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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조부의 휘호비(왼쪽)와 생애비(오른쪽). 당초 사업을 시행한 단체는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의 휘호비와 생애비를 세운다며 국고를 지원받아 뒷면에 새기고, 앞면에는 이 명예회장 조부의 확인되지 않은 독립운동 행적을 새겼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대전시가 독립운동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워놓고 되레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잘못 세워진 기념비를 시정해 달라는 시민단체의 요구에 "행정기관이 할 일이 아니"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새삼 행정기관의 '막무가내식 행정'이 새해에도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됩니다.

@BRI@그만 쓰고 싶습니다. 이미 숱하게 따져 왔기 때문입니다. '쇠귀에 경 읽기'를 반복하다보니 지겹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실만 간단히 요약해 보겠습니다.

지난 2000년, 대전시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에 1260만원을 국고보조 했습니다. 대전지역의 대표적 항일 애국지사인 김용원 선생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우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독립운동 기념비의 주인공은 김용원 선생이 아니었습니다.

주인공은 대본에 없던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조부였습니다. 김용원 선생이 등장하기는 했지만 이 명예회장의 조부를 빛내기 위한 엑스트라에 불과했습니다. 기념비 '앞면'은 이 명예회장 조부의 생애와 휘호로 채워졌고, '뒷면'에 새겨진 김용원 선생은 이 명예회장 조부와 독립운동을 함께한 인물로 각색됐습니다.

하지만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이 명예회장 조부가 항일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자료는 찾아 볼 길 없습니다.

잘못 세워진 '미확인 독립운동가' 기념비, 그리고 7년

어찌된 일일까요? 국고를 보조받은 단체가 약속과는 달리 계획에 없던, 독립운동 행적이 확인되지 않은 엉뚱한 사람의 기념비를 세운 것입니다.

물론 대전시도 속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전시는 버티기로 일관했죠. 그러다 때늦은 자체 감사를 통해 "관련공무원의 업무소홀로 당초 계획에 없던 인물이 각인된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고 시인합니다. 이어 "조속한 시일 내에 기념비 문안내용을 수정해 건립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렸습니다. 하지만 잘못 세워진 기념비는 여전히 시민공원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지난 1월까지 7년간의 경과입니다.

지난 2월 초에는 이를 보다 못한 시민단체가 나섰습니다. 대전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박성효 대전시장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냈습니다. 한 마디로 뭉뚱그리자면 대전시 때문에 잘못 세워진 기념비를 수정 건립할 의향과 계획이 있느냐는 물음이었습니다.

대전민족문제연구소를 통해 21일 대전시장의 답변서를 받아보았습니다. 대략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 잘못 세워진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조부의 휘호비는 아직도 그대로 서 있다. 이 명예회장 조부의 휘호(國忠民爲)와 호(舒卿)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엉뚱한 사람 기념비 세웠는데 허위가 아니라니요?

"1)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는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제출한 당초 사업계획서에 없던 사람이다. 2) 하지만 사업계획서에 허위 사실을 기재했다거나 교부받은 돈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3)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조부의 독립운동 여부에 대해서는 행정기관에서 판단할 사항이 아니다. 4) 기념비 수정 재건립은 대전시가 아닌 시행 단체에서 할 일이다."

과연 그렇습니까?

박 시장님께 묻겠습니다. 당초 사업계획서에 없던 엉뚱한 사람이 기념비 주인공으로 등장했는데 사업계획서가 허위가 아닙니까? A라는 사람을 기린다며 돈을 받아다 B라는 사람을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는데 '다른 용도'로 쓴 돈이 아니라니요? 행정기관이 조성한 공원에 대전시가 지원한 돈으로 미확인 독립운동가를 추앙하는 기념비가 세워졌는데 행정기관이 수정할 책임이 없다니요?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역사왜곡 우려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대전시의 수수방관을 통한 동조로 왜곡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정치꾼'이 아니라 '정치가'라면

법원 또한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 조부의 항일운동 행적이 '확인되지 않은 것'이라는 데 대해 "진실에 부합하거나 진실로 믿을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판단한 바 있습니다.

대전시와 대전시장이 '가짜 독립운동가'를 양성할 목적이 아니라면 잘못된 비문을 수정해야 합니다. '사기 피해'를 당했음을 시인하고서 "허위는 아니었다"고 해당 단체를 두둔하는 앞뒤 없는 답변도 삼가야 합니다.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의 눈치를 보느라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라면 7년간의 무소신을 거두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은평공원 기념비를 보며 엉뚱한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기리는 왜곡이 이뤄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전시장 스스로 "'정치꾼'은 다음 선거만을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강조한 바 있습니다. '정치가'라면 더 이상 대전시민이 공원을 거닐다 왜곡된 사실에 속게 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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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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