞이를 하기도 전에 서둘러 떠나려는 듯 채비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바빠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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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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