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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31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1가 매경미디어센터내 사무실에서 긴급조치 판결문 1412건을 분석한 긴급조치위반 판결분석 보고서가 수록된 '2006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배포했다. 사진은 보고서 중 '사건번호' '적용사항' '피고인 성명 및 직업' '형량' '판결요지' '재판관' '비고' 등의 내용이 담긴 긴급조치위반 판결문.
ⓒ 오마이뉴스 권우성

오랜만에 저널리즘이 실명보도의 힘을 보여주었다. 긴급조치 사건 담당 판사 가운데 현직 고위 법관의 명단을 밝힌 <한겨레>의 보도가 그것이다.

당장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동아일보> <세계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은 즉각 여론재판이자 파괴적인 과거 캐기라며 '명단공개'에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 신문들이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도 '실명'이었다. 어떻게든 그 공개를 막자는 것이었다. 정확하게는 추후에 있을 또 다른 실명 공개를 막자는 것이었을 터다.

파문은 일단락되는 듯하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가 관련 보고서를 신속하게 공개했다. 오히려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이 비정상이라며 논란을 정면 돌파했다. 한나라당도 대응을 자제했다. 일부 신문들의 부정적 여론몰이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으로서는 이 사안이 갖는 폭발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던 듯하다. 대선후보 주자들의 엇갈리는 셈법으로 당내 사정 또한 복잡했을 터이다.

물론 이번 사안에서 그 핵심은 판사들의 '실명'이 아닐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것처럼 이번 긴급조치사건 판결 보고서는 긴급조치사건의 실태 파악을 위한 기초자료일 뿐이다. 긴급조치가 얼마나 국민을 억압했는지, 또 인권을 어떻게 짓밟고 유린했는지를 파악해보기 위한 기초 작업일 뿐이다. 그 궁극적 지향은 유신체제의 폭압적 정치체제의 실상과 인권유린 실태 등을 드러내는 데 있을 터다.

하지만 <한겨레>의 실명 보도를 통해 우리는 과거사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논의의 물꼬를 트게 됐다. 당신이 그 때 그런 자리에 있었으면 어떻게 했겠느냐는 근본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것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오늘의 현안이자, 미래에 대한 화두다. 당시 그 분들을 비난하자는 것이 아니다. 바로 우리 자신들에게, 그리고 우리 사회의 젊은 세대들에게,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던지진 화두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판결한 판사 가운데 현직 고위직에 있는 분들은 12명으로 집계됐다. 헌법재판관 두 분, 대법관 4분이 긴급조치 사건들을 맡았다. 현직 고위직에 있는 법관치고 유신체제를 거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이들이 형사재판을 맡아 긴급조치 사건을 다루고 유죄판결을 내렸다 해서 그렇지 않은 다른 판사들과 달리 취급될 이유는 없다. 그 시대가 그러했으니 어쩌겠는가? 하지만, 그 과거를 어떻게 해석하고, 지금은 어떤 태도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31일 오후 서울 중구 필동1가 매경미디어센터내 사무실에서 긴급조치 판결문 1,412건을 분석한 긴급조치위반 판결분석 보고서가 수록된 '2006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배포한 뒤 송기인 위원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위원회의 입장을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한겨레>의 긴급조치 판결 판사 실명보도... 과거사 아닌 현재의 문제

<한겨레>는 이 분들에게 물었다. 당시 판결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분들은 답변은 크게 두 가지로 나왔다. '특별히 할 말이 없다'는 식의 회피성 답변. 그리고 '실정법에 따라 했을 뿐'이라는 자기옹호성 답변. 그런 분들이 지금도 한국 사법체제의 정점에 서 있다.

이 분들의 반응에는 돌연 제기된 과거의 아픈 상처를 건드린 데 대한 자기보호심리가 먼저 작동했을 수도 있다. 사법부의 최고위간부로서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토로하기 어려웠던 측면도 감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을 떠나 변호사로 개업한 다수의 당시 긴급조치 사건 담당 전직 법관들의 반응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긴급조치가 악법이라 했더라도 유신체제 하에서 법에 따라 판결해야 하는 판사로서 달리 어떤 선택이 가능했겠느냐는 변호인 셈이다. 일제시대 친일논쟁과 꼭 닮은 꼴이다.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해서도 동일한 논쟁이 되풀이됐다.

이 지점에서 다시 그 질문을 우리 스스로에게 던져보자. 또 앞으로 유사한 상황이 전개된다면 과연 나는,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이냐고 자문해보자. 그 질문은 지금 있는 모든 법관들에게도 당연히 던져져야 할 것이다. 악법도 법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자신 과거를 변호한 그 분들은 또 어떻게 응답할지 궁금하다. 이런 질문으로 여론조사를 하면 그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우리 아이들은 또 어떤 답변을 내놓을까?

<경향신문>은 오늘(2월 2일) 당시 폭력적인 수사 방식으로 황당하기 짝이 없는 사건들조차 무리하게 기소한 검찰 역시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일부 긴급조치 검사의 명단을 밝히고, 법원과 검찰 등 그동안 과거사에 침묵해왔던 사법부의 과거사 정리 노력을 촉구하고 나섰다. 비단 법원과 검찰 뿐만이 아니라, 과거사에 대한 논의는 그 지평을 더 확장할 필요가 있다. 미래를 위해서. 우리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태그:#백병규, #미디어워치, #백병규의 미디어워치, #긴급조치, #실명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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