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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13일)에 가족들과 무작정 전남 구례로 향해 달렸다. 진작부터 가려고 했지만, 가지 못했던 구례 오산(542m) 꼭대기에 있는 사성암(530m)에 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구례를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사성암에는 오르지 못했다. 결국 여행 책자나 기사에서 자주 보면서 꼭 가보고 싶었던 그곳, 사성암을 찾아갔다.

광주에서 호남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곡성 IC로 나갔다. 곡성 섬진강변을 달리다가 압록을 지나갔다.

구례로 가는 도중에 만난 섬진강 물결은 은빛이었고, 우리 가족을 향해 어서 오라는 손짓을 하는 것만 같았다. 도시에서 벗어나 잔잔하게 일렁이는 강물을 본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차 창문을 열고 "와∼" 하면서 달렸다.

구례에서 약 2km 거리에 있는 오산은 구례와 섬진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곳곳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이 있었다. 햇살은 좋았지만 겨울이라 바람은 찼다.

오산에 가까이 가니 등산로와 주차장이 보였으나, 우리 가족은 차를 타고 정상으로 올랐다. 오르는 도중에 경사가 심해서 내심 불안했다. 맞은편에서 차가 내려오면 어쩌나 하는 염려도 생겼다.

천천히 차를 타고 오르다 보니 정상 부분에 사성암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주 조금씩 말이다.

▲ 사성암에 오르는 도중에 올려다본 모습
ⓒ 고병하
무사히 올라와 절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아래 등산로를 내려다보니 중년 여성분이 혼자서 등산로를 타고 올라오시는 모습이 보였다.

"혼자서 이 길을 오르시는 거예요?"
"네, 매일 올라요. 눈 오는 날만 빼고…."
"그래요? 와∼ 대단하시네요."

우리 가족이 새로 난 길로 오르려고 하니, 그분이 전망 좋은 길로 안내를 해주신다. 그 분은 "저기가 구례고, 저쪽 산은 지리산 노고단이고…"라면서 설명을 알기 쉽게 해주시면서 절 쪽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셨다. 이어 자신은 산 정상으로 오른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우리 가족은 감사함을 표시하고 사성암으로 갔다.

▲ 자연과 하나되어 어우러진 사성암 모습
ⓒ 고병하
절벽 같은 바위틈에 걸터앉은 사성암을 보고, 절에 가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아들 준호도 환호성을 질렀다. "와∼∼ 여긴 절이어도 좋다" 하면서 말이다.

딸 자연이는 기왓장에 글씨가 많이 새겨진 걸 보고는 우리도 쓰자면 졸라댔다. 스님이 기와 한 장과 흰색 펜을 주시며 가족 이름과 주소, 그리고 원하는 문구를 쓰라고 하셔서 가족끼리 돌아가면서 희망을 적었다. 돈 만원을 내고 기와불사를 하고 나니 괜히 안심이 되는 건 무슨 심사인가?

▲ 볼수록 신기한 약사전
ⓒ 고병하
스님과 짧은 얘기 몇 마디를 나누고 약사전으로 올랐다. 돌계단이 소담스러웠다. 곳곳에 소망이 적힌 기와가 놓여 있었고, 작은 돌탑들이 작은 희망을 안고 세워져 있었다.

드디어 약사전에 올라 섬진강을 내려다보니, 굽이굽이 흐르는 섬진강 물을 자라가 먹고 있는 모습이어서 '자라 오(鰲)' 자를 써서 '오산(鰲山)'이라 이름하였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이면 바로 섬진강 물을 마실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절에 가도 별로 대웅전에 들어가지 않는데, 무심코 열고 들여다 보았던 대웅전에서 보물을 발견했다. 바로 '마애 약사 여래불'이었다.

▲ 원효스님이 손톱으로 그렸다는 마애불을 주불로 하는 약사전
ⓒ 고병하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마애 약사 여래불은 원효 스님이 선정에 들어 손톱으로 그렸다는 사성암의 불가사의한 전설이자 자랑이다. 약 25m의 기암절벽에 음각으로 새겨졌으며, 왼손에는 애민중생을 위해 약사발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전라남도 문화재 222호로 지정되었으며 건축양식은 금강산 보덕암의 모습과 흡사하다.'

마애 약사 여래불이 그 자리에 있다니…. 그렇다면 마애 약사 여래불에 맞춰서 약사전을 지었다는 말인가? 이렇게 높은 절벽에 말이다.

마애 약사 여래불은 금빛 비단 실로 옷을 지어 입고 서 있는 듯했다. 불전함에 돈을 넣고 아이들과 함께 절을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 절을 하기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자연이가 앙증맞게 절을 잘도 했다.

▲ 약사전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 고병하
여기에서 잠시 사성암 유래를 알아보자.

사성암은 백제 성왕 22년(544년)에 연기조사가 본사 화엄사를 창건하고, 이듬해 사성암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사성암 사적에 의하면 4명의 고승, 즉 원효·의상·도선국사·진각국사가 수도하였다고 하여 사성암이라 부르고 있다.

또 송광사 제6세인 원감국사 문집에도 오산에 대한 언급이 보인다. "오산 정상에서 참선을 행하기에 알맞은 바위가 있는데, 이들 바위는 도선, 진각 국사가 연좌수도 했던 곳"이라 한다.

이와 같은 기록들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 이래 고려까지 고승들의 참선을 위한 수도처였던 곳으로 보인다.

▲ 수령 800년된 귀목나무
ⓒ 고병하
약사전을 둘러보고 지장전 쪽으로 향하니 수령이 800년 된 귀목나무 두 그루가 버티고 서 있다. 겨울이라 가지만 앙상하지만 여름이나 가을철엔 제법 운치 있겠다. 천 년의 백제 가람을 지켜주니 길어봐야 100년 사는 우리네 인간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과연 뭘까?

계속 오르니 스님들이 공부하는 곳인 듯한 암자가 있었고, 지장전을 둘러보니 주위에 소원을 가득 적은 기왓장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바위틈에 아주 작은 암자가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주위 틈마다 소원을 빌면서 올린듯한 동전이 많이 놓여 있었다.

▲ 관람객들이 소원을 빌 수 있는 소원바위
ⓒ 고병하
지장전에서 나와 소원바위 앞으로 가니 소원을 비는 촛불에 불이 켜져 있었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사성암은 여느 절과 달리 넓은 마당이 없다. 대신 가파르게 올라가는 돌계단이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 낸다. 바위 하나하나가 부처님의 법의처럼 암자 아래로 구례, 곡성 평야가 한눈에 펼쳐지고 멀리 지리산이 발꿈치 아래 놓인 듯하다.

무슨 소원이 그리 많을까? 가족 건강을 비는 소박한 염원, 사업 번창을 담은 내용들…. 뗏목을 팔러 하동으로 내려간 남편을 기다리다 지쳐 세상을 떠난 아내와 아내를 잃은 설움에 숨을 거둔 남편의 애절한 사연이 깃든 소원바위이다. 일명 '뜀바위'라고도 한다.

▲ 자연굴인 도선굴
ⓒ 고병하
소원바위를 지나 나지막한 돌담길을 걸으니 큰 바위들 틈에 산신각이 있고, 원효스님과 도선 스님께서 좌선하시던 곳인 자연굴인 도선굴이 있다. 겨우 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그 좁은 공간을 지나 굴 밖으로 나가면 멀리는 지리산이 보이고, 아래로는 구례와 섬진강이 보인다.

우리 아이들이 한참을 내려다보더니 소인국 같다나? 아무래도 걸리버 여행기를 떠올린 듯하다.

섬진강과 구례, 그리고 지리산을 바라보고 서 있노라니 어찌나 춥던지 사진 찍고 싶은 마음이 안들 정도였다. 잠시 서 있기도 추운데, 성인들은 그곳에서 수도를 했다니…. 그리고 이렇게 높은 절벽에 암자를 짓고 자연과 하나가 되어 수도를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
ⓒ 고병하
▲ 구례와 섬진강이 내려다 보인다
ⓒ 고병하
내려오면서 다시 올려다봐도 신기했다. 어떻게 저런 곳에 암자를 지을 수 있단 말인가? 가족들에게 소감을 물어보니 모두가 신기하다고 한다. 다음에 가게 되면 걸어서 오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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