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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8일 오전 11시

지방 소도시의 중학교에서 근무하는 나는 요즘 아이들과 자주 부딪힌다.

며칠 전부터 교실에 체육복 상의가 굴러다녀 몇 번이나 "누구거냐? 찾아가라"고 채근을 하며 짜증이 나서 '절약정신 교육을 어떻게 시킬까?'고민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마침 동창회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가 구한말의 귀중한 사진 몇 장을 보내왔다. 사진을 보며 '바로 이거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물건 귀한 줄도 모르고, '새로 사면되지'하는 물신주의에 젖은 학생들에게는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고 '왜 물건을 아껴야 하는가? 환경이 왜 중요한가?'에 대해 어른들이 입이 닳도록 잔소리를 하는 이유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BRI@옛 사진을 보면서 평소 무심코 넘겼던 일상들이 새로운 감탄과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들은 과거 우리 주변의 평범한 일상들이었지만 사진을 찍은 외국인들의 눈으로서는 전혀 다른 시각과 느낌으로 촬영됐고, 그들의 다분히 주관적인 시선이 담겨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 사진 대부분이 근본적으로 서양중심적 사고 내지는 오리엔탈리즘과 같은 서양우월주의 시각을 보이고 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문화적·인종적·지적 우월감과 종교적 선입견 등이 담겨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사진은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를 비춰준다는 객관성에서 깊은 감명을 주었다. 미풍양속의 소개와 외국인들의 표현대로 '조용한 아침의 나라','조선의 산하'가 아닌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저변 생활의 모습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나름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친구가 보내온 옛사진, 아이들은 어떻게 볼까

그래서 내가 가르치고 있는 중학교 2학년 학생들에게(2개반 68명) 3개의 사진을 크게 복사해 내용에 대하여 어떠한 힌트도 주지 않고, 문항을 주어 자유롭게 질문에 응하도록 했다. 첫 번째 질문은 "어느 나라 모습일까요?"이고, 두 번째는 "사진에 제목을 붙인다면?"이며, 세 번째는 "사진에 대한 느낌은?"이었다.

▲ 비올때 입는 도롱이는 60년대까지도 농촌에서 입었다
ⓒ 서문당간 민족의사진첩
1번 사진은 비올 때 입는 도롱이 모습이며 60년대까지도 시골에서 사용된 물건이다. 1번 물음에 대해 도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43명)'이라고 답한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다음은 '한국(15명)'이며, 나머지는 '동남아시아(8명)'라는 답이 나왔다. 설문지를 걷고 난 후 "왜 일본이냐?"는 물음에 대해 학생들은 "일장기가 보여서"라고 답했다.

ⓒ 오마이뉴스 성주영
1번 사진에 대해 68명 가운데 22%인 15명이 '오줌싸개'라고 답해서, "이유가 뭐냐?"는 질문을 던지자 "어릴적 자다가 오줌싸면 이웃집에 소금얻으러 키를 뒤집어쓰고 간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학생들은 답했다. 그래도 8명이 "비올 때 우의입은 사나이"라고 정확히 대답을 하기도 했다.

1번 사진에 느낌을 묻는 질문에 '불쌍하다(25명)'가 가장 많고, '더럽다(11명)', '일제 강점기(3명)' 순이었다. 절반이 '불쌍하다'와 '더럽다'는 부정적인 인식을 하는 것은 당시의 상황을 너무나 모르고, 현재의 편안함과 물질만을 보아온 학생들의 단면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 길쌈하는 모습
ⓒ 서문당간 민족의사진첩
2번 사진에 대한 국적은 인도(25명), 한국(15명), 몽골(7명)의 순이다. "왜 인도냐?"는 질문에 "터번을 쓰고 있는 모습에 그랬다"는 답이 나왔다. 제목으로는 ▲일하는 모습▲바느질 ▲어려웠던 시절이라는 순이었고, 길쌈하는 사람이라고 정답을 쓴 학생은 4명에 불과해 학생들이 우리 조상들의 풍습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 오마이뉴스 성주영
2번 사진에 대한 느낌으로는 ▲불쌍하다(32명)▲인도의 간디 시절(3명)이라는 답변이 주로 나와, 간디의 자급자족하는 모습에 대한 이미지가 학생들 사이에 확실하게 각인돼 있음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어떤 학생은 '다리가 아파 주무르는 모습이다'고 답변해 실소를 금할 수가 없었지만, '사진이 희미해서 수건을 터번으로 오해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 옹기장사
ⓒ 서문당간 민족의사진첩
3번 사진에 대한 국적 판별은 대부분이 지게위에 달린 갓으로 인해 대부분의 학생이 한국(57명)이라고 답했다.

제목은 ▲노동하는 남자(25명) ▲보부상(8명) ▲양은 냄비장수(5명) 순이며, 기인열전이라는 웃기는 답을 한 학생들도 있었다. 다만 2명의 학생이 정확하게 '옹기장수'라고 대답했다.

ⓒ 오마이뉴스 성주영
느낌으로는 ▲힘들어 보인다(20명) ▲불쌍하다(15명) ▲행상이다(5명) 순이었며, 기타에 속한 나머지 중에는 '할아버지가 힘이 세다'라는 대답이 몇 명 있어, 한복에 얼굴이 시커먼 모습은 할아버지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해주었다. 학생들은 당시 조선의 평균 수명이 60세도 안된다는 사실과 50세만 넘으면 할아버지 행세를 하며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질문지를 걷고 나서 "이게 모두 구한말 대한제국 시절의 모습"이라는 설명에 학생들은 "정말이에요?"하고 깜짝 놀란다. 심지어 당시 여자들은 애기 엄마라는 징표와 사내아이를 낳았다는 자랑으로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는 설명에 "에이!"하며 "야하다"고 야유한다.

이미지가 반복되면 내면화 된다

이렇게 커다란 세대차를 보이는 학생과 같은 교실에서 부대끼는 교사들은, 때로 말이 안 통한다. 그러니 새것 같은 체육복을 찾아가라고 성화를 대다가 속만 썩는다. 등교할 때 비가 왔다가 하교 전에 비가 그친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우산 가져가라고 성화를 하고 "제발 너희들이 돈 낸 우유 좀 먹어라(종례하고 나면 몇 개씩 우유가 남아있다)"고 통 사정을 한다.

86 아시안게임 육상부문에서 한국에 금메달을 3개나 선사한 임춘애 선수는 우승소감으로 "어릴적 육상 연습할 때, 우유 마시고 연습하는 친구가 제일 부러웠다"고 말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이 말은 옛날 이야기가 돼 버렸다.

학생들의 공통적 대답중 하나는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로 베트남과 북한을 꼽는다는 것이다. "왜 베트남이 못 사냐?"는 질문에 길거리에 가다보면 '베트남 아가씨와 결혼하세요'라는 플래카드를 봤기 때문이란다. "북한은?"이라고 추가 질문을 던지면 "무기만 만들잖아요"라고 답한다.

도롱이를 입은 사람도, 길쌈을 하는 아낙도, 무거운 등짐을 진 옹기장수도 모두 우리 조상들의 피와 땀이 묻어있는 모습이다. 한 장 한 장의 사진마다 진하게 묻어나는 조선인들의 체취와 진솔한 모습이다. 현재가 아무리 발전했다고 하더라도 과거없는 현재와 미래는 없다.

이미지가 반복되어 내면화되면 신념이 된다. 베트남과 북한, 한국전쟁의 피해는 학생들의 뇌리 속에서 '불쌍하다'는 신념으로 어느 순간 자리 잡았다. 다만 몇 명의 학생이 사진 설명을 듣고 대답하기를 "조상들이 너무 힘들게 살았는데 우린 감사하며 살아야 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학생들로 하여금 올바른 신념을 갖게 하는 것이 교사의 임무이겠지만, 때론 말이 안 통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8일 오전9시부터 2시간여 동안 걸려있었던 4번째 사진은 구한말 사진이 아닌 것으로 확인돼 뺐습니다. 이 부분을 지적해주신 독자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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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안 신문에도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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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 인권, 여행에 관심이 많다. 가진자들의 횡포에 놀랐을까? 인권을 무시하는 자들을 보면 속이 뒤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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