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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에 자신의 소원을 쓰기만 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듯이 그 열기가 대단하다
ⓒ 김형순
‘소/리/시/사/랑’의 새해기원 굿

2004년 마지막 토요일, 성탄절이기도 한 지난 25일 인사동 입구 야외 공연장 일명 남인사마당에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탄생’이라는 주제로 오후 4시부터 한 시간 남짓 ‘거리 詩 퍼포먼스’가 벌어졌다. 30-40미터 긴 광목에 각자의 간절한 새해 염원을 담는 쓰는 행사가 있어 사람들의 눈길을 많이 끌었다.

소/리/시/사/랑은 알고 보니 이미 여러 번 詩 퍼포먼스 공연을 한 단체였다. 이 단체의 대표 이춘우씨의 명함에는 건축가라는 직함과 함께 시낭송가라고 쓰여 있어 조금은 당황했다. 전국 시 낭송대회에서 수상을 하신 경력이 있는 것 같다. 명함에 소/리/시/사/랑은 ‘좋은 시를 사랑하고 낭송을 즐기는 소박한 시낭송인 마을’라는 글귀도 인상적이었다.

지난 11월부터 소/리/시/사/랑은 젊은이 중심으로 실험극을 추구한 극단 ‘청년’(대표 이민우/1998년 창단)과 연합으로 시와 연극, 노래, 음악, 춤이 모두가 하나로 어우러진 시극 형식으로 된 ‘오르골-시와 사랑 실은 자전거’를 1달간 동숭동 열린 극장에서 공연을 펼쳐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다.

▲ 이 모임의 회원이신 홍성훈씨에 의해서 행사의 개시 멘트가 시작된다
ⓒ 김형순
낮은 북소리에 맞춰 행사 시작을 알리고

조금 산만하기는 했지만 이 모임의 회원인 홍성훈씨에 의해서 행사가 시작되었다.

"갑신년 한해가 저물어갑니다. 유난히 힘들고 어려웠던 한해가 저물고 있습니다. 어둡고 힘겨운 상실과 결핍의 세상이랑 묵은 때 씻어내듯 과거 속으로 훌훌 벗어버리고 털어내 버립시다.”

그리고 이렇게 말을 잇는다. “오셔서 함께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다짐으로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탄생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노래를 부르십시다. 을유년(乙酉年) 새 아침의 희망을 이야기하십시다.”

▲ 소/리/시/사/랑 회장이 직접 일필휘호를 큰 글씨로 “을유년 새해 새아침 새 희망으로 …” 라고 써 내려간다
ⓒ 김형순
"당신 만난 올해 참 행복했어요”, 이런 감회와 새해 각오를 적으며

그리고 옆에서는 대표님이 직접 5호정도의 큰 크기로 일필휘호를 이렇게 “을유년 새해 새아침 새 희망으로 맞이합시다! 사랑합시다. 서로 […]” 써 내려가고 있다.

그 동안 사람들은 30~40미터 긴 광목에 거리의 사람들은 여기에 소원을 쓰면 다 이루어진다는 깊은 믿음(?)을 가지고 다닥다닥 붙어서 자신들의 꿈과 염원이 담긴 문구들을 주최 측에서 미리 준비한 유성 펜으로 쓰고 있었다.

▲ 벌써부터 새 해 새 아침이 훤히 밝아오는 듯하다
ⓒ 김형순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지 아니면 신참 부부인지 알 수 없으나 여자가 먼저 1년의 감회를 긴 천에 쓰고 남자가 뒤를 잇는다.

여자는 “당신을 만난 2004년 참 행복한 한해였습니다. 2005년 참 아름다운 한 해 될 수 있도록 사랑합시다. 봉진에게 진영이가”라고 썼고, 남자는 “진영 당신을 많이 사랑합니다. 당신의 남편 봉진”라고 썼다. 옆에서 보기에도 뜨거운 부부애를 느낄 수 있었다.

그밖에도 입시나 고시에 합격시켜 달라는 솔직하고 현실적 소원과 염원 개인의 건강과 가장의 화목과 나라의 안녕과 발전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문구가 그 흰 광목에 그득그득 넘쳤다.

후천 개벽을 설파한 해월 선생과 다르지 않은 염원들

보통 사람들의 갖가지 소원은 100년 전 해월 선생의 염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을 하늘로 모시는 인/내/천과 자연을 하늘로 모시는 지/내/천을 이룰 때 2004년 극심한 정치적 대립과 경제적 불균형이 해소될까 싶다.

‘그렇다/아니다’의 시비의 세계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원순환적 세계 즉, 음이 양이고 양이 음이고, 선속에 악이 있고 악속에 선이 있으며 음과 양 선과 악은 대립이 아니라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인정하는 순환적 질서와 상생의 세계를 동경하게 된다.

▲ 송형익씨의 멋진 기타 선율에 지나가는 거리의 사람들 끌어안아 가슴에 품는다
ⓒ 김형순
기타 연주소리에 잠시 숨을 돌리고

잠시 숨을 돌리는 동안 송형익 씨의 멋진 기타 선율에 스쳐가는 거리 사람들 끌어안아 가슴에 품어 안는다. 때로는 조용하게 때로는 우렁차다. 독일 유학 경험이 있는 전문가답게 그의 기타 솜씨는 수준급이다.

그의 홈페이지(www.Guitarac.com)에 가면 멋진 기타곡도 들을 수 있다. 기타의 그 특이한 음색은 우리를 낭만적 인간이 되게 하고 음악에 심취하게 한다. 추위도 다 녹여버린다.

▲ 홍성훈과 이춘우 두 분이 번갈아 가면서 낭랑한 목소리를 박두진 시인의 불사조의 노래를 낭송하고 있다. 마치 스테레오 음악을 듣는 듯하다
ⓒ 김형순
대중들이 거리에서 다시 시를 만나는 자리

소/리/시/사/랑은 대중과 멀어진 시를 거리로 직접 나서서 대중과 만나려는 시도가 참신해 보인다. 보통 시를 사랑하지 않고는 이런 퍼포먼스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시는 2004년 12월 문화인물인 선정된 박두진 시의 '불사조의 노래'이다.

이 시를 홍성훈과 이춘우 두 분이 낭랑한 음성으로 번갈아 들려주니 스테레오 음악처럼 입체감이 난다. 전문가들이지만 연습을 많이 한 흔적이 보인다. 시 구절 하나하나 깊은 뜻을 되새기다 보면 감동과 전율이 가슴에 와 닿는다. 여기에서는 지면상 일부만 소개하고자 한다.

불사조의 노래

이제는 일어나야 할 때다.
이제는 잠자던 의식의 나뭇가지에 활활 불을 댕겨야 할 때다.
이제는 죽은 듯 식어져 차갑던 잿더미에서
푸드득 푸드득 불사의 새 새끼들은 날려 올려야 할 때이다.

이제는 우리들의 정신, 녹슬고 정체된 감정의 바다에
노한 파도 밑으로부터 소용돌이쳐 올라오는 힘
잃어버렸던 까맣게 잊어버렸던 스스로의 힘을
불러일으켜야 할 때다

[…]

불사의 새여! 불사의 새여!
푸드득 푸드득, 푸드득 푸드득
이제는 우리들의 나래를 퍼덕여 올려야 할 때다.
시집 <불사조의 노래(1987)> 중에서

이 시는 1987년 6월 항쟁에 고무되어 쓴 것 같은데 박두진은 청록파이면서도 박목월이나 조지훈과는 아주 다르게 현실 참여적 시를 써 왔다. 히브리의 예언자이고 시인인 예레미아처럼 박두진은 한반도의 예언자이자 큰 시인이었다.

▲ 무용가 신미경 선생은 이매방 선생의 제자로 30년 이상 한국무용을 공부한 사람답게 북춤에서 단번에 대단한 신령함을 보인다
ⓒ 김형순
시 퍼포먼스의 최고의 꽃, 북춤

이 춤 공연은 팸플릿에 ‘부제로 땅에서 하늘로’라고 소개되어 있다. 1부 '땅의 울림(地)', 2부 '인간의 노래(人)', 3부 '하늘로 새날로(天)' 순으로 되어있다.

기의 소통이 하늘에서 내려 사람에게 가고 그것이 땅으로 내려가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땅(地)에서 발산하는 기는 사람(人)의 몸으로 들어가고 또 다시 그 기가 하늘(天)로 발산하는 과정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춤의 기획의도를 물어보니 이것은 땅의 기운을 받아 하나의 생명이 잉태하고 그 찢어지는 듯한 해산의 고통을 통해 새로운 염원이 태극에 닿으면 새 세상이 열린다는 뜻이라 한다. 역사의 원리를 인간 생명의 태동과 비유한 것이다. 무용가는 아이를 낳을 때 기절한 이야기까지 나에게 들려주면서 이 춤의 절절함과 간절함을 전한다.

▲ 거리의 대중들 압도하며, 몸의 언어로 최고의 詩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 김형순
애칭이 '춤추는 숟가락'인 신미경 선생은 이매방 선생의 제자로 30년 이상 한국무용을 공부한 사람답게 북춤에서 단번에 대단한 신령함을 보인다.

1950년대 스승님이 개발한 중국의 경극(景劇) 검무와 우리 전통 검무를 종합한 그러나 그것보다 더 한국적인 장검무(長劍舞)를 시도하려 했으나 처음 의도와 다르게 주변 여건이 여의치 않아 시도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했다.

▲ 사람들은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듯 천 가르기 퍼포먼스를 기다리며 새 세상을 열망한다
ⓒ 김형순
그녀의 북춤은 추위에 떨고 있는 거리의 대중들을 압도했고, 몸의 언어로 보여주는 최고의 詩 퍼포먼스였다. 일상적 희로애락에서부터 간절한 염원과 커다란 꿈까지 새 아이의 태동의 몸짓을 거리의 대중들과 같이 강물처럼 흘려보냈다.

북춤의 절정 후에 천 가르기에서 찍어지는 아픔을 품고 새로운 잉태를 염원하는 몸짓에서 알에서 깨어나는 짜릿한 희열과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 주었다. 살려고 몸부림치려는 것, 새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몸부림은 칼부림보다 강한 '춤부림'이었다.

▲ 드디어 새 생명은 찢어진 가랑이 사이로 태동하고 새날로 새 하늘로 용솟음친다
ⓒ 김형순
모두가 하나 되는 새 출범을 항하여

김해강 시인이 쓴 ‘출범의 노래’낭송으로 이 행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대중과 힘차게 같이 낭송을 하는 것으로 유도하려 했던 의도는 날도 춥고 어지간히 시간이 지나 사람들의 집중력도 떨어져 빗나갔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남을 사람들은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이 시는 낭송에서 의성어 의태어 효과를 최대로 살리고 있었다. ‘추울렁 출렁’, ‘퍼얼럭 펄럭’ 등 낭송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시적 운율과 음악성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둥둥’ 이나 ‘둥실둥실’ 등도 시적 울림이 좋았다.

출범의 노래

- 김 해강

해가 오르네,
어허! 내 절은 가슴에 붉은 해 오르네.
둥실둥실 둥실둥실

바다는 춤추네.
어허 내 젊은 가슴에는 바다에 춤추네.
추울렁 출렁 추울렁 출렁

[…]

구리 북채로 들고 북을 둥둥 울리며
배는 떠난다.
새날을 실어가는 배는 떠난다.

북소리 둥둥 북소리 둥둥 (다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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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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