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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향리 주민들이 미 공군 사격장에서 수거한 포탄더미 사이로 노란 민들레가 피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내년 8월 폐쇄키로 한 경기도 화성시 우정면 매향리 '쿠니(KOO-NI)사격장(일명 매향리 사격장)'. 철조망 안쪽에는 미군폭격기의 사격연습을 알리는 주홍색 깃발이 걸려 있고, 철조망 바깥에는 6년간의 소송 끝에 이끌어낸 대법원의 소음피해 승소 확정 판결을 환영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철조망 안과 밖의 다른 모습은 미군과 주민의 불평등한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 54년간 주민들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땅과 바다를 만신창이로 만든 미군은 3년 동안 입힌 피해의 75%를 분담하라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한미SOFA) 규정조차 거부했다. 주민의 뜻과 상관없이 내걸린 주홍색 깃발은 미군의 오만한 태도의 상징물이었다.

지난 20일 찾은 매향리 입구 '매향리 미공군 국제폭격장 철폐를 위한 주민대책위원회(위원장 전만규·이하 대책위)' 앞마당에는 농섬에 투하됐던 연습탄 'NK-82(227kg)' 80여 개가 쌓여 있고 그 틈새를 비집고 민들레가 피었다. 민들레도 폭격기의 소음에 귀머거리가 되었는지 모른다. 매향리에 핀 홍매화는 진동하는 화약내에 질려 향기를 잃은 지 오래다.

미군 소음피해 첫번째 승소 판결

대법원 재판2부는 지난달 12일 매향리 주민대표 14명이 98년 국가를 상대로 낸 매향리 미공군 폭격장 소음피해 소송에 대해 원심 확정판결 했다. 대법원은 6년을 끌어온 소송에 대한 종지부를 찍으면서 사실상 주민들의 손을 들어줬다.

서울지법은 지난 2001년 4월 미공군 폭격에 의한 소음피해를 인정, 주민 14명에게 1억3200만원을 지급하라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매향리 주민소송은 미군 소음 피해에 따른 첫 번째 승소 판결이다.

이와 함께 매향리 주민 2356명은 지난 2001년 8월 서울지법에 130억원 배상금 청구소송을 추가로 냈다. 이에 따라 대법원의 원심 확정판결이 추가 소송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한편 국방부는 지난 18일 매향리 육상 및 인근 해상 728만평에 조성된 쿠니사격장 관할권을 2005년 8월까지 주한 미공군으로부터 넘겨받아 완전히 폐쇄키로 했다고 밝혔다. / 조호진
대책위 바깥 빛 바랜 회색 벽에는 '하늘과 땅, 바다를 징발하고 보금자리마저 짓밟는 폭격장을 즉각 이전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사무실 안에는 '근(謹)- 하와이는 미국땅, 매향리는 우리 땅, 주둔미군 몰아내자-조(弔)'라는 글귀가 새겨진 검정색 플래카드와 미군에 저항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담은 걸개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리고 시위물품인 '꽃상여'와 경찰에게서 빼앗은 방패와 진압봉 등 진압장비가 쌓여 있다. 폭격장 폐쇄를 요구하며 시작된 미군기지 점거농성, 폭력진압, 구속으로 점철된 16년간 투쟁의 상징물이다. 또 한쪽에는 지난 98년 2월 소송을 제기한 이후 승소의 작은 기쁨을 누리지 못한 채 세상을 뜬 고(故) 김복순씨 등 166명의 마을주민 이름이 적혀 있다.

1951년 8월 미공군 폭격연습장이 들어서면서 시작된 비극…. 조개 채취하던 열두 살 소녀가 폭탄 파편에 다리가 잘리고 8개월 임산부가 미군 폭격기의 오폭에 의해 즉사했다. 주민들은 강제 토지수용으로 자기 땅을 빼앗겼고 황금어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한·미 당국은 54년간 주민들의 고통에 대한 사과와 대책도 없이 '사격장 폐쇄'로 얼버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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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 동안 전쟁터에서 살았다, 보상대책 세우고 빼앗긴 농토 돌려달라"

▲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에 오늘도 사격훈련이 있음을 알리는 주홍색 깃발이 펄럭인다(왼쪽). 미 공군이 20일 농섬 상공에서 폭격 훈련을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20일 오후 2시께 미공군 폭탄 투하 연습장인 농섬 앞 갯펄에는(일명 뒷갯변) 'NK-82'와 'BDU-33(12kg-일명 방망이탄)' 수백 개가 널브러져 있다. 아름드리 소나무로 빼곡했던, 새들의 부화장소 '농섬'은 썰물에 의해 흉칙한 몰골을 드러냈고 바로 옆, 거북이처럼 생겼다는 '귀비섬'은 앙상한 등뼈만 남긴 채 거꾸러져 있다.

갯펄 위를 불안하게 날던 수백 마리의 도요새들이 갑자기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오후 2시55분께 상공에 나타난 'F-16' 2대가 섬광을 뿌리며 농섬에 폭격을 가하고 저공 비행하던 'A-10' 4대가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을 울리면서 연달아 폭탄을 투하하자 희뿌연 포연이 자욱하다.

태평양 미공군사령부 산하 한국주둔 미 제7공군 51전투비행단이 관리하고 있는 농섬 폭탄 투하장은 690만평의 광활한 규모다. 이곳은 주한미군 폭격기뿐 아니라 일본, 괌, 태국, 오끼나와, 필리핀 등지에서 날아온 미군 폭격기들이 밤낮없이 '전쟁 연습'을 하고 있다. 심지어 연중 5∼6회에 걸쳐 연습용 핵미사일 투하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뒷갯변' 언덕에서 폭격장면을 지켜보던 김 아무개(51·경기도 고양시)씨는 "강원도 양구에서 군 생활을 하면서 사격연습을 했지만 이렇게 심하지는 않았다"며 놀라워했고, 같이 온 이 아무개(42·경기도 용인시)씨는 "말로만 들었는데 너무 심각하다, 이곳에 살면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다"며 주민들에게 충분한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주민 최중구(75·매향3리)씨는 "50여 년 동안 총소리와 폭격소리에 시달리며 전쟁터나 다름없는 상황을 겪으며 살았다"며 "아낙네와 젖소들이 유산하고 아이들이 경기 들렸고 오폭 사고에 죽은 사람도 있다, 우리야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후손들에게 이 고통을 남겨주어선 안 된다"며 보상대책을 세우고 빼앗긴 농토를 되돌려 달라고 정부당국에 호소했다.

이장 김영철(48·이화1리)씨는 "주민들이 논에서 일하다 오폭 사고로 숨지고 동네 아이들이 불발탄 사고로 죽었지만, 보상은커녕 쉬쉬하며 죽음을 감추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왔다"며 "주민이 주거하는 마을에 폭격연습장을 만든 것은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조속한 사격장 폐쇄를 요구했다.

38만평 사격장 일대에 평화박물관과 평화공원 조성 계획

▲ 농섬 앞 갯펄에 버려진 폭격탄 'BDU-33'. 8개월 된 임산부를 즉사케 한 폭탄이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돈 몇 푼 받은 게 문제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되찾은 게 중요한 것이다. 주민들은 사격장 폐쇄를 요구하며 헬기장에 드러눕고 철조망을 뛰어넘어 들어가면서까지 절박하게 싸웠다. 전쟁의 공포로 시달려온 매향리를 평화의 땅으로 만드는 게 주민들의 소망이다."

대책위 고문 추영배(60)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장 김영철씨 또한 "강제로 징발당한 농토를 정부가 되돌려주길 바라며 일부 지주들은 땅을 되찾으면 평화마을 만들기에 동참하겠다고 약속했다"며 "정부와 국방부는 지난 54년간 고통에 시달려온 주민들의 간절한 뜻을 받아들여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대책위는 19일 정부당국과 협조해 '쿠니사격장' 일대의 육상사격장으로 사용됐던 38만평에 '평화박물관'과 '평화공원'으로 조성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만규 위원장 등 마을 주민 14명이 소음피해 소송으로 받은 보상금 전액 1억9400만원을 조성기금으로 내놓겠다고 밝혔다.

주민 2356명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130억원 배상금 청구소송에서 승소할 경우 배상금의 16%를 건립비로 내놓기로 약속했다. 대책위는 3개월 이내에 평화박물관과 평화공원을 만들기 위한 '평화마을 만들기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발족키로 하고 이번주에 서울대 환경대학원과 연구 용역을 체결할 예정이다.

전만규 위원장은 "미군의 군사적 폭력에 의해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점철된 매향리를 평화의 마을로 만들기로 주민들이 뜻을 모았다"며 "평화와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국민과 전세계 사람들이 함께 평화공원과 박물관을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폭격에 의한 중금속 오염 심각... 책임규명을 위한 전면조사 시급

▲ 주한미군이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매향리 미 공군 사격장을 내년 8월까지 한국에 반환키로 합의한 가운데, 20일 농섬에선 여전히 폭격 훈련이 진행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쿠니사격장 폐쇄에 대한 매향리 주민들과 보건·환경·민족운동단체의 반응은 '환영'과 '의심' 두 가지다. 이들은 용산기지 반환약속을 지키지 않는 미군의 태도와 비교하며 쿠니사격장 폐쇄는 주민과 국민들의 저항을 얼버무리기 위한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여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매향리 문제해결에 앞장서온 단체들은 사격장이 폐쇄되기 이전에 매향리 일대의 환경오염에 대한 전면적인 조사를 실시한 뒤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54년간 폭탄투하에 의해 중금속 오염이 불 보듯 뻔하며 불발탄 처리 등을 덮어둘 수 없기 때문이다.

녹색연합은 지난 18일 성명서에서 "2000년 조사한 바에 의하면 농섬에서는 납이 최고 845mg/kg이 검출되고 크롬은 0.86mg/kg이 검출되었다"며 "우리나라 공장용지의 평균 납 농도 34.884mg/kg보다 24배나 높은 수치는 미공군 폭격에 의해 심각한 중금속 오염이 진행된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밝혔다.

녹색연합은 또한 "1992년 미군이 철수한 필리핀의 '수빅(Subic)만'과 '클라크(Clark)' 공군기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질병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나 조사와 치유·배상에 관한 계획이 없어 미군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며 "지금부터 농섬을 중심으로 한 폭격장에 대한 정밀조사와 복원절차를 마련하고 책임 주체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등 6개 의료단체로 구성된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은 같은 날 성명서에서 "주민 건강 및 환경피해에 대한 배상과 원상복구의무 등에 대한 규정이 없는 불평등한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과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전면 개정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녹색연합 고지선 간사(여·26·미군기지 환경감시단)는 20일 "국방부가 지난해 11월 럼스펠드 미 국방장관이 방한했을 때 쿠니사격장 반환에 합의했는데도 군사 2급 비밀로 감추었다가 갑자기 발표한 저의가 의심스럽다"며 "미군의 소음피해 배상금 분담을 거부한 데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희석화시키기 위한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고 국방부의 태도를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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