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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6월 어느날, 어머니가 황망한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아이고, 큰일났다. 막내가 사고쳤다.”
“왜? 또 교통사고 났어?”
작년 겨울에 막내가 가벼운 접촉 사고를 냈는데, 상대방이 병원에 드러눕는 바람에 한바탕 송사에 휘말린 적이 있었던 터라 순간 긴장했습니다.

“그게 아니고… 장가 간댄다.”
잠시 어리둥절. 하지만 곧 상황이 파악됐습니다.

“…헉. …진짜 사고 쳤구나….”

▲ 우리집에 떠오른 '태양이'
ⓒ 이선이
그날 밤 긴급 가족회의가 소집됐습니다. 할머니와 부모님, 두 남동생 그리고 막내의 여자 친구까지 제각각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둘러앉았습니다.

올해로 스물여섯인 막내와 스물다섯인 여자 친구는 아직 졸업도 하지 못한 상황이고, 더구나 우리집에는 서른 먹은 노처녀 큰 딸(바로 접니다)과 스물여덟 먹은 장손까지 버티고 있습니다.

할머니는 이게 웬 집안 망신이냐는 표정으로, 아버지는 졸지에 여덟 식구의 가장이 된 무거움으로, 그리고 저와 큰 동생은 막내 동생이 애 아버지가 된다는 황당함으로 차마 뭐라 할 말을 못 찾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막내 동생은 희희낙락입니다. 저녁에 여자 친구의 아버지를 뵙고 왔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는 자초지종을 듣고 술맛이 뚝 떨어진 표정이긴 하셨지만, 그래도 크게 호통을 치지는 않았나 봅니다.

막내는 여자 친구의 입장도 있고 하니 여름 방학을 이용해서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고 했습니다. 알고 보니 둘이서 진작부터 병원 다니면서 검사하고, 초음파 찍고 나름대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네요. 어쩌겠습니까? 급한대로 조만간에 양가 상견례를 하기로 하고, 가족 회의를 끝냈습니다.

그 뒤로 예비 올케는 자주 우리집에 와서 며칠씩 지내다 갔습니다. 식구들이 출근하고 나면 혼자 계시는 할머니 말벗도 하고, 나날이 무거워지는 몸을 움직여 집안 살림도 하면서 어느 틈인지 모르게 우리 식구가 되어 갔습니다.

올케는 시할머니부터 시누이까지 줄줄이 있는 시댁에서도 아무 스스럼이 없었습니다. 몇 번 만나지도 않은 제 앞에서 윗옷을 올리고 “언니, 제 배 좀 보세요. 배꼽이 퍼졌어요”자랑하기도 하고, 막내 동생의 비리를 고자질하기도 하고, 온 식구들에게 아기 초음파 사진을 구경시키기도 했습니다.

저는 올케 덕분에 할머니가 변비로 고생하신다는 것도, 막내 동생 귀가 조롱박처럼 생겼다는 것도, 우리집 거실에 있는 자주색 화초가 햇빛을 받으면 잎이 나비 날개처럼 펴진다는 것도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 식구는 어느 틈엔가 모두 올케 편이 되었습니다. 아니, 거의 팬클럽 수준입니다. 세 여자가 막내의 철없음에 비분강개하여 닥달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시집 온 후 처음으로 퇴근길에 과일을 사오셨습니다. 무뚝뚝한 큰 동생도 “제수씨,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요”하며 자신의 쇼핑몰 상품을 내주기도 했구요.

지난 11월 20일 오후 늦게, 온 식구가 오매불망 기다리던 조카가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아기가 소화 기능이 너무 약해서 바로 인큐베이터에 들어갔습니다. 올케는 “제가 마지막에 힘을 더 줬어야 됐는데, 못 그랬거든요… 너무 힘이 들어서요…”라며 훌쩍거리더군요. 저는 힘 주는 것과 소화 못 시키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싶긴 했지만 그래도 어린 올케가 안쓰러워 눈물이 찔끔 났습니다.

태어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집으로 온 우리 조카는 '태양'이라는 이름을 얻고, 지금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습니다.

막내 동생과 올케는 양가 사정이 여의치 않아 지난 여름에 약혼식만 올리고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내년 봄쯤, 토실토실한 태양이를 앞세우고 식장에 들어서게 되겠지요.

느닷없이 찾아온 새로운 가족, 올케와 우리 태양이는 온 식구의 '2004년 특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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