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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은 19일 전북대에서 '남조선 사상의 현대적 의의'란 특별한 주제로 특강을 실시했다.
ⓒ 박주현
"부끄러울 줄 알아야 큰일을 할 수 있다. 네 번의 투옥과 8년의 긴 독방(감옥) 생활의 동력원도 바로 그 부끄러움이었다."

1960년대 이래 1980년대까지 숨 막히는 군사독재정권과 온몸으로 싸우며 저항시를 썼던 김지하(66) 시인은 4·19혁명 47주년을 맞는 날 전주를 찾아 소회를 밝혔다. 전북대학교 개교 60주년 기념 특강을 하기 위한 자리였다.

"이불 짐을 지고 서울 흑석동에서 성북동으로 이사 가던 날 학생시위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그날이 바로 4·19혁명임을 알고 다음날 부끄러움을 깨달았다"는 그는, "그러나 그 부끄러움이 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자원이자 힘이 되어주곤 했다"고 말했다.

"부끄러울 줄 알아야 큰일 할 수 있다"

▲ 김지하 시인은 "부끄러움이 훗날 시와 예술에도 중요한 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 박주현
"그 부끄러움이 훗날 시와 예술에도 중요한 동력이 됐다"는 김 시인은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부끄러워 할 줄을 잘 모른다"고 일침을 가했다.

19일 오후 2시 전북대 진수당 최명희홀에서 '남조선 사상의 현대적 의의'에 관한 주제로 열린 강의는 약 2시간 30분 동안 쉬지 않고 진행됐다. 주로 동학(東學)과 정역(正易), 증산(甑山)을 중심으로 한 세 가지 사상의 실체와 현대적 의미에 관한 내용이었다.

주제에서부터 진한 사상적 색채가 풍긴 이날 특강에는 많은 학생과 시민, 지역 언론인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지역 언론계는 특히 실타래처럼 얽혀 갈수록 혼미를 더해가고 있는 정국과 지역적인 문제에 시인이자 사상가인 그가 어떤 해석과 진단을 내릴지 초미의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본 강의에 앞서 "사람이 잘사는 세상, 좋은 세상으로 바뀌려면 정치·사회적 변혁이 필요하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이제 시대는 혁명이나 눈에 보이는 질서를 바꾸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때가 됐으며 정신, 예술, 사상, 문화의 대변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날 강조한 '남조선 사상'은 지역적 관점에서 조명되고 해석되어 졌다는 점에서 이목을 끌었다.

그는 '남조선 사상'에 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시선들이 따가웠던지 "오늘 말하려는 남조선은 경상, 충청, 전라(제주포함)의 삼남(三南)의 남조선을 일컫는다"고 말하면서 "오늘날 종말적 혼돈 이후에 새 세계의 개벽은 남조선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운을 뗐다.

혁명을 꿈꾸던 눈 맑은 청년운동가에서 유신정권의 문화 예술적 대항마로, '황토'와 '오적'의 시인에서 생명사상가로, 다시 21세기 동아시아의 전망을 해석하는 미래학자로 끊임없이 존재를 바꿔온 그가 예순을 훌쩍 넘은 나이에도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빈틈없는 곧은 자세로 강의를 이끌었다.

"대혼돈의 대안은 남조선 사상에 있다?"

인류와 지구가 처한 지금의 현실을 한마디로 '대혼돈(Big Chaos)'으로 표현한 그는 "온난화, 기상이변, 생태계의 오염, 파괴, 변천, 멸종, 테러, 전쟁, 괴질, 신자유주의 세계시장의 오류, 인류문화의 방향 상실, 인간 내면의 도덕적 황폐현상은 종말적 대혼돈"이라고 말했다.

저항시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가 인류와 지구가 처한 암울한 환경의 대혼돈 해법을 남조선 사상에서 찾았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새로운 먼동이 터온다'라고만 했을 뿐, '과연 새로운 먼동은 무엇이며, 어디서 터올 것인가'에 대한 답은 내리지 못했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대혼돈'에 대한 대안으로 1860년의 경상도 경주 용담 최제우(崔濟愚)의 '동학(東學)'과 1879년부터 1885년 사이의 충청도 여울 김일부(金一夫)의 '정역(正易)', 1901년 전라도 전주 모악산 강증산(姜甑山)의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들었다. 김 시인은 이것을 '남조선 사상'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는 또 "전 세계의 지성은 대혼돈에 대한 처방과 대안이 동아시아로부터 올 것을 기대하는 이른바 '이스트 터닝(East Turning)'으로 중국을 주목하고 있다"며 "그러나 중국은 그 거대한 문화 창고에 그득그득한 유·불·도 전승 사상사의 존재에도 현대로부터 그것을 열고 들어가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열쇠가 없다"고 했다.

그 열쇠는 한민족 고대 이래의 선도(仙道) 풍류사상과 그 19세기적 부활인 동학, 정역의 '후천개벽 사상사'라고 그는 주장했다. 그 열쇠에 대한 해석학의 문제영역을 그는 7가지로 제시하며 설명했다.

그가 제시한 문제영역에는 '종말'과 '여성해방' 등에 관한 문제와 '대혼돈적 질서와 원형을 기호화·상징화할 수는 없는가?', '한민족의 세계사적 소명과 비전은 무엇인가?', '온난화의 주범인 일산화탄소의 플러스알파에 대한 대답은 무엇인가?', '혼돈에 대한 처방은 무엇인가?' 등이 포함됐다.

"증산은 새 과학에 대한 담론의 촉발제"

그는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동학과 정역, 증산의 사상적 관점에서 제시했다. 먼저 동학에서 나타난 남조선 사상의 중요성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남쪽 별자리가 원만해야 북쪽 은하수가 자리를 바꾼다'는 뜻의 '남진원만북하회(南辰圓滿北河回)', 그리고 '용담의 물이 흘러 네 바다에 흐르고 구악에 봄이 오니 한 세상이 꽃이로다'는 뜻을 지닌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龍潭水流四海源 龜岳春回一世花)'란 시 구절에 잘 나타난다고 풀이했다.

또한 "동학사상에는 '한번 간 것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이 없다(無往不復)', 혹은 '다시 개벽' 혹은 '오만 년 후천개벽' 안에 우주와 지구의 대전환 사상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또한 정역(正易)의 화두는 '그늘이 우주를 바꾼다'는 뜻의 '영동천심월(影動天心月)'에 있다고 주장한 김 시인은 "문제는 '그늘'에 있다"고 힌트를 던졌다. "그늘을 중심원리로 하여 한민족 고유의 예술심리 즉, 미학적 견해와 직결돼 있으므로 문화, 미학, 예술에 의한 세계변동을 암시한다"고 그는 해석했다.

즉 그늘(影)의 역학적 개념과도 직결된다는 정역은 후천개벽의 간지(干支)를 중심으로 한 우주와 지구 상수학(象數學)의 새로운 전개를 예측하고 있다는 것이다. 증산(甑山)의 경우 그러나 혼돈의 질서를 의술에서 보았다고 그는 주장한다.

김 시인은 "혼돈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혼돈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곧 혼돈의 질서인데, 바로 그것이 의학이요 의술"이라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증산은 스스로 '후동학(後東學)'임을 천명하고 무장투쟁에 의한 후천개벽이 아닌 '의통제세(医統濟世)', 즉 치유에 의한 정세개벽을 주장했는데, 그것은 동세(動世)가 아님을 분명히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다만 증산의 이러한 콘텐츠 방향이 서양의 하드웨어의 과학과 어떻게 탁월한 결합에 이르며, 그것을 위해 어떻게 우리가 증산 말대로 원시회복을 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세계문화 대혁명이라는 개벽을 통해 동아시아, 태평양 신문명 창조를 우리가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라는 명제만 남는다"고 말했다.

"'글로벌'보다 '로컬'을 먼저 고민해야"

▲ 김지하 시인은 "생태계 오염, 괴질 등이 잇따르는 대혼돈 시대에 '남조선 사상'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박주현
수준 높은 과학과 탁월한 과학의 첫발자국은 문화, 예술과 같은 직관에서 나타난다"고 한 그는 노벨화학상 수상자인 재프리·츄의 말을 인용하면서 "증산이야말로 새 과학에 대한 원형(archetype), 새 기준(paradigm), 새 담론(discourse)의 촉발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생태계 오염, 괴질 등이 잇따르는 대혼돈 시대에 증산 사상을 현대적으로 전개해 우주의 질서를 따르는 '남조선 사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는 "이것이야말로 고대 선도와 동학·정역을 전제한 남조선 사상의 민중사적 절정"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 그는 '글로컬(Glocal)'이란 단어의 개념을 남조선 사상에 접목시켰다. "'세계적(Global)'과 '지역적(Local)'의 합성어인 글로컬이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을 먼저 확립하고 우리 스스로 앞장서서 우리에게 맞는 사상적 기준을 만드는 것"이라며 지역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글로벌'보다 '로컬'을 먼저 고민해야 한다"는 그는 "남조선 사상이야말로 서구에서 만든 기준이나 규제를 피동적으로 따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선제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대혼돈에 대한 처방과 대안"이라고 말했다.

"지역의 사상적 토대 위에서 세계로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는 동학과 정역, 증산의 공통분모와 이를 토대로 한 남조선 사상의 현대적 의의가 함의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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