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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수언론들이 새로운 이념의 트랜드로 소개하고 있는 '뉴라이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해영 한신대 국제평화인권대학원장은 이 현상의 본질을 분석하면서 한국의 뉴라이트는 미국의 '네오콘'과 일맥상통한다고 비판했다.... 편집자 주

▲ 23일 저녁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자유주의연대 창립식 및 기념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새롭다는 의미의 '뉴(new)'나 '네오'(neo) 따위의 접두사는 대개 우리를 설레게 한다. 가뜩이나 피곤한 일상에 지친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무언가 새로운 것을 갈구하게 마련이고, 그래서 새로 나온 모든 것에는 시선이 쏠리게 마련인 게다.

그런 이치로 일부 보수언론에서 요사이 지켜보기에 좀 과도하다고 보일 정도로 띄우고있는 '뉴라이트'에도 적잖은 눈길이 모인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별 새로울 것도 없고, 또 서로가 같이 하기 어려워 보이는 적잖은 모임, 단체, 사교클럽 따위가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거듭난다. 굳이 모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뉴라이트가 되었다'(?)라고 할까.

한국 뉴라이트와 미국 네오콘의 상관관계

▲ 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 오마이뉴스 권우성
평소에 나는 한국의 보수가 마땅찮았다. 그 이유는 그들이 보수라서가 결코 아니다. 내놓는 담론이란 것이 박물관에 갖다 놓기에도 민망한 18·19세기 유물인데다, 그 논리적 구성 또한 신입생 리포트수준에도 못 미치는 실로 함량미달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본디 보수와 진보는 쌍생적·이항적(二項的) 관계인지라, 제대로된 보수야말로 진보의 선생이란 것도 나의 평소 생각이었다.

그런 점에서 몇 년 전부터 출현한 인권을 내세운 남한 내 북한민주화운동은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국가로부터 억압받는(?) '우익'의 상을 세웠다는 점에서 새로웠으나, 내용상 케케묵은 반공운동 이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 뉴라이트 운동은 이른바 '침묵하는 다수'(?)의 자발적 결사라는 점에서 조금은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 뉴라이트의 상당부분 역시 자신들의 핵심 강령으로 북한 인권문제를 제기하고 있다는 점에는 아무 차이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중요한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이들 한국의 뉴라이트와 미국의 네오콘과는 어떤 관계일까. 이 질문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에 있다.

2002년 10월 미 네오콘 기관지 <주간 스탠다드(Weekly Standard)>에는 북핵문제와 관련해 네오콘 핵심 이론가 윌리엄 크리스톨과 게리 슈미트의 3가지 전술이 실려 있다.

"우선 미국과 그 동맹국들은 중유, 해외원조,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일본의 전쟁배상금 약속 등을 통한 대북 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하루 두서너 시간에 불과한 대북한 자유아시아라디오(Radio Free Asia)의 방송시간을 7시간으로 늘려야 한다.

마지막으로 태평양지역의 다른 동맹국과 연합해서 탈북자를 막고 있는 중국을 압박해야만 한다. 이는 인도적 이유에서 올바를 뿐만 아니라 북한정권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는 전략에 있어서도 대단히 중요하다. 물론 남한의 방위력을 증강하는 것을 포함해 더 많은 것들을 새로운 공격적 봉쇄정책의 일환으로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미 네오콘 N. 에버슈타트 "노무현 정권은 신좌파, 도망간 동맹"

▲ 최홍재 자유주의연대 운영위원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해의 여지없이 아주 명쾌하게 이 네오콘의 이론적 총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전략적 목표는 북한의 정권교체이며, 전술은 이처럼 북한을 '안으로부터' 붕괴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탈북자를 고리로 한 북한 정권의 안으로부터의 붕괴전술의 기본 개념은 고스란히 얼마전 미 의회에서 통과된 북한인권법으로 구체화된다.

혹자는 네오콘과 뉴라이트는 다르다고 하고, 뉴라이트를 제기한 신문사(동아일보) 측은 "자칫 미 행정부의 핵심그룹인 네오콘을 연상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논의 끝에" 신보수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건 여전히 우리의 뉴라이트가 과연 미 네오콘의 대북 '공격적 봉쇄'와 탈북자 유도를 통한 정권교체에 동의하는지 의문은 남는다. 더군다나 과연 주한 미 대사가 부르면 뛰어가 '선행' 표창장을 받을 것인지, 미국의 '장학금'으로 북한민주화운동을 할 것인지도 마찬가지 의문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부시2기의 대북전략으로 정권교체를 '강추'하고 있는 <주간 스탠다드> 11월 29일자에 실린 네오콘 N. 에버슈타트의 주장을 살펴볼 때 한낱 의문만은 아님이 드러난다. 이들 네오콘에게 노무현정권은 '신좌파 정권'이고 또 '도망간 동맹'에 비유된다.

그래서 부시의 미국은 노 정권내 "유화론자들을 달래는 대신 이들을 무시하고 남한 정치권에 동맹세력들을 구축·양성함으로써 한국민에게 직접 말해야만 한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집나간 동맹을 집으로 돌려보내는 길이다." 그나마 '아직(?)' 북한 정권교체와 더불어 남한 정권교체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분명한 한가지는 네오콘이 '구축·양성'하고자 하는 국내 '동맹들(coalitions)'로 뉴라이트만한 것이 과연 있을까하는 점이다. 뉴라이트는 네오콘의 국내 대리인이 되길 바라는 것일까.

뉴라이트의 경제강령 핵심은 '퀼트 신자유주의'

▲ 권혁철 자유기업원 법경제실장
ⓒ 오마이뉴스 권우성
나는 한국 보수의 치명적 결함이 민족개념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근대 이후 모든 주요국가에서 보수의 출발점은 민족개념이었고, 반면 진보의 핵심은 사회개념이었다. 다시 말해 '민족'은 보수운동의 사실상 텃밭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서 어떤 형태로건 민족문제를 껴안지 못하는 뉴라이트 운동은 과거의 라이트와 별반 다를 바 없다. 최근 '급조'된 뉴라이트 역시 여전히 이 한계를 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막 출범한 '자유주의 연대'라는 단체는 이 뉴라이트 가운데서 면면도 소위 386인데다 경제문제에 대한 해법도 제시하는 등 제법 이론적 품새를 갖춘 것으로 보인다. 자신들의 자유주의를 '질서자유주의'라 부르는 이들은 경제시스템을 '시장주도형 방식', 곧 '작은 정부-큰 시장'으로 전환하고, 또 자유무역협정(FTA)를 통해 '열린 통상대국' 건설을 외친다. 심지어 '청부(淸富)'를 권장하며 빈부격차의 해소가 아니라 빈곤의 해소를 추구하자고도 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 뉴라이트의 경제강령의 핵심이 결국 신자유주의 아닌가라는 의문을 갖는다. 그것도 그 어떤 수미일관된 신자유주의라기보다, 그저 좀 좋아 보이는 낱말들을 얽기설기 주워 엮은 '퀼트 신자유주의' 말이다.

따져 보면 김영삼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에 이르기까지 일군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한국경제의 신패러다임으로 권장된 바 있는 독일식 질서자유주의가 뜬금없이 튀어 나오고, 또 이 질서자유주의의 핵심이 시장에 대한 정부의 능동적 역할을 인정하는 '사회적' 시장경제론인데도 이들은 영미식 신자유주의에서 말하는 철지난 '작은 정부'를 운운하면서, 소위 그다지 뉴딜적이지도 않은 현 정부의 한국식 뉴딜마저 비판한다.

나아가 외환위기 이후 날로 심화되는 빈부격차야말로 한국사회 빈곤문제의 본질인데, 빈부격차를 해소하지 않고도 빈곤이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은 사실 궤변에 불과할 따름이다. 또 자신들이 비판하는 국가주의적 사고의 잔재에 불과한 '통상대국' 따위 발상이 진정 FTA를 통해서 가능한지, FTA를 통해 노동자·농민의 생존권이 위협받을 때, 다시 말해 자신들이 신주모시듯 하는 바로 그 자유, 곧 노동자·농민의 시장에서의 자유는 누가 보장해 줄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의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다.

아울러 FTA를 통해 개방형 통상국가로 가겠다는 것이 노무현 정부 통상외교의 핵심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자신들과 별 차이도 없는 현 정부를 힐난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결국 이들의 경제강령은 자신들의 자유가 넘쳐날 때, 민중의 자유가 신음함을 망각한 '시장 천국, 규제 지옥' 류의 천박한 신자유주의와 아무런 구분이 없다.

자유주의연대 측은 "현 정권의 참여민주주의는 80년대 운동권이 주창했던 민중민주주의의 노무현 버전"이며 "주지하듯이 민중민주주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들은 현재 논란중인 이른바 4대 개혁입법 등은 "자유를 신장시키기보다 제약"하는 것이라 한다.

마찬가지 여기서도 이들이 말하는 자유가 누구의 자유인지, 모두의 자유인지 가진 자만의 자유인지 여부가 여실히 드러난다. 또 이들에 따르면 '참여정부=민중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변종'이다. 상황이 이쯤 되면 이것은 논리적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정치적 선동에 가깝다. 그리고 스스로를 자유주의라기보다 차라리 기득권사수를 위한 보수주의라고 부르는 편이 솔직하지 않을까.

히틀러 파시즘의 나치돌격대가 될 것인가

▲ 23일 저녁 서울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자유주의연대 창립식 및 기념토론회'에서 참가자들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이들은 이제부터 '제2기 민주화운동'을 시작해야 하고 그 핵심이 '자유화운동'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를 걸러내면 결국 이들이 생각하는 바로 그 운동의 목표는 경제적으로 신자유주의이며, 정치적으로 2개의 정권교체, 곧 참여정부의 단기적 무력화(?)와 중장기적 정권교체, 그리고 북한의 정권교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는 적잖은 뉴라이트가 공유하는 것일 거라 판단된다.

나아가 스스로 '전투적 자유주의자'라고 칭하는 이들은 '얌체 보수', '회색 지식인들' 그리고 '강단 자유주의자'와 자신을 구분해줄 것을 요청하며, 특히 한나라당에 대해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아마 이런 이유에서 뉴라이트에 대한 한나라당 측의 반응이 조금은 떨떠름한 것일 게다.

아무튼 이런 점에서 우리 뉴라이트의 출범은 다분히 1997년 구 공화당 고립주의 외교노선을 비판하면서 출발한 미 네오콘의 모태인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PNAC)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들은 아울러 '우파의 혁명', '보수의 혁명'을 주장한다. 나는 여기서 아주 불길한 과거사를 연상할 수밖에 없다.

1920년대 독일 바이마르공화국 당시 일군의 '청년보수주의자'들은 '보수혁명'을 앞세워 대대적인 반동적 대중운동을 선동하였고, 이들은 이후 히틀러 파시즘의 나치돌격대(SA), 친위대(SS)의 인적 풀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수혁명은 독일 파시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단순한 정치적 수사이길 기대하지만, 이들이 진정 이것을 원한다면 그것은 실로 한국 파시즘을 예비하는 것에 다를 바 없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 예고된 재앙일 뿐이다.

▲ 이해영 교수
어쨌든 우리 사회에 청년보수주의는 이제 더이상 일시적인 현상이 아닌 구조적 트랜드로 나타나고 있고, 또 주어진 정치사회적 환경에서 우경적 급진화의 길은 언제나 열려 있다. 따라서 자유주의로 포장된 한국형 네오콘의 등장과 있을 수 있는 이들의 정치세력화는 분명 우리의 정치지형에 새로운 변수임에 분명하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네오콘 인터내셔널'의 수준에서 볼 때, 이들 우파386이 네오콘 국제공조의 중요한 일익을 담당하면서, 우리 사회를 위기로 몰아갈 그 시나리오가 단지 기우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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