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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 남쪽으로 흐르는 압록강 표지석
ⓒ 김기동
고구려 두 번째 수도였던 집안 남쪽으로는 압록강이 흐르고 압록강 바로 건너에는 북한 만포시가 위치하고 있다. 북한 만포시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가장 유명한 강서대묘가 있으며 강서대묘의 사신도 벽화는 현재 한국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실에 모사품이 전시되어 있다. 집안을 여행하는 한국 관광객들이 강 건너 북한의 모습을 바라보기 위하여 많이 방문해서인지 중국 쪽 압록강 둑에는 전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옛날에는 압록강 물이 얼었다고 하나, 현재는 상류 댐에서 내려 보내는 물살이 강하여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는다.

▲ 북한 남포와 중국 집안을 연결하는 철도
ⓒ 김기동
북한과 중국 국경 사이로 백두산을 경계로 하여 북쪽으로는 두만강이 흐르고 남쪽으로 압록강이 흐르는데 두만강은 북한 남양과 중국 도문이 철도로 연결되어 있고, 압록강은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동 그리고 북한 남포와 중국 집안이 각각 철도로 연결되어 있다. 옛날 고구려 시대부터 현재까지 집안 남쪽 압록강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 집안시내에서 바라본 북한의 산
ⓒ 김기동

▲ 집안 시내에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냉면집
ⓒ 김기동

▲ 늦둥이 아들을 안고 즐거워하는 조선족 냉면집 사장
ⓒ 김기동
집안 시내 어디에서나 북한의 산들이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중국 집안시와 북한 만포시가 얼마나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집안에는 거주민 대부분이 한족과 만주족으로 현재는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지 않다.

집안 시내에서 어렵게 발견한 조선족 식당에서 식당 주인은 새로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인구가 너무 많은 중국은 법으로 부부가 1명의 자식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최근 조선족 인구가 급격하게 줄자 조선족은 2명의 자식을 가질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식당 주인은 스무 살이 넘은 딸이 있으나, 법이 개정되어 늦둥이 아들을 낳아 행복하다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 압록강변에 있는 나룻배 뒤쪽으로 북한의 만포시가 보인다.
ⓒ 김기동
고구려 시대에도 집안 남쪽 압록강은 현재의 북한 지역으로 갈 수 있는 교통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삼국사기에는 대무신왕 15년 여름에 호동왕자가 옥저에 사냥하러 갔다는 기록이 있다. 옥저의 위치는 현재의 북한 평안도, 함경도 지역으로 호동왕자가 살던 집안 고구려 궁궐에서 옥저로 갈 때 가장 편리한 교통로는 압록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향하는 방향일 것이다.

호동왕자는 고구려 대무신왕(3대)의 아들로 유리명왕(2대) 손자이다. 옥저로 사냥을 갔던 호동왕자는 도중에 낙랑왕 최이를 만나게 되고 최이는 호동왕자의 인물됨에 반하여 낙랑국으로 데려가 딸 낙랑공주와 결혼을 시켜 유명한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 낙랑국에서 낙랑공주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호동왕자
ⓒ 강맹산 [고구려의 발자취]
삼국사기에는 공주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세 가지가 있다. 평강공주와 온달장군, 선화공주와 서동 그리고 낙랑공주와 호동왕자이다.

평강공주는 바보 온달을 고구려 장군이 되게 하고 선화공주는 감자 장수 서동을 백제 무왕으로 만들어 좋은 결말을 보이지만, 낙랑공주는 호동왕자에게 이용만 당하고 결국은 아버지에게 죽게 되는 비운의 공주이다.

▲ 낙랑공주의 도움으로 낙랑국 습격에 성공한 호동왕자가 아버지 최이에게 죽임을 당한 낙랑공주를 바라보고 있다.
ⓒ 강맹산 [고구려의 발자취]
낙랑국에서 낙랑공주와 결혼한 호동왕자는 고구려로 혼자 돌아온 후 공주에게 적군이 오게 되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낙랑국의 북과 나팔을 깨뜨려 버리라는 편지를 쓰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네가 너희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서 북과 나팔을 깨뜨릴 수 있다면 예를 갖추어 너를 맞을 것이요.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너를 맞지 않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동왕자의 제안에 따라 북과 나팔을 깨뜨려 버린 낙랑공주는 아버지 낙랑국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 집안에서 바라본 압록강 너머 북한의 산. 호동왕자는 이곳에서 낙랑공주를 생각하며 칼을 물고 엎어져 자살하지 않았을까?
ⓒ 김기동
낙랑공주를 이용하여 낙랑국 습격에 성공하여 큰 공을 세운 호동왕자는 태자로 봉해져 고구려의 왕 자리를 기대하였을 수도 있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지고 있었다.

부여는 고구려 대무신왕 5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고 대소왕이 살해되어 큰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 때 부여 대소왕의 막내 아우가 고구려 이웃지역에 갈사국이라는 나라를 세웠다. 신생 국가인 갈사국은 왕의 손녀를 고구려 대무신왕의 두번째 부인으로 보내야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을 만큼 허약한 국가였다.

호동왕자는 대무신왕의 둘째 부인인 갈사국 손녀의 아들이었는데 호동왕자가 낙랑국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우자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가 자신의 아들이 태자가 되지 못할까 염려되어 호동왕자를 음해하게 된다. 대무신왕의 첫째 왕비는 호동왕자가 이복 어미니인 자신을 무례하게 대접하여 간통하려는 위험이 있다는 말로 대무신왕을 충동하여 결국 대무신왕은 아들 호동왕자를 의심하게 되어 호동왕자에게 이러한 사실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게 된다.

아버지의 첫번째 왕비인 이복 어머니를 희롱했다는 협의를 받게 된 호동왕자는 적극적으로 사실을 규명하는 대신 ‘내가 만일 해명한다면 이것은 어머니의 죄악을 드러내는 것이며 왕에게 근심을 끼치는 것이니 어찌 효성이라 할 수 있겠가는?’하고는 칼을 물고 엎어져 죽음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호동왕자가 이복어머니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하여 살해되었는지,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는 낙랑공주를 이용하여 낙랑국을 습격하여 공을 세웠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이복어머니를 희롱했다는 협의로 궁지에 몰리자 서로 이용하고 음해하는 세상살이에 실증이 나 자살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 압록강 강둑에서 손수레를 자전거에 연결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농부의 모습
ⓒ 김기동


방학봉 교수와 함께 한 고구려 여행

중국 연변대학 역사학부 발해사 연구소 제1대 소장 역임 후 현재 저술활동 중인 방학봉 교수님과 함께 2007년 1월 25일부터 2월 1일까지 7박8일 동안 중국 동북부에 위치한 고구려 유적지 연변, 이도백하, 안도, 통화, 환인, 집안를 여행 하게 되었다.

78세의 연세와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저와 동행하며 많은 가르침을 주신 교수님께 다시 한번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글은 방학봉, 장월영의 <고구려,발해 유적 소개 1995년>와 강맹산 편저 <고구려의 발자취 1982년>에 기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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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는 <중국사람이야기>,<중국인의 탈무드 증광현문>이 있고, 논문으로 <중국 산동성 중부 도시 한국 관광객 유치 활성화 연구>가 있다.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행위방식의 근저에 있는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중국인과 대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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