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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지마을' 아파트에서 본 주변 풍경. 학교(가운데)를 사이에 두고 뒤로 '반석마을'이 보인다. 하지만 수개월 전에는 모두 '양지마을'이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대전의 한 임대아파트 주민들이 아파트 이름을 놓고 수개월째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대전광역시 유성구 반석동 일원. 이 마을에는 최근 몇 년 동안 '양지마을' 아파트 5개 단지가 들어섰다. 그런데 지난해 8월부터 11월 사이에 '양지마을' 아파트가 갑자기 2개 단지로 줄었다.

아파트가 헐린 게 아니다. '양지마을' 민영아파트 3개 단지가 차례로 이름을 '반석마을'로 바꾼 것. 이때문에 '반석마을'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아파트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인접한 기존 3개 단지를 포함, 모두 6개 단지로 늘어났다. 물론 모두 민영아파트다. 이런 이유로 30년 장기 국민임대 주공아파트인 3·4단지(21~24평형)만이 마을 한복판에 섬 처럼 '양지마을'로 남게 됐다.

이때부터 '양지마을' 아파트 주민들이 추위를 타기 시작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음지'로 떠밀린 것. 인근 민영 '양지마을' 아파트가 일제히 명패를 바꿔단 속사정이 '임대주공' 아파트와 차별화해 가격 상승을 꾀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름 바꾸기에 가장 먼저 나선 곳은 39~45평형대인 5단지 주민들이었다. 5단지에서 법적 구성요건인 '주민 80% 이상의 동의'를 받아 유성구청의 승인을 얻자, 34~36평형 대인 1·2단지도 이에 가세했다.

이와 관련 건설교통부는 지난해 8월 집값을 띄우기 위해 아파트 명칭을 새 이름으로 바꾸는 행위를 원천 금지하는 지침을 전국 지자체에 하달했다. 하지만 해당 지역에는 이 같은 지침마저 적용되지 않았다.

건교부 "명칭 변경 금지" - 구청 "결격사유 없어 변경 승인"

▲ 학교 운동장을 사이에 두고 '반석마을'(민영)과 '양지마을'(임대)이 인접해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두 '양지마을'이었다.
ⓒ 오마이뉴스 심규상
관할 유성구청 관계자는 "지난해 9월부터 건교부 지침에 따라 집값 상승을 목적으로 주민들이 임의로 단지 명칭을 바꾸는 행위가 원천 금지됐다"고 밝힌 뒤 "하지만 양지마을의 경우 주민 편익을 이유로 동 이름을 딴 '반석마을'로 명칭 변경을 요청해와 결격사유가 없는 것으로 판단, 승인했다"고 말했다.

해당 지역의 한 공인중개소 관계자는 "아파트값 상승을 목적으로 지난해 해당 단지에서 일제히 이름을 바꿨다"며 "하지만 정부의 부동산 대책 등 때문에 실질적인 가격상승 효과나 거래는 미미하다"고 말했다.

반면 단지 명칭변경에서 비롯한 주공임대아파트 거주 주민들의 상실감은 매우 컸다.

'양지마을' 임대아파트에 거주하는 이아무개(39)씨는 "아파트 이름이 바뀐 후 같은 초등학교 고학년과 중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사이에서 민영아파트와 임대아파트로 나눠져 또래가 만들어지고 있고, 주민들 간에도 상대적 빈곤감과 위화감이 형성되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오아무개(36)씨도 "안 그래도 같은 학교 학생들 간에 주공아파트 거주 아이들을 '임대'로 불러 차별하고 있는 상태에서, 아파트 이름까지 바꿔 이를 심화시킨 이웃 주민들의 처사에 가슴이 아프다"고 토로했다. 5개 단지에 거주하는 학생들은 인근 두 개 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함께 다니고 있다.

주택공사 "명칭 다르다고 위화감? 명칭 변경 안 된다"

@BRI@ '양지마을' 주민들은 숙의 끝에 인근 단지와 같은 '반석마을'로 이름을 바꾸기로 결의하고 유성구청과 주택공사에 단지명칭 변경을 각각 요청했다. 하지만 구청은 물론 주공아파트 실소유주인 주택공사 모두 '명칭변경'이 불가하다며 난색을 표하고 있다.

유성구청 관계자는 "단지 이름 변경 신청은 소유주만이 할 수 있어 주택공사 측과 협의를 벌였으나, 불가능하다는 회신을 받았다"며 "안타깝지만 현재로서는 소유주인 주택공사가 합의하지 않는 한 다른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대한주택공사 대전충남지역본부 관계자는 "건교부에서도 단지명칭을 바꾸지 못하도록 지침을 내린 바 있고, 8개 단지 중 2개 단지만 명칭이 다르다는 사유만으로 주민들 간에 위화감이 조성된다고 볼 수 없어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다.

이 관계자는 "향후 구체적으로 악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될 경우 관련 기관과 협의, 검토해 보겠지만 현재로서는 명칭변경을 추진할 아무런 이유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임대아파트도 혐오시설?

▲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갈린 아파트 이름.
ⓒ 오마이뉴스 심규상
이에 대해 주민들은 주택공사 측이 입주민의 처지를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양지마을에 사는 김인숙(39)씨는 "먼저 상처를 준 쪽은 우리가 아니라 민영아파트 주민들"이라며 "민영아파트 입주민들도 이해되지 않지만, 이들의 명칭변경을 승인해준 구청의 행태와 이로 말미암아 주민들이 소외의식을 느끼고 차별받고 있는데도 이를 도외시하는 주택공사의 처사 모두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할 예정인 아이가 예비소집일에 아파트 단지 이름 앞에서 줄을 설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며 "같은 사람을 민영과 임대로 나누고 임대아파트마저 혐오시설 취급하는 사회 현실에 자괴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김헌오 '양지마을 3단지 임대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어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명칭변경을 위해 끝까지 싸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2005년에 입주를 시작한 유성구 반석동 일원은 행정복합도시와 인접해 있는데다 올 상반기 개통예정인 대전도시철도 1호선 종착점에 있어 대전에서도 주택 가격이 높게 형성된 곳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양지마을' 3, 4단지에는 16개동, 약 1200여세대가 거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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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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