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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노무현 정부는 폐쇄적 기자실 운영의 문제점을 개선하겠다며 개방형 브리핑제도를 도입했다. 그 뒤로 4년. 임기 말의 노무현 정부는 또 다시 정부 부처 기자실 통폐합을 골자로 한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을 들고 나왔다. 이에 대해 언론사들은 '언론자유 침해'라고 맞서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4년 전 정부가 실시한 개방형 브리핑제 이후에도 여전한 기자실의 폐쇄적 운영과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언론개혁 정책의 허와 실 등에 대해 몇 차례로 나눠 보도한다. 이번이 마지막회로 안병찬 전 경원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편집자주>

# 장면1.

1960년대 중반 한 일선 경찰서 출입기자실. 일부 기자들이 기자실 한 구석에서 '고스톱'을 치고 있다. '촌지'로 받은 돈을 판돈으로 올려놓은 기자도 있다.

한 젊은 기자는 이런 풍경이 썩 내키지 않았다. '기자가 취재를 해야지, 앉아서 한다는 게 겨우 도박인가' 회의감이 밀려왔다. 그는 한 동료 기자와 함께 기자실 정화 운동에 나섰다. "기자실을 나가 취재를 하자"며 타사 기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결국 기자실 문에 못질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얼마 못 가 기자실 문은 또다시 열리고 말았다. 기자들은 유야무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기자실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구태도 되풀이됐다.

# 장면2.

1960년대 후반 보건사회부(현 보건복지부) 출입기자실. 일부 기자들이 '포커'를 하고 있다. 기자들은 '촌지' 맛에도 빠져 있었다. 일부 기자들은 "배가 고프다"며 은근슬쩍 촌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두 명의 기자와 함께 촌지 거부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나 타사 기자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너희들만 깨끗하고 우리들은 더럽단 얘기냐' 항의가 들끓었다. 결국 그는 압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촌지 관행도 이어졌다.

# 장면3.

1970년대 초반 주월사령부(베트남). 해외에서도 기자들의 촌지 문화는 여전했다. 당시 주월사령부 ○○○ 사령관과 베트남 특파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점심 식사를 함께 했다. 이때마다 기자들은 100달러가 담긴 돈 봉투를 받았다.

그는 수치스러웠다. '내가 군인도 아니고 ○○○ 부하도 아닌데 왜 돈을 받아야 하나' 화가 났단다. 그래서 동료 기자와 함께 촌지를 거부했다.

군 측에선 사단이 났다. 초등학교 선배이기도 했던 △△△공보관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공보관은 '제발, 내 입장 좀 봐 달라'며 애원했다. 그는 마지못해 돈 봉투를 받아야 했다.

45년간 언론계에 몸담고 있는 안병찬 전 경원대학교 교수(남·71)가 젊은 날을 회상하며 털어놓은 기자실 백태다. 안 전 교수는 "세 번의 기자실 정화 운동이 모두 불발로 끝났다"면서 "본인 의지가 있다 해도 주변 동료, 행정 관료들이 가만 두지 않았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를 두고 안 전 교수는 '권언유착'이라고 했다. 기자들이 공보관이라는 창구를 통해 행정 관료들과 좋은 관계를 맺었고, 이게 유착 관계로 발전했다는 얘기다. 그는 "공보관과 출입기자단이 한 배를 탔다"면서 "공보관이 출입기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군소 언론이 출입처에 등록하거나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지난 13일 서울 인사동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 사무실에서 안 전 교수를 만났다. 과거 출입기자실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또 언론계 원로로서 최근 논란이 된 정부의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기 위해서였다. 안 교수는 이번 정부 방안에 대해 반대 의사를 밝혔다.

기자실은 권언유착의 현장.. 촌지 요구하기도

ⓒ 오마이뉴스 권우성
"출입기자실은 예전부터 폐쇄적이었다. 특히 군사 정권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가 되기 위해서는 청와대의 '아그래망'(agrement, 허가)을 받아야 했다. 출입 등록을 하면 청와대가 '이 기자는 삐딱해서 안돼'라며 거부하기도 했다."

안 전 교수가 체험한 출입기자실은 권언유착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진입 장벽이 높은 성역이었다. 정부 부처 출입 자격이 '중앙 일간지' 기자로 한정돼 있던 곳이 많았다. 기자단 '총회'를 거쳐야 출입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 등록 기자만 취재를 할 수 있었던 것도 현재와 다름없었다.

안 전 교수는 10여 년 전에도 기자실의 높은 장벽을 절감했다. 당시 <시사저널> 편집인 겸 주필로 활동하던 안 교수는 "'마이너' 매체로서 설움을 겪었다"고 토로했다.

"1996년 경찰이 수사하던 ㄱ학원 비리 사건에 대해 당시 <시사저널> 김 아무개 기자가 경찰청을 찾아 수사 관련 브리핑 자료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경찰 공보관이 '<시사저널>이 여기 왜 왔느냐, 여기(기자실)는 들어오면 안 되는 곳이다, 기자들이 싫어한다'며 자료 제공을 거부하더라."

출입기자실 문제 빈번히 재연.. "민주정부가 권위주의 닮나"

과거 촌지 관행은 요즘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출입기자실에 대한 논란은 새로울 게 없다. 안 교수는 "1950년대부터 간헐적으로 출입기자단 폐지론과 '필요악'론이 대립해 왔다"고 설명했다.

1961년 신문윤리 실천요강이 제정되고 이듬해 봄엔 출입기자단을 '해체하자'는 측과 '폐단을 시정하면서 존치시키자'는 측이 맞서기도 했다. 신문윤리 실천요강에는 '뇌물을 주고받아서는 안 된다'는 등 언론인의 품격과 관련된 항목이 들어 있었다.

1967년에도 출입기자단의 폐해가 도마에 올랐다. 정부 자체 감사에서 일부 부처가 출입기자단에 돈을 건넨 사실이 밝혀졌던 것이다. 당시 해당 부처 출입 기자들은 수사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1973년 유신 체제 하에서는 출입기자단과 기자실이 축소되기도 했다. 언론을 통제하기 위한 정부의 압력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출입기자단에 대한 여론의 부정적 시각을 빌미로 정부 부처 기자실 47개(790여 명)를 19개(360여 명)로 축소시켰다.

출입기자실 축소와 관련된 논쟁은 2007년에도 재연되고 있다. 정부가 내놓은 취재 선진화 방안은 기자실 통폐합과 합동브리핑센터의 설치를 골자로 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안 전 교수는 "기자들이 취재하려면 공보관을 통해야 하고, 기자를 접촉한 공무원은 보고를 꼭해야 한다면 제대로 취재에 응대해줄 공무원이 있겠냐"면서 '공무원 접근권 제한' 조치라고 못박았다.

이와 관련 안 전 교수는 "유신 정권과 현 정부의 정책은 공무원에 대한 접근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면서 "유신 정권에서는 언론에 대한 통제가 물리적·직접적으로 자행됐고, 현 정부는 암묵적·간접적으로 자행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안 전 교수가 우려하는 '공무원 접근권 제한조치'에 대한 논란은 최근 열린 '노무현 대통령과 언론인의 대화'에 참석했던 언론인들이 집중적으로 제기한 문제이기도 한다. 또 '대화' 이후 정부와 언론단체간 테스크포스팀(TF)을 구성키로 합의했고, 이 단위에서는 '국무총리 훈령' 등을 통해 공무원들의 언론접촉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기도 하다. 합리적 취재를 기피한 공무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징계 등을 가하는 등 국민의 알권리 차원의 취재에 대한 공무원들의 '성실 응대'를 강제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취재 선진화 방안엔 노 대통령 정치적 의도 깔려 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전 교수는 취재 선진화 방안이 "정치적 의도가 깔려있는 게 아닐까"라고 의혹을 제기하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하기도 했다.

"2003년부터 시행돼 온 개방형 브리핑 제도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정부의 이번 취재 선진화 방안은 터무니없다. 정권 말기 권력 누수를 막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등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는 게 아닐까. 정권이 바뀌면 철회될 일, 피차간 에너지·자원만 낭비하는 듯 해 우려스럽다."

안 전 교수는 "우리 사회 민주화가 진행되며 촌지가 줄어드는 등 출입처가 개선돼 온 건 사실"이라면서 "보수 언론에 대한 적개심이 발로인 듯 하나 이는 감정싸움, 이데올로기의 문제이기 때문에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지난 1월 노 대통령의 '기자실에 죽치고 앉아 기사를 담합한다'는 발언에 대해서는 "출입처에서 비슷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정부의 인위적인 개혁에는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미 70년대 미국에서 '패거리 저널리즘'(획일적인 저널리즘) 즉 출입기자의 역기능이 지적돼 왔지만 그렇다고 미 정부가 개혁을 단행했던 건 아니다"고 덧붙였다.

이어 "출입기자들의 정보에 대한 욕구, 정부를 향한 압력이 집단적으로 분출 할 땐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한다"고 피력했다. 정부가 정보 공개를 꺼려할 때 끊임없이 변죽을 울림으로써 정부를 압박하는 '순기능'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언론 개혁은 기자에 대한 교육 등을 통해 언론 자신이 해야 한다"고 뒷받침했다.

" 저널리즘은 휴머니즘.. 사람 냄새를 맡으며 취재하라"

ⓒ 오마이뉴스 권우성
안 전 교수는 "프랑스 엘리제 궁의 경우 출입기자가 되기 위한 아무런 제한이 없다"면서 "공공기관의 문을 활짝 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 경찰 출입기자실도 누구에게나 열려 있고 정보 공개 수준도 높은 편"이라면서 "제한 없는 정보 공개가 전제된 상태에서 브리핑 제도를 운영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현직 후배 기자들에 대한 따끔한 충고도 잊지 않았다. 안 전 교수는 "요즘 기자들은 '현장'과 점점 멀어지고 책상 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여 기사를 쓰려 한다"면서 "사람들과 피부를 맞대고, 사람 냄새를 맡으며 몸을 던져 취재해 달라"고 당부했다.

한편 안 전 교수는 지난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서 언론에 첫 발을 내디뎠다. 1975년에는 베트남 전쟁의 최후까지 현장을 지킨 특파원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이후 1991년 자리를 옮겨 <시사저널>을 창간부터 이끌었으며 MBC 시사토론 '안병찬의 일요광장' 사회자를 맡기도 했다. 그는 일흔이 넘은 현재까지도 <내일신문>에 칼럼을 쓰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안 전 교수는 지난 5월까지 <한국일보>에 '안병찬의 하이킥 라이프' 12부작을 연재한 바 있다. 모두 직접 사람들을 만나 쓴 인터뷰 기사다. 그는 "무겁고 귀찮은 몸을 이끌고, 스킨십을 하면서 쓴 기사"라고 소개하면서 "저널리즘의 궁극적 목적은 사람의 얘기를 어떻게 전하느냐를 고민하는 휴머니즘이다"고 소신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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