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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10월 18일 대법원장 유태흥에 대한 탄핵소추에 관한 결의안
ⓒ 국회 회의록

판사는 판결로만 말해야 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누구나 표현의 자유가 있다. 대법원장을 공개 비판한 정영진 부장판사도 마찬가지다. 또한 정 부장판사 발언의 진의를 어느 법언(法諺)처럼 "선의는 항상 추정된다"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이해되지 않는 구석들이 있다. 정 부장판사는 "국회에서도 대책을 강구하여야 합니다. 최악의 경우 탄핵소추도 고려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국회의원의 한 사람으로서 검토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하지만 정 판사가 거론하는 대법원장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과연 국회가 탄핵소추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의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 해당될 수 있을까?

헌법은 탄핵소추 요건으로 '직무관련성'을 요구한다. 헌법은 탄핵소추를 통해 단순히 개인의 징계에 그 목적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 판사의 논거는 대법원장에 대한 '심정적 반발'이 주를 이룬다.

또 전직 재직 시의 행위도 탄핵소추의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우리 헌법학계의 다수설은 이를 부정한다. 그런데 정 부장은 현재의 사실보다는 불명확한 과거의 의혹을 집중 제기한다.

'헌법과 법률에 위배할 것' 또한 탄핵소추의 본질적 요건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대법원장의 어떤 행위가 어느 법령에 위배되었는지에 대한 입증이 법률가인 정 판사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

인사제도에 대한 불만인지, 직급제의 변칙운용에 대한 문제제기인지, 도덕성에 대한 문제제기인지, 변호사 비즈니스 활동에 대한 경제적 가치평가인지 좀처럼 분간이 되지 않는다. 나아가 조폭사건을 변호했다고까지 비판한다. 살인범을 변호하면 살인사건을 옹호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어느새 의뢰인과 변호인의 인격을 동일시한다. 사건과 인격을 구별해내지 못한다. 변호사의 자격으로 판사가 된 정 부장판사 스스로, 사실상 직업변호사제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소추 사건과의 비교도 적절치 못하다. 1985년 10월 18일 발의된 '대법원장 유태흥에 대한 탄핵소추에 관한 결의안'을 보자.

핵심내용은 "법관 인사를 행함에 있어 정부권력의 남용을 견제하는 올바른 판결을 한 법관, 또는 그를 염려하는 법관 등에 대하여 헌법 제107조 제1항에 위배하여 불리한 처분을 감행함으로써 직무집행에 있어 헌법을 위반한 탄핵사유에 명백히 해당된다"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적 증거로 1. 즉심절차에서 대학생들에 대한 유언비어 날조 유포 혐의 사실을 무죄로 판결한 일이 있다는 이유로 박시환 판사(현 대법관)에 대해 강원도 영월지원으로 어처구니없는 좌천 발령을 한 사실 2. 서울 형사지방 법원 조수현 판사가 같은 사건에서 무죄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같은 조건의 동료 법관에 비해 불리하게 충남 강경지원으로 전보 발령한 사실 3. 소위 공안사건의 영장을 기각했다는 이유로 법관 수 명에게 불리한 인사이동을 자행한 사실 4. 광주 고등법원 윤석명 부장판사에 대해 장흥지원장으로 보직하는 파격적 격하 인사를 단행한 사실 5. 이러한 파행적 인사발령이 법관의 독립성을 저해할 것이라는 취지의 글을 법률신문에 기고했다는 이유로 서태영 판사에 대해 새로 발령받은 날 바로 다음날 새로 부임하자마자 서울 민사지방법원에서 경남 울산지원으로 전격 좌천 발령한 사실 등을 적시한다.

정 판사 글의 수신자는 이미 일반 시민

▲ 1985년 10월 21일 대법원장(유태흥)에 대한 탄핵소추의 건을 다룬 국회본회의 회의록
ⓒ 국회 회의록

과연 정 부장판사는 자신이 거론하는 현 대법원장에 대한 여러 의혹들이 1985년 당시 유태흥 대법원장이 자행했던 법관의 독립성에 대한 중대한 침해 사실과 유사하다고 생각하는가.

정 판사의 글은 이미 내부통신용 글이 아니다. 수신자는 이미 일반 시민이다. 그런 차원에서 정 판사의 글 중 정치권에 던지는 아픈 부분도 있다. "심지어 집권 여당 내의 내부적 갈등까지 법원에서 해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부분이다. 필자는 일관되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를 반대한다. 사법부의 역할이 증대하는 것은 정치의 약화, 나아가서는 정치의 붕괴가 가져온 것이라는 최장집 교수의 의견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대법원이 "선출된 관리들이 맡아야 할 중요한 법률과 정책의 결정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로버트 달)에 반대한다. 맥락은 다르지만 전혀 요건이 성립되지 않는데도 탄핵소추를 희망하고 있는 듯한 정 판사의 발언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정 부장판사의 발언은 이미 '다른 수단에 의한 내부통신'이 되고 말았다. 이것은 차라리 정치활동의 또 다른 표현이다. 물론 판사도 정치적 표현의 자유는 인정된다. 그러나 재판의 신성함과 독립성에 비춰볼 때 정치활동의 일환으로서의 표현의 자유의 한계는 인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정 부장은 이미 표현의 자유의 한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고 '다른 수단에 의한 내부정치활동중'이다.

그래서 정 부장판사가 끌어다 붙인 '자백간주 판결론'이 예사롭지 않다. 어느새 이 사건의 원고는 정 판사이고 대법원장은 피고가 됐다. 정 판사는 선이고 대법원장은 그 반대편에 서 있다. 정 판사의 일방적인 공세로 촉발된 사건임에도 어느새 대등한 당사자 사이의 '법정 공방 프레임'으로 전환돼있다.

단 세 통의 내부통신용 편지로 정 부장판사는 용감한 내부고발자가 됐고, 결코 정면으로 대응하지 못할 형편에 놓여있는 대법원장은 이제 '자백간주 판결'에 따라 패소를 감내해야 할 지경에 있다. 이것이 정 판사가 꿈꾸었던 '공정한 재판'의 전범이 될 수 있을까?

사건의 본질과 상관없는 '선전과 선동'은 '법원의 신성함'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법관직은 일신전속적 직업이 아니다. 천부적 직업도 아니다. 일시적으로 국가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정 부장판사의 '사법권력'은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다.

덧붙이는 글 | 최재천 기자는 현재 국회의원입니다.


태그:#정영진, #이용훈, #대법원장, #문형배, #최재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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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 김대중평화센터 고문으로, 연세대 의과대학 외래교수, 이화여대, 영남대, 전남대 로스쿨 및 광운대 겸임교수로 재직중입니다. 홈페이지는 www.e-sotong.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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