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늘(2007년 8월 4일)자 중앙일보에 턱수염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정진홍의 소프트파워] 손학규의 턱수염”이다. 독자도 아니고 일개 기자도 아닌, 우리나라 2위를 자랑하는 큰 신문의 논설주간 이라는 사람이 남의 용모(턱수염)에 대해 논한 것이라 관심 있게 읽어보았다.

▲ 8월 4일자 중앙일보 해당 기사.
ⓒ 중앙일보 홈페이지 캡처

“부모 자식간에도 용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조심스러운데, 하물며 남의 용모에 대해 말하는 것은 결례”라고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그는 결례를 무릎 쓰고 말한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남의 용모에 대해 결례를 범한 사람에게 나 또한 결례를 무릎 쓰고 몇 가지만 지적하련다.

그는 첫 번째로 서민적 이미지 문제를 지적하면서 “턱수염이 서민적 이미지를 보강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다. 서민이라고 모두 허름하고 거친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책상물림의 자기도취요, 꽉 막힌 우물 안 사고”라고 말한다.

옳은 지적이다. 그저 책상 머리에 앉아서 서민의 생각을 어떻게 꿰뚫어본단 말인가? 헌데,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다. 그럼 그의 주장대로 턱수염이 서민적 이미지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디에 근거를 둔 말인가? 메이저 신문의 논설주간은 책상머리에 앉아서 서민들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게 아니라면, 직접 서민들을 상대로 일일이 설문조사라도 한 것인가?

그는 또 말한다. “서민들이 진짜 바라는 것은 내 처지, 내 몰골하고 닮은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의 말은 ‘턱수염은 서민의 몰골’이라는 얘긴데, 내가 과문해서인지 몰라도 ‘턱수염이 곧 서민의 몰골’이라는 등식은 어떻게 성립되는 것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자신은 결코 서민이 될 수 없음을 용모로써 웅변하려는 것일까?

그는 두 번째로 링컨과 비교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민심대장정 때는 자연스럽게 기른 턱수염이 어울릴 수 있었지만, 양복 입고 만남과 행사를 치를 때는 ‘어설픈 시위’처럼 보여 안쓰럽다.” 링컨의 수염은 따뜻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하지만 손학규의 수염은 어설픈 시위로 보이면서 안쓰러움을 전달한단다.

그는 서민이 아니면서도 서민이 느끼는 안쓰러운 감정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 충고하고 있는 것이다. 헌데, 그런 그의 주장을 읽으면서 나는 왠지 그가 서민의 위치가 아니면서 책상머리에 앉아 서민의 감정을 언급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왜일까?

세 번째로 그는 샌님 이미지를 언급하면서 “턱수염을 기른다고 샌님이 호걸 되나?”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의 말은 ‘턱수염은 호걸’이라는 얘긴데, 그의 말을 종합하면 결국 ‘턱수염=서민=호걸’이 되는 것이고, 손학규는 결코 서민이나 호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턱수염에 관한 등식도 그렇고, 손학규에 대한 예단도 그렇고, 그의 주장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손학규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큰 신문의 논설주간이 남의 용모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예단하고 충고한다는 것이 내게는 일견 재미있게 보인다. 손학규 캠프에서 수염을 깎자 말자 논하는 것에 대해 “그럴 시간 있으면 정책연구 한번 더 하라”고 점잖게 충고하는 그에게 난 이렇게 충고해주고 싶다. “그럴 시간 있으면 심도 있는 기사 하나 더 쓰라”고.

그는 손학규에게 턱수염을 깎을 것을 충고하고는 마지막으로 “수염 없는 맨 얼굴의 손 전 지사의 행보를 끝까지 지켜볼 참”이라고 언급하면서 끝을 맺는다. 아니, 그럼 남의 용모에 대해 결례를 범하는 게 이번 한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얘긴가?

내게는 왠지 메이저 신문의 논설주간 이라는 자리가 재미있게 보인다.

태그:#손학규, #턱수염, #논설, #미디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