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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우리 집에 내려 온 천사^^
ⓒ 장영미
2004년 나만의 특종이라면 역시 큰 아이와 7년 터울의 아들을 얻은 일일 것이다. 별 일 없이 잘 태어난 것이라면 이야깃거리도 아니겠지만, 이 녀석이 태어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사연은 아마도 평생을 우려먹을 레퍼토리가 될 것이다.

2004년 새해를 맞으며 난 의욕에 넘쳐 있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오마이뉴스>에 글을 올리기 시작해 그 재미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새해에는 좀더 글쓰기의 영역을 넓혀 보다 알차고 재미있는 글을 써보자고 다짐했을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마음도 차분하고, 평안하고, 정신이 맑게 느껴지는 게 올 한 해는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것 같았다.

임신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앞을 가로막았다. 새해 시작과 함께 아이가 생긴 것이다. 남편은 여자 형제가 없는 외아들이고, 나는 딸만 셋인 집의 맏딸로 두 동생은 아직 미혼이다. 한국식 사고로는 아들 하나 낳으라고 꽤 닥달을 받을 만한 처지였다.

그렇지만 우리는 7년 전 딸아이를 하나 낳고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았다. 왜냐하면 남편은 아이를 효도용(?)으로 하나 낳은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아이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고, 나도 타국에서 혼자 아이를 키우다보니 너무 힘들어서 둘째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 이제 와서 웬 날벼락인가 싶기도 하고, 내가 아직은 생산 능력이 있는 건강한 여자라는 사실이 기쁘기도 했다. 동시에 아이를 별로 원하지 않던 남편의 착잡한 얼굴과 늘 둘째 타령을 하시던 친정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기쁨에 찬 얼굴이 클로우즈업 되면서 복잡한 심정이었다.

마음을 수습해 별렀던 여러가지 계획을 접고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대신 내가 경험하게 될 일본에서의 임신, 출산, 육아에 관한 이야기와 관련 정보 등을 육아일기 형식으로 써보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 같았다. 덕분에 태교 삼아 차분히 책도 많이 읽고, 성경공부도 하는 등 스스로를 갈고 닦을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고 여긴 것이다. 나를 찾아 밖으로 나가려던 것에서 안으로 들어와 침잠하는 가운데 나를 찾는 것도 분명 방법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출혈

나른하고, 쉬이 지치고, 심하진 않지만 입덧이 시작돼 하루하루가 힘들게 지나갔다. 하루 빨리 안정기에 접어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게 일이었는데, 임신 3개월이 되던 날 밤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유치원생이었던 딸아이는 잠들어 있었고, 남편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는데 소변이 새는 듯 뭔가 흘러내렸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출혈이었다. 그치지 않고 자꾸 흘러내리는 게 아주 불쾌했다. 금방이라도 아이가 핏덩이가 되어 쏟아져 나올 것만 같아 너무 무서웠다. 다리가 어찌나 후들거리는지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병원을 가자니 딸아이가 걱정이었다. 데려갈 수도 없고, 두고 가자니 자다가 깨기라도 하면 큰 일이었다. 일본에서 달랑 세 식구가 살고 있는데 밤늦게 이웃이나 친구에게 폐를 끼치기도 그렇고, 더욱이 부탁하고 말고 할 여유도 없었다. 남편은 자는 아이를 깨워 소변을 보게 한 뒤 다시 재웠다. 만약을 대비해 큰 글씨로 편지를 써두었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울지 말고 기다려. 아빠가 금방 올게.'

진찰을 받는데 의사의 얼굴을 보니 불그레한 게 한 잔 하던 중이었나보다. 그것마저도 불안했다. 다행히 아기는 건강했다. 자궁내막에 혈종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게 터진 것 같다고 했다. 그 길로 입원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입원을 하긴 했지만 걸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갑작스런 입원인지라 남편이 모든 것을 떠맡아야 했다. 집안 일은 물론이거니와 아이 챙기는 일, 직장 일, 거기다 내 병원 뒷바라지까지 1인 4역이었다. 한국에서 부모님이 오신다는 것을 남편이 말렸다. 그가 혼자서 해낼 수 있을지 너무도 걱정이 되어서 병원에 누워있는 게 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주일 후엔 딸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이었다.

졸업식, 입학식

다행히 더 이상의 출혈은 없었다. 4일째 되는 날 퇴원 허가를 받았다. 졸업식에 꼭 참석하고 싶어하는 나를 위해 의사가 무리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참석하라고 허락을 한 것이다. 남편도 딸아이도 자기 역할을 잘 해주어서 별 일 없이 잘 넘긴 것 같았다. 천만다행이었다.

남편이 애를 많이 썼다지만 역시 집안은 엉망이었다. 물건이며 옷가지들이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모두 밖으로 나와 있었다. 의사도 절대안정에 가벼운 가사 정도만 하라고 했고, 남편도 가만히 누워 있으라는데 나도 모르게 이것저것 꾸역꾸역 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웠지만 그게 주부의 맘인가 보다.

퇴원한 지 3일 후 딸아이의 유치원 졸업식에 참석했다. 2주일 후엔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었다. 첫 아이의 졸업과 입학인지라 학부모로서 긴장도 되고, 기대감도 컸는데, 모든 게 조심스러울 때여서 제대로 뒷바라지를 못해준 것 같아 아이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통증

더 이상의 출혈도 없을 뿐더러 초음파 검사 결과 태아는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니 이제 한숨 돌렸구나 싶었다. 두 번째 아이여서인지 태동도 빨리 느껴졌다. 장이 미세하게 꿈틀거리는 느낌, 아주 오랜만에 느끼는 신비감이었다. 적당히 나른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부드럽고 작은 움직임. 마치 잔잔한 물결 위에 물방울이 하나 맺혔다가 꺼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5월 5일, 일본의 황금연휴가 끝나는 날 밤,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긴가민가 싶을 정도로 미세하게 주기적으로 통증이 왔다. 그 즈음 저녁이면 몹시 피곤하고 아침이면 가쁜해지는 일이 계속되었던지라 그날도 피곤해서 그렇겠거니 했다.

다음날은 마침 '초기임산부교실'에 참석하는 날이어서 병원에 갔다. 강의 내내 전날 밤보다 강도가 센 진통이 주기적으로 느껴지는 게 이상해서 진찰을 받았다. 의사는 태아도 건강하고, 자궁구도 확실히 닫혀 있는데다 안정기에는 자궁 수축이 오지 않는데 웬일인지 모르겠다며 일단 수축 억제제를 일주일간 먹어보라고 한다.

진찰한 김에 태아의 성별을 물어보았다. 일본에서는 5개월쯤 되면 초음파상에 태아의 성별이 보이면 알려준다. 의사 왈 "100% 사내아이네요" 뭘 보고 그렇게 판단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100%라는 말만 믿고 양가 어른들에게 보고를 했다. 어른들이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고나니 내가 바로 들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잘못 들었거나 의사가 실수한 것이면 큰 낭패가 될 것이었다.

지금도 난 어른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시는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괜스레 내가 무슨 장한 일이라도 해낸 사람 같이 느껴지게 하니 말이다. 내가 아들이라니 좋은 이유는 딱 두 가지, 목욕탕이나 온천에 갔을 때 내가 데리고 가서 씻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과 외출했을 때 내가 도맡아 화장실에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 정도인데 말이다.

하루치 약을 먹었는데도 진통이 가시기는커녕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았다. 게다가 아파서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릴 수 없는 게 이상했다. 다음 날 병원에 갔다. 초음파상으론 이상이 없단다. 의사에게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릴 수 없다니 그제야 의사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다시 초음파 검사를 하더니 자궁 오른쪽에 직경 5cm 정도의 근종이 있는데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금시초문이었다. 6개월 전에 받은 건강검진 때도 자궁선근증이라는 말은 들었어도 근종은 없었다. 그 근종에 염증이 생긴 것이란다.

두 번째 입원

다시 입원을 해야 한다는데 눈물이 났다. 또 고생할 남편과 딸아이가 가엾고, 아기가 잘못될까봐 걱정이 되어 가슴이 미어졌다. 곧바로 전에 머물던 병실로 갔다. 즉시 옷을 갈아입고 채혈한 후 항생제와 수축 억제제를 맞기 시작했다. 혈액검사 결과 염증수치가 제법 높게 나왔다. 역시 근종에 염증이 생긴 것이었다.

지난 번에 경험이 있어서인지 남편은 척척 짐을 잘 꾸려왔다. 남편은 나를 위로하는데 오히려 난 남편과 딸아이에게 더 미안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었는데 남편은 급하게 마감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하루 저녁 아이를 데리고 있기로 했는데 진통이 점점 심해져 아이를 상대해 줄 수가 없었다. 아이는 심심해서 죽을 지경인 모양으로 그만 삐쳐버렸다.

그날 밤 약이 듣지를 않는지 투여량을 늘였는데도 진통이 가시기는커녕 더욱 심해졌다. 5, 6분 간격으로 진통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아기를 낳을 때의 산고와 다름없었다. 식욕도 없고, 간호사들의 태도를 보니 상태가 심상치는 않은 것 같았다. 다시 혈액검사를 했는데 오히려 수치가 더 높아졌다. 회진에서 의사가 이대로 수축이 계속되면 유산할 가능성이 있다며, 치료가 길어질 수 있으니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단다.

난생 처음 구급차에 실려 NICU(Neonatal Intensive Care Unit; 신생아집중치료실) 시설이 잘 되어 있다는 인근의 종합병원으로 옮겨졌다. 당시의 우리 아기는 400g 정도였고 그대로 태어나면 현재 일본의 의학으론 살릴 수 없다고 했다. 이전 병원의 의사는 최소한 600g은 넘어야 한다고 했고, 새로 옮긴 병원의 의사는 1000g은 넘어야 한다고 했다. 최대한 자궁에서 키워야 했고, 만약을 대비해 NICU가 필요했다.

배에는 분만감시장치가 붙여졌고, 자궁 수축제에 항생제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항생제가 듣지 않으면 계속 종류를 바꾼다고 했는데 다행히 처음 처방받은 항생제가 맞는 모양이었다. 의사가 부작용이 있을 거라더니 몸이 후끈 달아오르고 열이 났다. 내가 아프고 힘든 것보다 뱃속에서 고생하고 있을 아이를 생각하니 안쓰러워서 눈물만 났다.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아픔을 참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날이 갈수록 통증도 줄고 수축 간격도 길어졌다. 그리고 일주일 후엔 개인실에서 4인실로 옮겨졌다. 그 병원에선 절대안정을 취해야 하는 중환자를 위해 개인실을 비워두고 있었다.

동병상련

처음엔 몰랐는데 그 병실은 절박유산, 절박조산, 임신중독증 등 임신트러블이 있는 환자들을 모아놓은 곳이었다. 비슷한 처지에 있다보니 서로 얘기가 통했고, 입원 기간이 길어서 가족들까지도 서로 친해졌다.

젊고 예쁜 마호는 입덧이 심해 입원 중이었고, 나보다 3살 많은 나오미는 고령 출산인데다 딸아들 이란성 쌍둥이를 가졌는데 그 중 사내아이 쪽에 양수가 적어서 입원 중이었다. 우연히도 입원한 시기도 기간도 비슷한데다 살가운 성격들이 맞아서 금세 친해졌다. 나머지 한 침대는 환자가 자주 바뀌어서 친해질 기회가 없었다. 우리 방 분위기가 화기애애하니까 간호사들이나 청소 아줌마들도 가끔씩 수다를 떨고 가곤 했다.

첫 아이 땐 별 문제가 없어서 몰랐는데 임신 트러블이 있는 사람이 꽤 많은 것 같았다. 내가 입원 중에 겪은 사람들만 따져도 절박유산, 절박조산, 임신중독증, 전치태반, 입덧, 양수가 적은 사람, 아기가 작은 사람 등 이유도 다양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게 위로가 되기도 했고, 그런 트러블을 고쳐주는 의사가 정말 존경스러웠다. 마호, 나오미와는 지금도 서로 연락을 하며 잘 지낸다. 다들 무사히 출산을 해서 지금은 육아에 정신이 없지만 말이다.

약물주사에서 내복약으로 바뀐 지 25일만에 퇴원을 했다. 24주째였다. 그동안 기약없는 입원생활에 남편과 딸아이가 고생하는 것을 보면서 너무 속상해서 울기도 했고, 안타까웠던 적도 많았는데 '안정'이란 꼬리표가 달리긴 했어도 드디어 퇴원이었다.

이번 일로 우리 세 식구 아니, 네 식구가 꽁꽁 묶여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무엇보다 큰 수확이었다. 전엔 엄마로서 아내로서 뚜렷한 자각없이 부유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사소한 일에도 짜증나고 손해보고 있다는 느낌도 있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확실히 내 자리를 찾은 것 같다. 전엔 껍데기밖에 보이지를 않았는데 이번 일로 그 속에 꽉 들어찬 알맹이를 보고 난 느낌이 들었다. 특히 남편이 그렇게 헌신적이고 애정어린 사람이었다는 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이사

첫 번째 입원 후 모든 게 순조로울 때, 지은 지 몇 년 안 된 새 관사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을 해놓았었다. 아기를 키우려면 낡아서 추운 집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아서였다. 새 관사가 비다니 운이 좋았다.

퇴원 후 한 달쯤 지나서 이삿날을 잡았다. '안정'을 취해야 하는 내가 짐을 싸고 푼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짐싸는 것 전부와 부엌 살림만 풀어서 정리해주는 것으로 계약을 하고 이사를 했다.

짐을 풀어 정리하는 일은 일일이 내 손이 가야 했다. 알맞는 곳에 배치하고, 수납하고, 정리하고, 쓸고, 닦고…. 다들 무리하지 말고 그냥 대충 지내라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곧 새 식구도 생기는데 말이다.

대충 짐들을 눈에서 보이지 않게 정리하는데 한 달이 넘게 걸렸다. 정리가 끝난 후부터는 출산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당장 필요한 아기옷, 기저귀, 이불 등은 시어머님께서 꼼꼼이 챙겨서 보내주셨다. 나머지 부족한 것들과 입원준비물 등을 챙기는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일본의 육아용품 중에 한국과 다른 것들이 있어서 나름대로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쉽게 쇼핑을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으니 말이다.

사상 최고의 무더위

퇴원 후 언제부터인가 몹시 더워지기 시작하더니 연일 37, 38도를 넘나드는 더위가 계속되었다. 그러더니 급기야는 40.4도까지 올라갔다. 관측사상 가장 높은 온도였던지 일본 전국 뉴스는 물론 한국의 뉴스에서도 보도되었다고 들었다. 거기다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더운 열대야가 무려 35일 가량 이어졌다고 하니 올해는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다.

게다가 나는 출산이 가까운 임산부인데다 수축 억제제를 먹고 있어서 몸에서 더 열이 났다. 가만히 있어도 머릿속에서 땀방울이 주르륵 흘러 뚝뚝 떨어졌다. 그래서 머리카락은 늘 흠뻑 젖었고, 밤이면 에어컨에 선풍기를 켜놓아도 더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남편과 딸아이는 춥다고 이불을 끌어다 덮는데 말이다.

그렇게 땀을 흘려보기는 생전 처음이었고 아마도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그런 발한증상은 출산 후에도 한 달 정도 더 계속된 것 같다. 정말 올해의 더위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출산

두 차례의 입원, 이사, 무더위 외에 각종 피부 트러블까지 정말 우여곡절이 많은 임신 기간이었다. 처음엔 현대의학이 살릴 수 있을 정도만이라도 뱃속에서 키우자는 게 목표일 만큼 절박했는데 6개월, 7개월, 8개월이 지나 드디어는 언제 태어나더라도 스스로 호흡할 수 있다는 35주까지 왔다. 수축 억제제를 먹지 않아도 되었다. 아무리 태아에게 안전한 약이라고 해도 먹지 않는 것만은 못할 게 아닌가. 그래서 늘 불안했었다.

일련의 소동은 결국 아이에게 문제가 있어서 벌어졌던 것은 아니었다. 다 내 몸이 부실해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 탓에 아이만 고생을 한 셈이었다. 와중에도 아이는 늘 씩씩했고 튼튼했다. 진찰 때마다 "아이가 크네요"하는 소리를 줄곧 들었다. 누구는 아이가 작아서 입원을 하는데 나는 오히려 입원 중에도 아이가 너무 클까봐 걱정을 해야 했으니 아이러니하다.

35주가 되자 출산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첫 아이를 제왕절개로 낳았지만 둘째 아이는 자연분만으로 낳을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줄곧 자연분만을 전제로 임산부 교실에도 참석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가족들은 안전하게 수술하기를 권했다. 너무 여러가지 일들이 있다보니 되도록 위험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결국 만 37주 되던 날 수술을 했다. 3.305g의 건강한 사내아이였다. 그제서야 온 가족이 한숨을 돌렸다. 여리고 여린 살갗이 무척 보드라웠다. 쌔근쌔근 잠든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 하루 종일 들여다보아도 질리지 않고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진짜로 배는 여전히 불러 있었다).

"건강하고 예쁜 아기를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고생 많았다, 아가야. 건강하게 태어나주어 정말 고맙다."

벌써 100일이 지나 곧 만 4개월이 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놀고, 잘 자고, 그리고 정말 잘 떠들고, 소리내어 잘도 웃는다. 오랜만에 아기를 보니 어떤 것은 새롭기도 하고, 어떤 부분은 익숙하기도 하다. 첫 아이 때와 달리 세월이 무척 빠르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우리 가정에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게 좋다. 아이들은 보물이라고 하더니 요즘은 이 녀석 덕분에 온 집안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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