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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소년원을 찾아 강연하고 있는 고은 시인.
ⓒ 홍성식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수 차례의 투옥과 고문을 겪은 바 있는 고은(72) 시인이 자상한 할아버지의 웃음을 띠며 강단에 올랐다.

"나는 별이 4개야. 별이 뭔지 알지? 전과 4범이란 말이잖아. 내가 여러분 선배야. 내 과거가 그랬듯이 여러분의 현재는 매우 불행한 조건 속에 있어. 하지만, 가능성이란 어느 인간에게나 공평하게 열려있으니, 아직은 절망할 때가 아니야. 용기와 희망을 가져."

세칭 '빵잽이(수감자를 이르는 속어) 문인'들이 16일 경기도 안양 소재 정심여자정보산업학교(안양소년원)를 방문해 90여명의 수감학생(이하 학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전과자 문인'과 학생들의 전격적인 만남은 지난달 결성된 독특한(?) 문인단체 '별과 꿈 문학회(회장 정도상)'가 진행하는 '소년원 수감 청소년을 위한 문학치료 사업(문예진흥원 후원)'의 일환으로 이뤄졌다.

'별과 꿈 문학회'에는 고은 시인 외에도 <오적> 필화사건과 민청학련사건 등으로 7년 이상 영어의 몸으로 지냈던 김지하(64) 시인과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모자로 4년6개월의 실형을 산 소설가 김은숙(48) 등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 옥살이를 하거나 유치장에 다녀온 36명의 문인이 참여하고 있다.

이날 고은 시인의 강연에는 정도상 회장, 소설가 이경자와 김은숙 그리고, 민족문학작가회의 김형수 사무총장이 동행했다. 이들은 강연이 끝난 후 향후 진행될 '문학치료(시-소설 창작연습)'에 관한 설명의 시간도 가졌다.

고은 시인은 <데미안>에 등장하는 '알의 깨는 고통' 등을 인용하며 강연을 이끌었고, 강당에 모인 학생과 법무부 관계자, 교직원들은 시종 진지한 태도로 이를 경청했다.

어색한 분위기 녹인 김은숙의 말 "5년 가까이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이어 열린 문인들과 시와 소설을 배울 소모임 학생들의 '상견례'. 아직은 어색한지 어린티가 물씬한 10여명의 학생들은 "이름이 참 예쁘구나. 누가 지어준 거니" 혹은 "OO이는 모델 XX를 닮았네"라는 이경자와 김은숙의 말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은 채 숙인 고개를 쉽게 들지 않았다.

▲ '별과 꿈' 회원인 문인들. 좌로부터 고은, 김은숙, 이경자.
ⓒ 홍성식
분위기는 소설가 정도상의 "은숙씨는 징역을 얼마나 살았지요"라는 물음에 김은숙이 "5년에서 조금 모자라요"라고 답하면서 풀렸다. 학생들은 낮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고개를 들어 지대한 관심을 표했다. 그 표정 속엔 "예쁘장하게 생긴 아줌마가 무슨 이유로 그렇게 오래 감옥에 갇혀 있었을까"라는 물음표가 담겨있었다.

이후의 시간들은 처음보다 훨씬 화기애애했다. 학생들은 자기 고향과 이름 그리고, 남자친구의 유무까지 돌아가며 이야기했고, 마지막엔 문인들이 준비한 초콜릿과 과자를 주머니에 서로 담으려는 또래다운 귀여운 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이날 자리를 함께 한 법무부 관계자는 "사회로부터 소외된 소년원학생들이 시인, 소설가들과 진실한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신들의 체험을 문학을 빌어 표현함으로써 긍정적인 자아를 발견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정도상 회장 역시 "누가 누굴 가르치고 배운다는 것보다 서로가 자신이 겪어온 삶에 대해 진실하게 이야기하고, 이를 통해 인간적 소통을 하려한다"며 "민주화운동 경력을 자랑하려는 것도, 시혜의 제스처도 아니다. 우리와 학생들 모두가 잊고 살았던 인간의 존엄성을 함께 알아가려 한다"는 말로 이번 '문학치료'의 의미를 설명했다.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삶'을 향한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

향후 '소년원 수감 청소년을 위한 문학치료 사업'은 2주 간격으로 9월까지 이어진다. 소설가 황석영과 송기원, 시인 이시영과 황지우 등이 학생들과의 '진실한 대화'에 나서고, 영화제작자 차승재(싸이더스 대표)도 4월 말 학생들과 만난다.

7월에는 학생들이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문학현장 답사'와 '영화촬영장 견학'이 계획돼 있고, 시와 소설창작 외에도 단편영화 제작강의 및 상영도 진행될 예정이다.

▲ 안양소년원 곳곳에 핀 꽃들
ⓒ 홍성식
3시간여의 아쉽고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고은 시인 일행은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주차장을 향했다. 완연해진 봄. 화사한 4월의 정령은 안양소년원에도 어김없이 찾아왔고, 곳곳이 개나리와 목련의 꽃무더기로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 취한 탓일까. 기자는 이날 만난 수십 명 학생들 모두가 그 꽃들과 닮았다는 생각에 잠시잠깐 우울해졌다. 그 우울한 심사를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아름다운 삶을 향한 꿈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고은 시인의 말이 위로해줬다.

안양소년원 90여명의 학생들도 아직은 창창한 앞날의 '희망'을 생각하며, '아름다운 삶'을 향해 가는 길을 늦었다 생각 말고 부지런히 찾아가기를 기대한다.

한때의 '실수'란 인간 누구나가 저지를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들에게 '희망'과 '꿈'을 돌려주려 나선 문인들의 책임이 막중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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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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